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3일 뒤, 대한민국 청와대.
그렇게 3일이 지났다.
연일 유럽 전선에 대한 뉴스로 세상은 떠들썩했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평화로운 상황이었다.
본래라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면서 혼란스러웠던 동아시아는 이제 그 정점이 된 유성원으로 인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내면으로는 또다시 태평양 너머의 올림푸스 길드를 노릴 준비를 하고 있지만 표면적으론 조용했는데, 지구 반대편에서의 전쟁 소식이 계속 들려오자 유성원은 결국 청와대로 호출당해서 이에 관한 논의를 하게 되었다.
“단 3일 만에 사상자 추정 130만. 이 정도면 완벽한 전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겠지만, 더 끔찍한 건 그 검은 대륙군이라 칭하는 아프리카 연합군에게 UN을 비롯한 세계 기구들이 권고를 해도 진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참… 큰일이네요.”
“이건 이미 분쟁이라고 할 수준을 넘어선 본격적인 전쟁입니다. 도저히 말릴 수 없을 지경이죠. UN에서는 빨리 유성원 헌터님보고 출석해서 어떻게 좀 해 달라고 난리입니다.”
“…근데 나 공식적으론 국가원수도 뭣도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참석하는데? 일개 헌터 길드장밖에 안 되잖아. 게다가 우리는 일단 올림푸스랑 지금 척을 져 놔서 거기에 신경 쓸 틈도 없지.”
유성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준비해 온 답변을 술술 풀어놓았다.
그의 말대로 지구 반대편의 문제에 신경 쓰기엔 지금 태평양 하나를 앞에 두고 주적이 있기에 어떻게 손댈 수 없다는 처지를 한 번 더 밝힌 것이다.
“보낸다면 인도적 차원에서 구급대나 재난 구조팀 정도나 보내야겠지만, 그 이상은 너무 간섭이지 않을까?”
“간섭이라니요.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건 막아야지 않습니까? 게다가 유럽이 망한다고 해서 지금 세계에 좋을 게…….”
“근데 낄 명분이 없잖아. 인도적 지원 빼고 유럽을 지원할 확실한 명분이 있어? 아무리 세계가 힘 있는 자 중심으로 굴러간다고 하지만, 그래도 명분이라는 게 있어야지.”
일전에 올림푸스 길드와의 접전에서 이기고 확전이 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명분’이 있어서였다.
그런 만큼 명분이라는 건 언뜻 보면 무의미한 것처럼 보여도 사람들의 마음과 신임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기도 했다.
반대로 검은 대륙군은 나름 자국민들에겐 먹힐 명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 쾌진격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말마따나… 유럽 애들이 아프리카에 양아치 짓한 게 한둘도 아니고, 죄다 아무튼 히틀러 탓임! 독일 탓임! 이러고 넘어갔는데…….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라든가, 아무튼 쌓은 업보가 몇 갠데. 그럼 우리도 그냥 일본이랑 이제 과거사 신경 안 써도 되니 사이좋게 지내죠, 가 가능하냐? 독립기념관도 없애고 막~”
“…불가능하죠.”
“그럼 말을 마라.”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치졸하며 때론 손익을 계산하지 않는 방면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잘 아는 유성원이었다.
제국주의 시절의 착취. 이후 자본주의 사회와 평화 기조의 세계 운영에서 계속 이어지던 침략과 수탈, 평화 없는 혼돈, 언제든 한 번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동안은 힘의 차이로 압도적으로 짓누르고 있던 것이었고,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 덕분에 그것이 해방된 것뿐이었다.
“왕따당하던 애가 자기를 괴롭히던 놈이 아이돌 된 걸 보고 그거 막으려고 폭로해서 10년 만에 복수하는 판국인데, 나라나 민족 단위면 어떻겠냐? 애초에 우리나라도 일본 분노 버프로 성장력 당긴 거잖아. 아무튼 명분 생기기 전엔 우린 손 못…….”
“그럼 지금 명분이 생겼다면 어떤가?”
“네? 어르신, 갑자기 왜?”
“명분이 생겼단 말일세. 자네가 아주 좋아하는 명분 말일세.”
“네?”
한참 정부를 포기시키는 작업을 마무리하던 유성원에게 갑작스럽게 백가연 어르신이 사진과 영상이 든 USB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본 유성원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놀랐다. 아프리카 놈들이 아주 제대로 선을 넘은 것이 확실한 것을 보니 더 이상 명분이 없다면서 째기도 난감한 상황에 와 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
스페인, 지브롤터 공항.
