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날세. 무슨 일인가?)
“그… 그게 어르신, 이러저러해서…….”
유성원은 유청에게 설명한 것을 다시 차분하게 휴대폰 너머의 백가연 어르신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 사태를 수습할 방안을 물었고, 잠시 후 그녀는 유성원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음, 그건 단번에 해결할 방법이 없는 문제인 것 같군.)
“그, 그럼 어떻게 하나요? 아니, 뭐부터 해야 할까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돌아오게. 그나마 다행인 건 ‘성좌’의 지시가 분명하다는 점인데…….)
“예. 바로 가겠습니다. 얘들아, 돌아가자. 하아~”
사실상 오늘 싸움은 무의미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과 일이 해결되지 않음을 한탄하며 유성원은 기사단의 성소를 통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이언 포트리스로 돌아갔다.
***
아이언 포트리스 지하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백가연 어르신과 함께 세계 지도를 보면서 현 상황에 대한 정보를 짜 맞춰 보았다.
“아주… 제대로 난리가 일어났구먼. 보자…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대전이 일어났고, 저번에 일어난 각종 인종 살육 범죄에 이제 올림푸스 길드와 미국이 참전, 중국 공산당도 이 기회에 국제적인 명망을 올리고자 참전한다고 했고, 러시아도 참전한다고 했네. 이미 우리가 첫 스타트를 끊었으니 다들 우르르 모여드는 거겠지.”
“…또 이겨서 이거저거 뜯어먹을 생각이겠죠?”
“허허허, 당연한 이야기를~ 본전은 뽑아야지 않겠나?”
“세계 멸망의 분쟁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다니… 이게 사람인지, 머저리들인지…….”
한참 걱정하던 게 허탈해질 정도로 세계 국가들의 행보는 마치 아편 전쟁 이후 중국을 갈라 먹으려던 것처럼 아프리카에 모두 들어가서 어떻게 나눠 먹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또 개중에 심각한 곳은 아예 이 기회에 흑인들을 열등 민족이라고 프로파간다를 세우면서 대놓고 인종 차별을 조장하는 인간이 있을 정도였다.
“특히 그들이 사람을… 성좌 도살왕보다 더하게 갈아 대던 모습이 언론과 UCC 등을 통해서 세계에 전파된 뒤로는 진짜 나치 독일을 증오하는 것처럼 불이 지펴지고 있어. 미국에서 지금 다시 KKK단이 부활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야.”
“…이걸 정말 어쩌죠?”
“사태를 파악했는데… 이런 경우는 총체적으로 보면…….”
“…꿀꺽.”
“답이 없네.”
“…네?”
“답이 없다는 말일세.”
믿었던 백가연 어르신에게서 충격적인 말이 나오자 유성원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백가연은 그런 유성원의 어깨를 토닥여 주면서 말했다.
“폭발해서 불타오르는 기름통에… 물을 끼얹으면 오히려 더 크게 폭발할 뿐이지. 뭘 어떻게 하려고 하면 불이 커질 뿐이라네. 방법은 오직 하나, 스스로 자연 연소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 불이 더 커지는 걸 막고 말이지.”
“그럼 그냥… 지켜보라는 건가요?”
“오히려 그게 더 좋은 수가 될 수 있다는 걸세. 왜냐면 보게. 아프리카도 열이 올랐고, 지금 유럽을 비롯한 세계 전체가 다 달아올랐네. 우리도 참여했고 말이지. 그런데 가장 먼저 상대의 심장까지 갔던 우리가 먼저 발을 빼고 그냥 우리 할 일을 한다면 어떻겠나?”
“…모르겠습니다.”
“가장 먼저 발을 빼서 그냥 할 일을 하면 말이지. 오히려 달아오르던 친구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눈치를 보겠지. 싸우지 마! 하면서 역성 낼 게 아니라, 그냥 저희는 안 할래요. 인도적 지원만 하고 말죠. 하면서 슬쩍 물러나는 걸세. 무심한 듯이, 모닥불에서 장작을 빼듯이 말이야.”
