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하지만 그래도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아니, 이유를 찾는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한 걸까요? 잘 모르지만, 저는 검을 잡고 싸워 왔고 어느덧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를 했는데… 그중엔 저 스스로도 잘했다고 생각한 것도 있지만, 잘못되었는데, 어쩔 수 없이, 믿지 못하니까, 당하기 싫어서 한 것들도 많았어요.”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각성을 숨기려 했다거나, 싸움을 이유로 나라에서 거액을 뜯어낸다거나, 성좌에 지배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람들이 피난 가고 죽는 것을 방치한다거나.
결정적으로 이번 전쟁에 대해서도 초기에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들이 난동 부리는 것을 방치한 일까지, 많은 잘못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은 누구에게나 말하고 또 누구든 제 입장이 되면 아마 저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예, 누구나 자기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기본이니까요. 앞서 말했지만 전 평범… 아니, 그보다 더 못한 사람일 겁니다. 대학 졸업은커녕 배운 것도 제대로 없는 데다 밑바닥 인생이었으니까요. 그런 제가 이런 큰 힘을 받았어도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때까지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대해서 그동안 일절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기적이고 또 계산적이기도 했으며 사람의 인명을 무시하기도 했지만, 그렇더라도 어디까지나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고려된 가치는 각각 달랐지만, 그래도 유성원은 그동안 그것을 좇아왔다.
“하지만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저는… 위에 있을 때나, 아래에 있을 때나,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제 평화로움과 행복을 추구했다는 겁니다. 보통의 인간들이 좇는 그것을 말이죠. 예, 그거 하나는 확실합니다. 죽어도 전… 인간으로서 솔직하게 추구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다 죽는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몇 번을 생각하든 말이죠.”
막상 글로 써 놓고 보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논리도 안 맞고 논점도 막 왔다 갔다 해서 알 수 없는 유성원의 말이었다.
애초에 그는 완벽한 범인(凡人)이었고, 각성으로 얻은 스킬에서 힘과 지혜를 빌려 모든 일을 해 왔었지만 지금 하고 있는 말은 오로지 유성원 자기 자신의 두뇌와 경험에서 나오는 것들이니 내용도, 순서도 엉망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원래부터 설득이나 거창한 연설 같은 게 아니라 유청의 제안으로 신세 한탄이라도 하면 가슴이 편해진다고 해서 하는 것이었고 말이다.
“그러니 여러분… 한 번만 더 생각해 봐 주세요. 지금 하는 행동이 과연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인지 말이죠. 물론 남의 말을 듣고 바뀔 정도라면 진작 바뀌었을 거고, 무의미한 일이겠지만… 아무튼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돌아와서… 다시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카메라가 꺼지고 유성원의 방송은 끝이 났다.
그리고 유성원은 생각보다 마음의 답답함이 많이 가라앉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 속에 묻어 두는 것보다 일단 떠들고 보는 게 상당히 효과가 있던 것 같았다.
게다가 말하면서 스스로 생각도 정리가 되었고, 머리도 맑아진 느낌이었다.
“뭐랄까, 유청 네 말대로 하니까 좀 나아진 것 같다. 덕분에 속이 후련해졌어.”
“그러셨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고 생각을 풀다 보니 하나 더 떠올랐는데, 세계가 멸망할까? 두려우면 예방책을 남기면 되잖아. 가울프나 섬멸 둘을 아영이에게 남겨서 지키고 있으라고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또 막상 생각하니 그 둘 차이 때문에 안의 싸움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또 두렵네.”
“이미 고려했던 사항입니다, 폐하.”
“그럼 뭐, 어쩔 수 없네. 아으으으으! 그럼 남은 시간 동안 눈 좀 붙일게. 도착하면 이제… 죽도록 싸워야 할 테니 말이야.”
전투 시작까지 몇 시간도 채 안 남은 상황에서 유성원은 휴식을 취하러 들어갔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는 결국 두서없고 설득력도 하나도 없어서 속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기에 그 방송의 여파 같은 건 전혀 신경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가 진심으로 내뱉은 이 넋두리들은 생각 이상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일단 가장 뜬금없는 유언 방송을 본 신아영에게 한국, 중국, 인도 정부의 사람들이 저 갑작스럽고 이상한 방송의 내막에 대해 물으러 온 것이었다.
“아빠의 저 이상한 방송의 내막이요? 그냥 보는 대로예요. 대충 생각 잘 하라는 거겠죠. 하아아~ 성좌 영원한 분노의 공략에 들어갔고, 이때까지 세계 평화의 든든한 기둥이 되었던 올림푸스 길드는 성좌 복수의 티탄과 치고받기 시작했죠. 그리고 두 쪽 다 지금 상황이 좋지 못한 상태구요.”
