[283화]
한 달 뒤, ‘성좌 영원한 분노’의 내부.
육체(肉體)란 결국 피와 살이 도는 하나의 ‘세계’이며 우주이다.
성좌 영원한 분노의 진체에는 괴수만 사는 것이 아닌 수많은 벌레들도 살고 있었고, 그 형태와 크기, 종류가 모두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벌레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일단 인간과 비슷하거나 훨씬 큰 사이즈 때문에 생긴 것이 징글맞다는 것이었다.
이이이잉! 이이이잉!
“아오! 좀!”
끼이이익!
콰직!
티탄의 말뚝을 휘둘러 인간보다 훨씬 큰 벌레의 머리통을 터뜨리자,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체액과 함께 부서진 곤충의 겹눈들이 유성원의 눈앞에 흩어졌다.
소리부터 잔해물까지 완전 기분 나쁜 벌레들이었는데, 이 빛도 적고 사방이 살덩이로 가득 차 있는 곳에서 한둘도 아니고 산더미처럼 계속 몰려오니 정신적 외상을 입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명체의 몸이라고 하는데, 지옥이라고 하고 싶어진다. 화염 방사기 같은 게 필요할 것 같은데? 벌레 새끼들, 끝이 없네! 근데… 더 문제는 여기가 그 ‘두뇌’인지로 향하는 방향이 맞느냐인데… 아오!”
“그래도 객체 자체는 약해서 다행이긴 합니다. 게다가… 이거 의외로 식량이 되겠군요. 팔다리 부분에 살이 꽉 차 있습니다. 잘 조리하면 고단백 식량이 되겠네요.”
“…너, 참 비위 좋다?”
“전쟁 시절엔 먹을 게 없어서 문제였으니까요. 흠!”
끼이이익!
말하다가 발아래에서 진체의 살을 파고 튀어나오는 벌레를 처리하는 유청과 함께 유성원과 기사들은 계속해서 진격해 나갔다.
벌레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침범한 유성원과 기사들을 계속해서 덮쳤지만, 전투력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기 때문인지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하나 아무리 위협이 되지 않아도 단 한순간도 쉬지 못할 정도로 계속해서 몰려오는 물량은 사람의 정신을 지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와… 돌겠다. 그냥 진짜로 두뇌까지 일직선으로 뚫어야 하나? 그보다 우리, 방향은 잘 잡고 있는 거야?”
“잘은 모르지만 일단 위쪽을 목표로 잡으면 결국 두개골 쪽에 닿게 될 겁니다. 문제라면 역시 이 성좌 영원한 분노의 스케일이겠지요. 시간과 나아감으로 해결해야 할 겁니다.”
“후우우~”
한숨을 깊게 쉰 유성원은 다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벌레에게 티탄의 말뚝을 휘둘렀다.
하나가 죽으면 둘이 솟아오르고 또 죽으면 솟아오르고, 밥 먹는 중 자신들 옆에 솟아오르고. 그나마 다행인 건 유청의 말대로 이 벌레들은 물론이고, 여차하면 지금 밟고 있는 바닥과 벽 모두 살점으로 되어 있어서 식량엔 문제가 없다는 점이었다.
“…문제는 식수네. 기사단의 성소가 안 열리니까 이게 좀 걱정이네. 인벤토리에 잔뜩 챙기긴 했지만 이것도 무한한 게 아니라서 말이지.”
“잔뜩 챙긴 정도가 아니라, 소변도 다시 식수로 만들 수 있도록 정화 장치까지 챙기셨지요.”
“당연히 최악의 던전을 가는데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지. 안 그래?”
“그건 맞습니다. 후우~ 아무튼 계속 헤치고 올라가지요, 폐하.”
끄덕.
유청의 말에 유성원은 이 지옥 같은 살점과 벌레의 지옥에서 빠져나가길 빌며 계속해서 무기를 휘두르며 나아갔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길고 고독한 싸움이 계속 이어지고,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이 지옥 같은 살점 통로에 있던 것을 확인한 유성원은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나 그때쯤 고개를 들어 멀리 본 그는 이 긴 고기의 통로 끝에서 빛을 발견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그곳을 가리켰다.
“비, 빛이다! 빛! 드디어 빛이야!”
“폐하, 진정하십시오.”