현재 검은 대륙군이 진출하여 점령된 공항으로 주요 보급 기지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아프리카 본토에서 계속해서 자원 및 훈련이 끝난 신병들이 들어와서 각 전장으로 이동하는 중요 허브 역할을 수행 중이었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당연하지만 포로수용소와 노역소 역할도 겸하고 있어서 스페인군 및 기존에 공항에서 일하던 직원과 주변 도시의 사람들을 모아 두고 한창 일을 시키고 있었다.
“흰둥이 새끼들아, 똑바로 일 안 해? 너희가 꾸물거리니까 보급 일정이 미뤄지잖아!”
“저희… 20시간이나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니 쉬어 가면서 돌려야… 컥!”
“말 안 듣는 놈은 살 가치가 없다. 저승에 가서 편히 쉬어라.”
검은 대륙군의 지배 아래 스페인 사람들은 대가도 없이 지독한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흑인들의 원한이라는 미명 아래에 진군한 이들은 백인들에게 제대로 된 식사와 휴식도 주지 않고 노역을 시키면서 반항하면 그대로 사살해 버렸다.
시체를 치우는 다른 백인 노예를 보며 흑인 장교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검은 대륙 군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아주~ 속이 시원하면서도 이 시설들과 도시를 보면 정말 속에서 열불이 나는군.”
“열불이요? 크와메 대위님.”
“그렇지 않나? 보라고~ 우리 마을이랑 도시는 21세기가 되어서도 개판이었고, 또 각성자의 시대가 되었을 때도 여전히 포장된 도로나 좋은 시설 하나 없는 깡촌이었는데……. 우리에겐 환경보호랍시고 지랄하면서 자기들은 보라고. 이 공항! 저 도시 시설! 하! 이러니 내가 흰둥이 새끼들을 괴롭히지 않고 배기겠냐고.”
“뭐, 그 부조리와 분노를 풀기 위해서 저희 검은 대륙군이 진군한 거 아닙니까?”
“하지만 더 열 받는 건… 상부의 명령이야. 왜 그 망할 중국인이랑 아랍계 놈들은 봐줘야 하는 거지? 아프리카계야 우리 동족이니까 그렇다 치지만.”
크와메 대위는 다른 한쪽 편에서 일하고 있는 극소수의 중동계와 아시안들을 바라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현재 상부에서는 백인들은 마음대로 탄압하고 제압해도 된다고 하는 반면 중동, 아시아계에겐 부조리한 대우를 하지 말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노동력은 계약하고, 저항하지 않는 이상 절대 백인처럼 대우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와 있었다.
“그야 동쪽에 큰 세력이 있으니 참전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거죠. 류세웅언? 이었나? 멸망급 성좌도 잡고, 인구 20억의 정점에 선 그 아시아의 제왕이 있으니까요.”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아니꼬워. 저 망할 동양인 놈들도 흰둥이 자식들 뺨치게 우리 고향에 개짓거리를 했는데 말이지.”
“아, 중국 놈들 말이죠?”
“그래.”
성좌의 시대가 되어서 갈라지기 전의 중국에서 펼쳤던 일대일로(一带一路) 정책과 아프리카 쪽에 자본을 투입하여 광물 자원 사업을 독점, 부패한 아프리카 정치인들과 손을 잡고 이익을 독점하면서 서민 경제를 파탄시키던 일을 떠올린 크와메는 중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저것들도 결국 흰둥이 새끼들이랑 다를 바가 없는데 말이지.”
“하지만 상부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잖습니까? 게다가 리비아는 그 동양인들이 군벌을 없애 주고 아프리카 정부를 새로 수립하게 도와주기도 했는데…….”
“그래 봐야 그놈이 그놈이었고, 그 자식들도 결국 땅을 빼앗으러 온 거잖아. 아무튼 이거 그냥 두자니 속이 뒤틀릴 것 같은데…….”
“그래도 손대지 마십시오, 대위님. 상부 명령이 괜히 상부 명령이겠습니까? 성좌님 명령과 5대 기업 분들이 검토하신 건데… 하나하나 해 나가는 거지요. 애초에 흰둥이 놈들에게 원한 갚는 것만 해도 어딥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일이나 하러 가자.”
그렇게 시원하게 넋두리를 마친 두 군인은 담뱃불을 끄고 다시 일터로 향했다.
하나 모든 검은 대륙군의 군인들이 이들처럼 잠깐 불평하는 걸로 불만과 원한을 억누르는 건 불가능했고, 또 개중에는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면서 검은 피부인 자신들이 모든 인종들의 우위에 선다고 생각하는 미친놈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망할 누렁이 새끼! 봐주니까 우리가 만만해 보이지? 흰둥이 새끼들 조지는 거 때문에 봐주고 있는 거야.”