유성원 측의 경우 완전한 준비를 못한 채로 공략을 하기 위해 전선으로 향한 것이고, 올림푸스 길드는 성좌 영원한 분노의 두 번째 머리의 기습으로 천공섬 및 함대와 엄청난 수의 헌터를 잃은 바람에 성좌 복수의 티탄과의 전투에서 상당히 힘겨운 상황이었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미국 정부를 통해서 캐나다 및 남미의 헌터들을 지원해 달라고 올림푸스 길드에서 애원할 정도였다.
“그러니…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유럽과 아프리카 쪽에서 전쟁이 확전되기라도 한다면 인류가 멸망한다, 라는 경고 아닐까요?”
“으음… 확실히 단기간에 천만이 죽을 정도였으니……. 게다가 이대로 전쟁이 과열되면 또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죠.”
“더구나 사실 핵무기가 아닐 뿐, 그에 준하는 화력을 가진 무기도 많아요. 마법, 마정석 공학 등등…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아프리카든 유럽이든 안전한 게 기적일 정도로 화력을 축소한 상태로 싸웠죠. 무, 물론 상호 확증 파괴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좌의 광기에 휩싸이면 그것도 무시할 가능성이 큰데…….”
“그럼 결국 유성원 헌터님의 말은… 성좌의 시대를 끝내라는 게 아닐지? 인간 이성에 대한 고찰을 뜻하는 것에 가까웠으니 말이죠. 게다가 그분의 행보야말로 성좌에 의존하고 지배당하던 인류의 해방과 같은 길이지 않았습니까?”
웅성웅성…….
유성원의 성격과 생각에 대해 뻔히 아는 신아영이 일부러 그의 의도에 대한 해석을 제대로 하지 않자, 이리저리 자기들끼리 떠들면서 의도를 확대 생산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늘 그렇듯 유성원의 진짜 성격은 가까운 사람들이나 잘 알며, 외부 회담이나 조직 간의 협상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전투에서도 늘 기사들과 다녔기에 그의 진짜 모습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아무리 봐도 그냥 혼자서 혼란스러운 마음 정리하려고 방송한 게 티가 나기도 하고… 문자 메시지에도 드러나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야지.’
“그, 그러면 어찌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하나뿐이죠. 사람들과 만나서… 생각하고 대화해야죠. 미국, 아프리카, 유럽에 다 연락 넣으세요. 명분은 우리 아빠가 공략에 실패하면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한 것과 올림푸스 길드에 대한 것과 성좌에 대한 것… 등등, 우리 ‘인류’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말이죠.”
“만약 누구든 간에 참석을 거부한다고 한다면……?”
“아마 그러긴 어려울 거라 봅니다. 일단 저희가 보내는 명분도 명분이지만, 아빠의 말에 대해 혼란을 겪고 있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그러고도 끝까지 거부한다면… 거기까지가 성좌에게 지배당한 ‘인류’의 한계인 셈이죠.”
신아영의 말을 시작으로 다른 이들은 그녀의 제안에 따라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것이 ‘인류 멸망’ 직전에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회의를 마친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다음 일정을 준비하며 이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후우우~ 이렇게 이용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엄마, 나 잘한 거 맞지?”
“응, 그래. 잘한 거 맞아. 그 사람, 바라지 않는 것 같아도… 누구보다도 인류의 평화와 미래를 바라고 있을 거란다. 포기했다는 말을 하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 더 그걸 바라는 거지.”
‘난 돈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일수록 돈을 밝힌다는 말과 같이, 세상에 무관심하고 포기했다고 하는 유성원의 내면엔 오히려 평화롭고 정의로워지길 바라는 소망이 있다는 식의 역설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가족들은 그가 싸우는 동안 그 바람을 이루어 주기 위해 ‘인류’의 마지막 회의가 될지 모르는 것을 계속해서 준비해 나갔다.
***
태평양, ‘성좌 영원한 분노’의 진체(眞體).
여전히 바다와 해저의 지각을 포식하고 있는 성좌 영원한 분노의 진체는 식사를 잠시 멈추고 거대한 눈을 돌려 먼 바다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한 번 정찰을 왔던 유성원의 함대. 이때까지 찾아오던 배들과는 다른 힘과 에너지가 느껴졌고, 그러자마자 본래 사방으로 흩어져서 가던 괴수들이 일제히 함대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내 앞을 가로막는 천지부동의 벽, 거센 파도, 산사태, 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나는 모두 꿰뚫고서 돌파할지어다.”
[패황천검류(覇皇天劍流) 제4장-패극점(敗極点)!]
콰아아아아!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는 거대한 빛에 의해 한 점으로 모여서 달려들던 괴수들은 그대로 소멸되어 버렸다.
뱃머리에선 유성원이 티탄의 말뚝을 든 채로 서 있었으며, 계속해서 몰려드는 다음 괴수들을 보며 다시 한 번 패황천검류를 준비했다.
