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그래, 올 것 같더라. 지금 상황 꼬인 거 알죠? 아주 심각하게 개판이 났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통보하러 온 겁니다.”
“…통보?”
“우리 협약, 없던 걸로 하자고 말이죠.”
예상 이상의 충격적인 사실이 커류의 입에서 전해져 왔다.
어찌나 충격적인지 유성원은 하던 일을 놓아 버리고 그를 바라봤는데, 커류는 담담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우리의 목적은 오직 올림푸스의 성좌들을 처리하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별의 수호 기사는 물론이고, ‘별’을 잡아먹는 멸망급 성좌라고 해도 손을 잡을 수 있지요.”
“그래서, 결국 성좌 영원한 분노 쪽에 붙는 겁니까?”
“붙는다기보단 그를 이용하는 거지요. 성좌 영원한 분노는 대화가 되는 타입이 아니거든요. 그건 마치… 블랙홀 같은 존재입니다. 그저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멸망시키려는 그런 존재죠. 어차피 서로 지금 갈라선다고 해도 피해되는 건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죠.”
1년 뒤에 같이 하나의 상대와 싸우자고 합의만 했을 뿐이지, 서로 지원 같은 걸 주고받은 적은 없다.
그런 만큼 그저 약속을 취소하면 아무것도 없는 관계가 되는 것이니, 이 통보로 인해 피해를 입을 것조차 없었다.
그저 한 번이었던 인연이 끊어졌을 뿐이고, 서로가 갈 길을 가게 되는 상황이었기에 유성원은 금방 침착함을 되찾았다.
“하긴 상황이 정말 예쁘게 잡혔으니 더 고뇌할 게 없겠지요. 인류는 자기들끼리 치고받아서 각성자 숫자는 줄고, 다른 멸망급과 싸우느라 올림푸스 길드는 개판이지, ‘성좌 제우스’는 뒈졌지. 거기에 추가로 성좌 영원한 분노까지 난리를 치니… 딱 봐도 우리랑 손잡고 일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은 거네요.”
“정확합니다.”
“좋아, 알아서 하세요. 그러면 우리도 빡빡하던 일정에 좀 더 여유를 가질 수 있겠네.”
1년이라는 제한 시간을 맞추려고 한 것은 저 성좌 복수의 티탄 세력과 약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들이 이렇게 협력을 끊어 주면 지금 이 시간에도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하면서 일정을 당기려고 노력하는 기술자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게 되리라.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성좌 제우스를 잃은 데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소모가 많았고, 현재 성좌 포세이돈의 결계 전선까지 동시에 맡아서 힘쓰는 올림푸스 길드를 저 성좌 복수의 티탄들까지 공격하게 될 경우 급격히 무너지지 않을까? 였다.
“다만 가능하면 공세는 조금 있다가 거세게 해 주면 좋겠는데… 부탁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고려하는 그것은 저희가 생각할 바가 아니지요.”
“그렇군요. 그럼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제 더 이상 우리는 협약도 뭣도 없는 사이이니, 서로를 적대하거나 방해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성좌 영원한 분노를 대비할 시간이 아직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빨리 올림푸스 길드가 무너지면 안 되었기에 유성원은 약간의 시간을 요구했지만, 냉철하게 거절하는 상대의 말에 곧바로 자신도 그럼 성좌 복수의 티탄 측에 엿을 먹일 수 있다는 식으로 나온 것이다.
“애초에 협상이라는 건 서로 거래할 여지가 있어야만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타르타로스에 오늘 내가 갈지 어떻게 압니까?”
“당신이 성좌 영원한 분노 외의 코어 던전에 과연 열중할 수 있을까요? 아니, 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세계는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
“성좌 제우스를 처리해 준 빚도 있고 하니, 하나 알려 드리지요. 성좌 영원한 분노는 이번 타이밍을 완벽히 이 ‘별’을 사냥할 찬스로 보고 있습니다. 때를 기다리던 맹수가 몸을 활짝 펴고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희가 괜히 통보하겠습니까?”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접어 두고 당신 할 일이나 하세요.’라는 커류의 반박.
그 말대로 유성원이 파악하기로도 지금 성좌 영원한 분노의 움직임이 만만치 않았기에 타르타로스 쪽 원정은 꿈도 못 꿀 일이었고, 결국 성좌 영원한 분노에 집중해야 할 처지가 맞았다.