“진정 안 하게 생겼냐?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도 모르는데… 이 어둠 속에서 드디어 빛을 찾았는데! 으헝헝헝.”
콰직!
얼마나 기뻤으면 전력으로 달리는 탓에 튀어나온 벌레들을 짓밟고 뭉개 버릴 정도였다.
물론 빛이 없어도 어두운 곳에서 움직이거나 행동하기가 불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태양빛을 받지 않고 오랜 시간 밤 속에서 산다고 상상하면 빛에 대한 갈증이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나왔다! 근데… 여긴 어디지?”
“거대한… 공동이군요. 게다가 저 빛은?”
“태… 양……?”
머리 위 드높은 곳에 떠 있는 빛의 덩어리. 따스한 빛을 지상에 비추고 있는 그 빛 덩어리의 존재는 누구나 태양이라고 말할 것같이 생겼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성좌 영원한 분노의 내부. 밖으로 나간 게 아닌 이상 태양이 떠 있을 리가 없었다.
하나 땅 밑도 그렇고 태양 같은 광원만 떠 있지, 하늘이 푸르지 않은 걸 보아선 나간 게 아닌 것 같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곤 주변을 살펴보니 밖으로 나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와… 자연 경관이 장난 아니네. 저 뒤의 살 구덩이에서 나온 곳이라곤 상상도 안 돼. 저기 봐! 나무랑 숲이야! 와, 굉장해. 후우~ 답답하던 저 안의 공기와 다르게 신선한 공기 냄새를 맡고 싶다.”
“그래도 투구를 벗으시는 건 아직 이르옵니다, 폐하.”
“알았어. 후우우~ 그래도 보기라도 좋은 광경이니 좀 살 것 같긴 한데… 여긴 대체 어디일까? 그 수호자가 있는 두뇌로 향할 수 있으려나? 아무튼 여기서 일단 좀 쉬었다 가자. 그 벌레들도 여긴 안 오는 것 같네.”
유성원의 의견에 동의한 유청은 일단 휴식을 위해 진을 치기로 한다.
오랫동안 어둡고 축축한 곳에 있다가 해방되었으니 오랜만에 갑주도 벗고, 진짜 태양빛은 아니겠지만 햇살을 받고 싶은 마음이 오죽했을까?
유성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인벤토리 안에 있는 자재들로 순식간에 간이 진지를 만들고, 다른 기사들에 의해 내부 공기라든가 안전을 확인한 뒤에야 드디어 투구를 벗고 간만에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푸아아아아아아! 이 해방감! 진짜 사람 미치는 줄 알았어. 크으으으으! 공기가 맛있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단장님의 갑주가 서운해하실 것 같은데 말이죠. 그거 엄연히 정화 기능이 있을 겁니다.”
“정화되는 건 알아도 분위기라든가, 환경의 차이라고! 내 갑주가 좋은 건 알지만 그래도 한 달 내내 화장실 갈 때만 빼고 계속 차고 있고, 게다가 밀폐되어 있으니까 땀 냄새라든가 그런 게 계속 도니까 어쩔 수 없잖아. 후아아아~”
“그건… 또 그렇네요. 아무튼 정찰 다녀오겠습니다, 단장님.”
“위험하면 바로 돌아와.”
정찰을 나간 섬멸을 뒤로하고 유성원은 해방감을 맛보면서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탄산음료를 꺼내 입안 가득 들이켜며 시원함을 맛보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샤워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직 수원지라든가 물을 보급할 방안을 발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식수를 아껴야 해서 참아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혼자 들어오길 잘했다는 걸까?’
다른 헌터들도 가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유성원은 매우 위험하다는 핑계로 다들 바깥 전투에 밀어 넣고 자신만 혼자 들어온 상황이었다.
기사들은 오직 자신의 마력을 소모하기 때문에 인벤토리엔 오롯이 자신의 안전을 위한 물건만 가득 담아 와 별도의 보급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시간이… 보자. 한 달이 넘었는데… 밖엔 무사하려나? 일단 천군대장군과 대장군들의 신호가 무사한 걸 봐선 아직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어르신도 걱정되고…….’
몸과 마음이 한번 풀리고 나니 또 걱정거리가 산더미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나마 바깥의 전투는 대장군들이 무사해서 걱정이 덜 되었지만, 더 걱정되는 건 백가연 어르신이었다.