“그냥 쏴 버리십쇼, 중사님. 어차피 흰둥이가 했다고 뒤집어씌우면 그만이잖습니까? 우리가 왔을 땐 흰둥이가 죽인 뒤였다고 하면 되는 거죠.”
“하하, 너 아이디어가 참 좋다. 그러자고~”
한번 선을 넘어 버린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으며 그 광기를 주변에 전염시키게 된다.
백인을 흰둥이라 부르며 멸시하던 검은 대륙군의 일부는 결국 자제하는 걸 실패하고 폭주하여 검은 피부 외의 인간을 모두 멸시하기 시작했고, 일부 군 진영과 기지에서는 이 같은 상부의 명령이 무시되었다.
폭력, 살인, 강간, 약탈, 강제 노역을 비롯한 강압적인 지배까지 모든 일들이 그대로 검은 피부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이행이 되었고, 감추려고 했지만 감춰지지 않는 이 일들은 결국 아프리카 본국에 있는 상부로 흘러들어갔다.
***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인근 도심.
“아니, 왜 하지 말라는 짓을 하고 난리인 거지?”
“그… 일부 병사와 장교들의 일탈로, 일단은 사령부에서 헌병들과 수사관들을 보내서 처벌 및 조치를 취하려 하고 있지만 워낙 많은 부대에서 이 같은 사태가 일어나서…….”
“분명 파견하기 전에 철저히 교육을 시켰을 텐데! 젠장!”
군부에서 올라온 보고를 들으며 모를란테 부장은 인상을 찌푸린 채 짜증을 내었다.
괜히 백인 외의 다른 인종은 건드리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닌데 기어이 일을 저지르니 화가 뻗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명분상으로도 과거 제국주의와 근현대 시기 자신들의 발전을 저해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식으로 나섰는데, 그 역사와 직접 관련이 없고 또 똑같이 피해자였던 다른 인종을 핍박하면 백인 놈들과 다를 바 없어진다는 것이 첫 번째.
그리고 실리상으로도 이렇게 되면 큰돈을 먹이고 올림푸스 길드 건으로 이번 전쟁을 묵인하게 묶어 두었던 유성원 헌터가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멍청한 놈들!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멸망급 성좌를 잡은 놈이 끼게 해선 안 된다고! 분명히! 분명히 말했는데!”
“저, 정말 죄송합니다.”
“이러다가 유럽 쪽에 지원한다고 생각해 보게! 지금도 전쟁 초기이고 우리가 철저히 준비돼서 유리한 거지, 그놈들도 본격적으로 징집을 시작하고 미국, 러시아가 손잡고 전선에 밀려들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샴페인은 무조건 완전한 승리 후에 터뜨려야 하는데! 젠장! 젠장! 젠장!”
쾅! 쾅! 쾅!
모를란테는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해 왔던 이번 전쟁이 실패할 변수가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에 화가 나서 거칠게 책상을 두드렸다.
검은 대륙의 민족들이 이 전쟁을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승리하길 얼마나 고대해 왔는데! 멍청한 아랫놈들 때문에 그 모든 계획이 뒤틀려 버릴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가뜩이나 핵전쟁이니, 세계대전이니 하는 압박도 만만치 않은데… 밑의 놈들까지 이 중요한 계획을 망치려고……. 한시라도 빨리 조치를 취하고 관련자들을 모두 처벌을…….”
“이미 늦었어.”
모를란테 부장이 곧바로 조치를 취하려 하는데, 갑자기 그가 있는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깜짝 놀랄 만한 손님이 등장했다.
현재 지구 반대편에 있어야 할 유성원 헌터가 아무 기별도 없이 완전무장한 채로 등장한 것이었다.
사전 연락은커녕 경비 시스템이나 보안 시스템이 가동한 것을 눈치채지도 못했는데 그가 나타나자, 모를란테 부장은 깜짝 놀랐다.
“…헉! 유, 유성원 헌터님? 어떻게 여기에?”
“너희가 사고 친 거 알자마자 왔지. 하아아~ 아무튼 이야기 좀 할까? 가뜩이나 바쁜데 너희 땜에 지금 시간 쓰게 생겼거든? 하아아~ 이거 답변부터 좀 해 봐라.”
유성원은 곧장 모를란테 앞에다가 사진을 내밀었다.
거기엔 예상하던 대로 검은 대륙군 일선 지휘관과 장교, 병사들에 의해서 살해당하거나 고문, 핍박당하고 있는 동양인들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총살이나 고문은 약과였고, 참수한 목을 든 채 새하얀 이빨이 드러나도록 웃고 있는 검은 피부의 장교 모습은 모를란테 부장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