말싸움에서 밀렸다는 것에 이를 악물며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가 없던 유성원에게 커류가 인벤토리를 열더니 웬 큼직한 상자를 꺼내서 내밀었다.
“…이건 뭔가요?”
“일단은 저희의 원수를 처치해 주신 보답입니다. 어찌 되었건 성좌 제우스를 쓰러뜨려 주셨으니 말이죠.”
“왠지… 엎드려 절 받기 같은데요.”
“먼저 선물부터 드리고 통보를 했다면 더 화가 나셨을 테니까요. 하하하.”
“뭔지나 보죠. 이건…….”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대검이었다.
겉에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특수한 힘을 가진 무구로 보였는데, 하지만 뭐가 불만인 건지 유성원은 살짝 미묘한 표정으로 그 대검과 커류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황금의 기사로 알려져 있지만 이런 것까지 또 황금으로 챙겨 주는 거냐? 하는 불만이 담긴 표정이었다.
“…절 놀리려고 가져온 겁니까?”
“아뇨. 그건 엄연히 저희 성좌 복수의 티탄 님들에게서 복수라는 단어가 없던 황금시대에 만들어진 유물입니다. 이름은 시대의 검.”
“으음… 뭔가 전투용으론 걸맞지 않은 느낌인데 말이죠. 가볍기도 하고, 이거 재질이 꽤 무른데…….”
“‘검’이란 고대로부터 군권과 지배자의 상징. 인간으로서 별의 수호자의 인정을 받았고, 수많은 전사와 기사들을 이끄니 그쪽을 더 강화해 주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즉, 전투용 무기는 아니라는 거군. 하지만…….”
그 검을 쥔 유성원의 눈앞에 여러 상태창들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기존에 제약이 있었던 천검군 소환이 최대로 해방, 그 외에도 다른 기사들과 휘하 병사들에게 버프를 제공한다는 각종 문구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미 이 ‘지구’에게 선택받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거기에 또 다른 성좌가 유성원을 인정해서 권위를 내려 주니 분에 넘칠 정도로 격이 올라 버린 것이었다.
“…꽤 도움이 되는 물건인 것 같네. 고맙다고 해 두죠.”
“저희야말로 성좌 제우스를 잡아 줘서 정말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럼… 슬슬 가 보죠. 아, 가기 전에 한마디 더 해 드리죠. 성좌 영원한 분노는 이번엔 정말 사력을 다할 겁니다. 그러니 철저히 조심하십시오.”
“예, 그러지요.”
그래도 좋은 선물(?) 덕분인지 처음의 불쾌하던 분위기는 상당히 가셨고, 덕분에 깔끔하게 이별하게 된 두 세력이었다.
그렇게 시대의 검을 챙겨 넣은 유성원은 커류가 말한 대로 성좌 영원한 분노에 대한 당부를 다시 한 번 더 백가연 어르신에게 전하고 난 다음, 고생하는 기술부 직원과 기사들에게 가서 빠듯하게 정해진 일정을 재조율해 주었다.
***
2주 뒤.
태평양, 포세이돈의 결계.
성좌 영원한 분노는 그 뒤로도 단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작은 대륙만 한 거대한 육신을 움직이며 성좌 포세이돈의 결계를 깨기 위해 발악했다.
단순히 한번 결계에 몸을 휘둘러서 충돌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충돌할 때마다 수많은 괴수와 마물들이 그 결계에 달라붙어서 개별적으로 다시 발악하며 결계를 깨려고 하였으나, 인류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쏴! 쏴! 계속 쏴!”
“어떻게 보면 이거 좋은 사냥터인데요?”
“방심하지 마라! 뚫리면 지옥을 보게 된다! 지금 몰려 있을 때나 잡기가 좋지!”
“예! 알겠습니다!”
수많은 헌터와 군인들을 태운 함선들이 결계를 둘러싼 채로 일제히 포격 및 화력 투사를 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몰려온 함선들도 보급 및 새어 나오는 괴수들을 사냥하는 임무를 맡아 철저히 포위망 유지에 힘쓰고 있었다.
하나 역시 최초의 멸망급, 규격이 다른 존재이며 진체(眞體) 강림을 한 성좌답게 단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적이었다.
“그나마 지원을 와 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백가연 어르신. 천공섬에서 지원도 왔지만 정말… 조금이라도 손을 보태 주시니 다행입니다.”