올림푸스 길드의 천공섬과 함께 이 안에 먹혀든 그분. 이곳에선 기사단의 성소도 열리지 않아서 찾을 방안이 도무지 없었다.
‘아무튼 빨리 그 은색 도마뱀을 잡아서 처리하고 봐야…….’
“단장님! 단장님! 큰일 났습니다! 적들이!”
“…적? 뭐, 뭐야?”
정찰을 나갔던 섬멸이 멀리서 날아오면서 경보를 알렸고, 유성원은 벌떡 일어나서 바깥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하늘을 나는 그녀를 지상에서 쫓아오는 한 무리의 그림자들이 보였고, 좀 더 상세히 본 결과 그것은 아까 전 멀리서 자연 경관처럼 존재하던 숲이었다.
“숲이… 걸어와? 아니, 저거 나무…….”
“그러면 정확히 나무가 아닌 거겠지요. 전원 전투 준비!”
“하아아~ 그럼 그렇지. 젠장!”
철컥!
어떤 존재인지는 아직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자신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만큼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재무장을 하고 달려오는 그 생물들을 향해 싸움을 준비하는 유성원과 기사들이었다.
다가오는 적들을 보면서도 유성원은 어떻게 해야 두뇌로 갈 수 있을지 생각하며 적들을 맞이했다.
그으어어어어…….
“식물인가 싶었더니 소리는 또 왜 좀비냐고!”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다가온 식물 군대는 움직이는 나무와 풀로 구성된 몬스터라고 봐도 좋았다.
나뭇가지와 촉수를 휘둘러 대며 공격하는데, 겉보기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지만 닿은 적의 피부에 씨앗 같은 것을 심거나 가시를 붙여서 적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것을 천검군 기사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자 급격히 위험도가 높아졌다.
“기생… 식물인가? 다들 조심하십시오!”
“그럼 결국 이것도 기생충인가? 젠장!”
[기생충이라니. 엄연히 이곳 두개골과 육체 내부에 신선한 산소를 공급해 주고 외부 침입자로부터 지켜 주는 좋은 존재들인데. 대신 골수와 혈액을 빨아먹긴 하지만 말이야.]
그때, 머리 위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유성원은 고개를 들어 그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은빛 갑주를 입은 거대한 용인(龍人)이 날개를 펼친 채로 공중에서 유성원 일행을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의 주변엔 수많은 비룡들이 같이 떠 있었다.
마치 유성원이 기사를 이끄는 것처럼 이 성좌 영원한 분노의 수호자인 저 용인이 이끄는 것이리라.
[아무튼 두뇌방까지 무사히 온 것을 축하한다. 역시 ‘별의 수호자’답게 길을 아주 잘 찾는군.]
“아니, 상식적으로 머리면 위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게다가 우리가 한 거라곤 벌레를 뚫고 올라온 것뿐인데……. 아무튼 여기가 두뇌방이라는 건 드디어 끝장을 볼 때라는 건가?”
[그럴 리가? 나는 그저 처음으로 이 영역에 들어온 용사들을 치하할 목적으로 온 것뿐이다. ‘두뇌방’은 이곳이긴 하지만, ‘두뇌’는 이 위에 있는 저 ‘별’이니 말이야.]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키는 용인. 그곳엔 태양처럼 따스한 빛을 내며 이 안을 비추고 있는 광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드높은 곳에 존재하는 광원이 두뇌라는 것에 유성원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데, 여기까지 오는 데도 한 달을 썼는데 저 멀리 위에 있는 두뇌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아니, 대체 얼마나 높은 거야? 이 안의 영역은 무슨 늘어나는 거야? 우리가 입에서 한 달이나 올라오기까지 했는데 왜 내부가?”
“폐하, 성좌에 대해… 인간의 상식을 들이대시면 안 됩니다.”
“…그건 또 그렇네. 후우우우!”
목표 지점을 발견했지만 그 범위가 너무 큰 것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지 심호흡을 크게 한 유성원은 마음을 다잡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달려드는 식물과 나무들을 처치해 나갔다.
그것을 지켜보던 이 성좌 영원한 분노의 수호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빛을 내뿜는 광원인 성좌의 두뇌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