백가연 어르신의 말이 그럴싸해 유성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지금 자신의 머리로도 딱히 확고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기도 했고, 이분의 말대로 하는 게 일단 옳아 보였다.
“근데… 그러면 이 사태가 멈출까요?”
“모르지. 사람들 하기 나름이지. 나는 신이 아니니 말이야. 하지만 이게 최선일세. 다른 수가 없거든.”
“…후우우~ 이런 일은 없길 바랐는데 말이죠.”
“아무튼 후퇴했으니 공개적으로는 움직이지 말게나. 물론 비밀리에 민중을 돕는 건 해도 되지만 말이야. 그리고 얌전히 하던 걸 준비하게나.”
“하던 거요? 뭘요?”
“성좌 영원한 분노를 풀어 주는 거 말일세. 그 성좌 복수의 티탄 친구랑 약속한 거 있지 않은가?”
“…네? 지, 지금 이 상황에서요?”
세계가 불타고, 증오로 가득 차서 싸우는 이 개판인 상황에서 성좌 영원한 분노의 결계까지 깨자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유성원이었다.
아니, 그냥 진짜 이 ‘별’을 끝장내겠다는 속셈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나 백가연은 그런 유성원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알려 주었다.
“역으로 이런 상황이니 풀어 주는 게 나을 수 있네. 지금 서로 싸우는 판국에서 지구의 존재를 위협하는 성좌를 풀어 준다면 차라리 다들 그걸 막기 위해 싸움을 멈추지 않겠나?”
“그럴… 까요? 요새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움직이는 걸 보질 못해서……. 저는 오히려 그 계획을 미루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아직 연구라든가 준비도 다 끝난 게 아니니까요. 몇 달 안 남았지만…….”
“그러면 몇 달간 계속 준비와 지켜보는 걸 진행하게. 다른 수가 없으니 말이지. 아, 물론 가만히 있는 건 좋지만 상태를 잘 살펴야 하네. 그… 인간은 때론 상상 이상의 미친 짓을 할 수 있으니 말이야. 그건 막아야지.”
“예. 일단은… 그러겠습니다.”
현재로서는 어르신의 말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안 유성원은 피로를 풀고 회복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세계가 혼란과 공포, 증오로 가득 찬 가운데 하는 게 고작 가만히 있는 거라니. 마음이 편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다른 수가 없었기에 그렇게 하기로 한다.
그러면서도 결국 성좌의 농간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게 자신들의 운명인가 싶은 생각에 허탈해진 그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 씻고 휴식을 취했다.
***
유성원 헌터의 세력이 킬리만자로 도시의 중심인 스카이스크래퍼 블랙 레이더스 사의 빌딩까지 갔다가 패주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로부터 2주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게 알려지자, 세계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한다.
아시아의 제왕으로 불리며 파죽지세로 인도, 중국에 영향력을 확장했던 유성원이 이번엔 아프리카 내부에 침입해서 킬리만자로 시를 공격한 사실과 압도적인 전과로 스카이스크래퍼 블랙 레이더스 사를 점령했지만 다 점령하고 후퇴한 점이 세계 모든 국가들로 하여금 의구심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현재 올림푸스 길드 및 미국과 유럽 연합군의 임시 사령부인 프랑스 파리에서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체 왜 거기서 물러난 거지? 심지어 모를란테 부장에게 무기를 겨눈 거까지 봤다면서?”
“그, 그게… 아직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와 관련된 것 같습니다.”
“그걸 알아 와야 할 거 아니야! 지금 그 깜둥이 새끼들 잘 몰아내고 있는데! 이런 신경 쓰이는 일을 만들다니!”
“죄송합니다.”
“아니, 대체 왜 아프리카에서 물러난 거지?”
유성원. 인도, 중국, 한국을 지배하는 아시아의 제왕으로서 이번 아프리카 전투에 가장 먼저 참여한 외부 세력이자 적의 심장으로 단숨에 기동해서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도시 중심부까지 승리해서 들어갔다.
헌데 그렇게 이기고도 물러났다는 게 기묘했다.
본래라면 거기서 이미 진을 치고 파죽지세로 아프리카의 주요 시설들을 털어 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게 이상했던 것이다.