“허허, 별말씀을~ ‘지구의 위기’인 만큼은 이럴 땐 와야지요, 존 함장.”
그리고 한국, 중국, 인도 연합 함대를 구성해서 도착한 백가연은 현재 전선을 유지하는 미국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인 존 함장에게 전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자신들이 지원할 위치와 분야를 정하고 있었다.
“한데 유성원 헌터는 어째서 안 오신 건지? 올림푸스 쪽과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지구의 위기인 만큼 오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올림푸스 길드 문제도 있긴 하지만, 일단… 본국에서 지금 저 괴수를 잡을 연구를 하느라 못 오고 있네. 신장비 개발이라든가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서 말이지. 유피테르 가드와 싸울 때 살짝 보지 않았나?”
“아~ 그렇군요. 그럼 얼마나 걸릴는지요?”
“막바지인 것 같긴 한데… 최대한 일정을 줄이려고 하고 있으니 너무 보채지 말게. 음? 잠깐, 저기! 존 사령관! 결계 남쪽에 뭔가가! 금이!”
한창 유성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도중 성좌 포세이돈의 결계에 틈을 내서 무언가가 뚫고 나오는 것이 보였는데, 이번엔 평소 나오던 놈보다 훨씬 큰 놈이었다.
몸길이 약 500미터가량 되는 거대한 고래 같은 거수가 보통 A급들이 뚫고 나오던 틈에 뿔을 끼운 채 힘으로 밀어서 균열을 벌리고는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긴급 사태 발생! ‘성좌 영원한 분노’의 사도! SS급 몬스터 ‘테라 웨일’이 나타났다. 전군, 자잘한 A급에 있는 화력을 모두 저 ‘테라 웨일’에 집중하고, A급 이상 헌터들은 모두 기함으로 모이도록! 긴급 사냥에 들어가야 한다!]
“허, 장난이 아니구먼. 저거 감당은 되나?”
“예. 이미 천공섬도 모여 있으니 한 마리 정도는 문제없습니…….”
[이어서 보고합니다. ‘성좌 영원한 분노’의 입에서 SS급 몬스터 ‘테라 블루윙’이 나와서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그, 그리고 놈이 낙하해서 가는 곳은… ‘테라 웨일’이 두드리는 결계입니다!]
“이제… 2마리구먼.”
“젠장!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진짜로 작정했다는 소리지. 어휴…….”
쿠우우웅!
태양빛에 푸른 깃털이 반사해서 빛나는 거대한 청색의 괴조가 성좌 포세이돈의 결계를 부수기 위해 ‘테라 웨일’의 근처로 날아가 부리와 몸통으로 부딪쳤다.
괴조다운 크기와 질량답게 한번 부딪치자 마치 폭풍이라도 온 것처럼 파도가 요동치면서 바다에 떠 있는 배들을 뒤흔들었다.
그나마 인챈트된 장갑판과 상시 대기 중인 헌터들의 조치가 아니었다면 바다에 있던 배들은 모두 뒤집히거나 서로 부딪쳐서 전멸했으리라.
“이거… 영 느낌이 좋지 않구먼. 2마리는 힘든가? 어떻게, 그 친구를 불러야 하나?”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S급들이 출동하면 어떻게든 되겠죠. 오히려 이렇게 S급들이 주르륵 모여 있는 곳에 유성원 헌터를 부르면 프렌들리 파이어를 핑계 대면서 싸울 게 분명하니 말이죠.”
“으으음…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백가연은 결계를 부수려는 마수와 주변에 떠 있는 천공섬을 돌아보았다.
SS급 몬스터 2마리. 무시무시한 괴수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현재 전력으로 상대가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곤 하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빨리 잡는 게 좋은 것이, 그들을 잡기 위해 투입된 전력으로 인해 성좌 포세이돈의 결계의 다른 틈으로 다른 괴물이나 마수가 또 증원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으음… 그 친구를 부를 정도의 일도 아니고 하니… 이거… 직접 도움을 주는 게 좋을 것 같구먼.’
그렇게 생각한 백가연은 함장에게 부탁해서 자신도 참전할 수 있겠냐고 올림푸스 길드에 의사를 전한 다음 함대 지휘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장비와 아이템을 챙겨 전선으로 향했다.
현역이라기엔 어폐가 있지만 나름 S급 헌터인 그녀가 손을 보태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 상황이기에 전선에 바로 참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