“평소엔 한 번도 못 쓰던 걸 이번엔 아주 실컷 쓰겠네. 후우우우…….”
“좋다는 의미이십니까?”
“별로… 좋진 않아. 이거 꽤 힘이 많이 들거든. 그리고… 이 대사 없이 쓸 방법도 없고 말이지!”
[하늘이여! 지고(至高)에… 이른 나의 검을 확인하도록 해라. 이 일격은 내가 이 대지에 선 별이라는 것을 증명할지니! 패황천검류(覇皇天劍流) 제1장–지성섬(地星閃)!]
다시 한 번, 이번엔 살짝 흩어져서 오기에 위력은 좀 적지만 위력과 반경이 넓은 지성섬으로 적들을 쓸어버리면서 돌파해 나갔다.
그리고 후방에서 따라오던 9대의 배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성좌 얼어붙은 지배자의 사도와 몬스터들과 협력해서 바다를 얼려 육지처럼 만들기 시작했고, 사령 군단과 대장군들이 상륙, 각자의 성까지 소환해서 요새화를 시작하고 배는 계속 포격을 하며 포위망을 완성했다.
“역시 숫자가 부족해서 포위망이라기엔 조잡하네.”
“하지만 이거라도 있어야 세계가 좀 덜 위험하겠죠. 그래도 그나마 화력은 괜찮아서 다행입니다.”
“그래… 특수 마력 코어 반응탄, 블랙 칼리버가 아주 제 몫을 톡톡히 하는군.”
뒤와 옆에서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괴수들을 쓸어버리는 검은빛의 폭발.
성좌 종말자의 수하들에게서 얻은 기술과 자재로 만든 탄환, 블랙 칼리버였다.
물론 단시간이 걸린 만큼 거창하게 기술 분석을 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조잡한 복제품으로 만들어진 코어를 폭파시킨다는 발상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쩝, 생산 시간만 더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
“오히려 저는 저것을 노리는 자들이 있을까 걱정되는군요.”
“그래서 네 말대로 내 기사단의 성소로 성좌 종말자 관련 자료들이랑 물자들을 다 빼놨잖아.”
“예. 위력은 다른 대량 살상 무기와 다를 바 없어도 저 검은 마력의 폭발 위력은 강력한 외피나 다른 금속도 쉽게 뚫을 수 있으니… 고위층이 사는 벙커나 방공호 상대로 효율성이 압도적일 겁니다.”
“하긴 높으신 분들이 자기 목숨을 빼앗아 갈 수 있는 무기를 남이 갖는 걸 싫어하겠지. 으랏챠아아!”
퍼억!
배에 다가오는 괴수에게 티탄의 말뚝을 하나 던져서 그대로 머리를 뚫어 버렸고, 괴수들의 파도를 돌파한 배는 서서히 성좌 영원한 분노의 진체의 입에 도달했다.
유성원의 배가 다가오는 것을 안 성좌 영원한 분노였지만 그대로 입을 벌린 채로 유성원이 탄 배가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고 계속해서 파도와 함께 그를 삼켰고, 그렇게 되돌릴 길 없는 성좌 영원한 분노 공략전이 시작되었다.
“이제 되돌아갈 수도 없군. 몇 번째고 들어오지만 정말… 이 먹먹하고 갑갑한 기분은 진짜 싫어.”
“익숙해지실 줄 알았는데 말이죠.”
“목숨을 건 싸움이 익숙해질 리가 있나? 하아아~ 싫다. 진짜… 지금이라도 나 대신해 줄 사람 있으면 맡기고 싶다고! 안 되니까 하는 거지. 아무튼… 또 온다!”
크오오오오!
입속에 들어온 것을 실감하듯 서서히 어두워지는 풍경 속에서 또다시 몰려오는 괴수들을 향해 유성원은 티탄의 말뚝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배에 있는 주포에서 일반적인 마정석 탄과 함께 적들이 많이 몰려온다 싶은 곳엔 블랙 칼리버 탄환을 쏘면서 적진을 뚫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만하면 다 들어온 거려나? 뒤에 일단… 빛이 안 보이는데?”
“예. 그렇게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의외로… 먹혔는데 뭔가 굴곡이라든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안 드네? 먹어 놓고 얌전히 있는 거려나? 아무튼… 일단은! 어르신부터 찾아보자.”
이 진체의 머리에 있는 두뇌로 향해서 성좌 영원한 분노의 수호자를 찾기 전에 일단 먼저 할 일은 기사단의 성소를 여는 것이었지만, 역시 뭔가 지지직거리면서 시전이 취소되었고 열리지 않았다.
예상대로 이곳은 다른 ‘우주’라는 개념적인 공간이기에 제약이 있는 것이었다.
“젠장!”
눈을 질끈 감은 유성원은 이제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곧바로 이 성좌 영원한 분노의 두뇌를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