“…이상하긴 하군요.”
“진짜 뭔가 다른 걸 생각하는 걸까요? 아니면 그냥 이 일에서 발을 뺀 걸까요?”
“발을 뺄 이유가… 있습니까? 킬리만자로 도시 중앙까지 다 뚫어 버리고 점령했는데?”
“그럼 왜지? 하, 도무지 납득이 안 갑니다만…….”
“아, 미치겠네.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이죠.”
유럽으로 들어온 검은 대륙군과 싸우는 일은 오히려 쉬운 상황으로, 중국 공산당 및 세계 각국에서 뭐라도 숟가락을 얹기 위해 들어오는 걸 보면 더 이상 전황에 대한 걱정은 없을 정도였다.
오히려 가장 먼저 들어가서 맛있는 부위를 먹을 수 있는 유성원이 가장 먼저 빠진 것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갑자기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전쟁 참여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 라고 발표만 하고 얌전하니……. 헥토리아 님, 혹시 뭔가 아시는 거라도?”
“아뇨.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다. 일단 저희 길드에서는 여전히 경계 중이긴 한데, 다른 움직임 없이 평화로운 모습만 보이고 있으니 뭐라 할 게 없군요.”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게 아닐지……? 혹시 우리가 전쟁에서 지쳤을 때 나서서 역습을 가한다든가, 아니면 우리가 다 공들여서 쓰러뜨린 것을 마무리한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 틈을 타서 올림푸스 길드나 다른 성좌의 세력을 공격한다거나.”
“으음… 추정할 건 많지만, 아무튼 그냥 빠질 것 같진 않은 사람인 건 맞으니 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 전선도 그렇지만 저희도 모두 조심하죠.”
끄덕.
유성원이 그곳에서 겪고 들은 것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모르는 만큼 연합군은 신중하게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반대로 아프리카 본토에서도 비슷한 회의가 진행 중이었는데, 단숨에 킬리만자로 도시를 뚫어 버리고 스카이스크래퍼 블랙 레이더스 사 빌딩이 점령당한 사태는 심각했기 때문이다.
“…모를란테 부장은 아직 깨어나질 않았나?”
“예. 여전히 의식불명인 상태입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가? CCTV나 드론 같은 자료는 없었나?”
“그게, 자료 같은 걸 모두 보려고 했지만 갑자기 어느 순간 모든 전자 기기가 먹통이 되는 바람에…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제길!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검은 대륙군을 지휘하는 이들 또한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밝히려고 온갖 수단을 다 써 봤지만 진상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더욱 불안한 것이 아프리카 어디든 떨어져서 공격할 수 있는 유성원 헌터 부대의 무서움을 알았기 때문에 수도 및 각종 주요 시설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하기는커녕 더욱더 유럽 정벌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정말 이래도 되겠습니까? 혹시 또 유성원 헌터가 오면…….”
“올 놈이었다면 먼저 떠나지도 않았겠지. 그러니 다시 또 돌아올 생각을 하기 전에 지금 전력 공세를 해야 한다.”
“잠깐만, 생각을 바꿔 주십시오. 그렇다곤 해도 올림푸스 길드도 있고 다른 곳도 아직 있는데…….”
“전쟁은 기세다! 더 이상 잔말 말도록! 파도가 기세를 얻었을 때, 계속 전선을 밀고 들어가야 역습을 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그 유성원이라는 놈을 막을 정도면 외부 공격에 대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으니 본토 방위는 전혀 문제없다. 이 성전(聖戰)은 신이 약속하신 것. 흰둥이 박멸을 위해 전력을 다하라!”
성전과 약속된 승리의 이야기는 이미 전혀 근거 없는 것이 되었지만,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에 대한 진상은 유성원과 모를란테 부장밖에 몰랐다.
아니, 알아도 그들은 진실을 거부할 정도로 광신에 물든 만큼 의미는 없을 테지만, 다소 소심해진 연합군과 달리 검은 대륙군은 계속해서 전쟁에 대한 열기를 가속해 나갔다.
역으로 유성원이 다시 끼어들기 전에 끝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더 많은 군대와 전력을 투입해 나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