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쿠우우웅!
천공섬에서 발사된 비상 탈출 벙커는 남쪽으로 약 100킬로미터가량 날아간 다음 서서히 감속을 시작, 어느 산속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간신히 착지했다.
착지 뒤 벙커의 문이 열리자 안에서 튀어나온 뤼카이온은 난감해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이제 어쩌지?”
“일단 벙커의 위치를 전송했으니 곧… 올 겁니다. 아니면 좀 더 도망칠까요?”
“이런 야산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무슨 도망……! 이, 일단 대략 30분은 된 것 같으니까 기다려 보자. 아, 아무튼 오겠지.”
산간 지역에 야생 던전이나 몬스터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만큼 이제는 자신의 성좌에 기도하며 기다리는 게 나을 듯했다.
사실 산행 같은 힘든 일은 하기 싫은 뤼카이온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그래도 먼 거리를 온 만큼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한 그의 귀에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아! 와, 왔구나!”
우르르르릉! 콰아아앙!
마른하늘에 천둥소리가 울리고, 벙커의 앞에 거대한 번개가 번쩍이는 것을 본 뤼카이온은 그제야 안심했다.
그 번개 속에서 나타난 것은 망토와 검, 방패뿐만 아니라 미사일 런처 및 각종 중화기를 추가로 더욱 화려하고 두꺼운 무장을 하고 나타난 유피테르 가드와 상반신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다부진 체격을 한 남성이었다.
“헤, 헤라클리오온! 왔구나! 오오! 형제여!”
“닥쳐! 이 머저리 자식아. 지금 네놈의 X지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난감해진 줄 알아?”
“커억!”
헤라클리온이라 불린 사내는 만나자마자 그대로 뤼카이온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서 땅에 박아 버렸다.
이빨 몇 개가 흩날려 땅에 굴렀지만, 그래도 죽진 않은 듯 바닥에서 꿈틀대는 뤼카이온을 향해 헤라클리온은 등에서 꺼낸 거대한 곤봉을 겨눈 채 당장이라도 휘두를 기세로 말했다.
“진짜 같은 성좌 제우스의 사도인 게 부끄러울 정도야! ‘그거’만 아니었으면 진작 죽여 버렸을 텐데……. 다른 분들은 멀쩡한데 왜 너만 개X랄이냐고!”
“쿨럭! 컥! 그걸 왜 나한테 따지냐고! 하하핫! 나 같은 놈을 택한 위대하신 성좌 제우스 님에게 따져…….”
“빌어처먹을 자식!”
“야야!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날 죽이는 건 안 되지 않…….”
콰아앙! 쿵!
자신을 향해 무섭게 달려오는 헤라클리온을 본 뤼카이온은 곤봉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쫄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엄청난 굉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옆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자 그것은 익숙한 물건으로, 올림푸스 길드에서 본 티탄의 말뚝이었다.
“이건?”
“…저놈이 그 유성원인가?”
헤라클리온이 들고 있는 곤봉과 티탄의 말뚝을 번갈아 본 뤼카이온은 그제야 헤라클리온이 역으로 자신을 지켰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헤라클리온이 바라보는 하늘을 따라 쳐다보자 거기엔 약 30분 전 빌딩에서 보았던 황금 용과 황금의 기사가 티탄의 말뚝을 여러 개 든 채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역시 천둥 번개를 쫓아오니 있었군. 그런데… 사람이 늘어난 걸 보면 역시 천둥 번개로 온 게 맞네. 일단 우리 애들 전원을 성소 포탈로 강림시켜야겠군. 엘드라엔, 너는 상공에서 주변 상황을 봐 줘.”
[알았다.]
유성원은 아군에게 뤼카이온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린 다음 그대로 엘드라엔에서 뛰어내려 지상에 착지해 그들과 대치했다.
그와 동시에 성소 포탈이 열리면서 유성원 휘하의 수많은 기사들과 병력들이 뛰쳐나와서 그들을 포위했다.
그런 중에도 유성원의 시선은 오직 뤼카이온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죽이든 뭘 하든 하고 싶었지만, 그의 앞을 지키는 전사가 심상치 않았다.
“그 곤봉과 화살… 그러니까~ 헤라클레스의 가호 받은 전사 헤라클리온인가?”
“오? 정답! 그쪽은 딱 봐도 요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 유성원 경이겠군. 그런데 그런 주제에 비겁하게 기습으로 무기를 던지는 건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 아닌가?”
“짐승에게 예를 갖춰도 알아듣질 못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지? 아무튼 그 ‘짐승’ 자식을 얼른 내놔라. 거절하면 바로 싸움이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 봐. 우리 말도 좀 들어 보라고. 사실 우리가 온 건 이놈을 변호하거나 지키려는 게 아니라, 중재하려고 온 건데 말이지. 이놈 지금 떡이 된 거 보이지? 솔직히 이번 문제는 우리 쪽이 잘못했다고 100퍼센트 인정하고 있어. 우리는 모든 일의 해결을 도울 거고, 이번 사태에 따른 손해 배상도 철저히 해 줄 생각이야. 물론 내가 데려온 유피테르 가드들을 통해서 그 납치한 놈들을 바로 이리로 데려오라고 전할게. 손가락 하나 안 건드린 채로 말이지. 그러니 잠시 진정하라고~”
말과 함께 헤라클리온이 무기를 내리면서 먼저 화해 모드를 조성하기 위해 나섰다.
지금 이 주변엔 아무리 자신이 헤라클레스의 가호를 받았더라도 만만치 않은 적들로 쫙 깔려 있었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많은 이들이 몰려와서 포위망이 두꺼워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놈은 다시는 미국이나 올림푸스 길드 본부에서 떠나지 않게 조치하도록 하지. 진짜라고. 성좌 제우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도 좋아. 너희가 이겼고, 배상 금액도…….”
“거절한다.”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끊어 버리며 거절의 의사를 표하는 유성원이었다.
그 모습에 헤라클리온은 당혹스러웠다.
이 정도 타협안이면 충분히 거래가 될 거라고 생각했고, ‘성좌에 대한 맹세’까지 꺼냈는데 먹히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뭐?”
“필요 없다고. 우리가 원하는 건 단 하나, 그놈 목이다.”
“야야, 잘 생각해 봐. 이 망나니 새끼가 물론 몹쓸 짓을 저지른 게 맞아. 하지만 하잘것없는 놈이라고. 근데 성좌 제우스의 가호 때문에 성가시고, 저놈이 죽으면 우리 성좌님도 체면이 서지 않기도 하고, 그… 거시기한 문제도 있으니까 돈이든 뭐든 다른 걸로 타협하자니까? 지금 여기서 우리 다 죽여 봐야 전화(戰火)가 확대되는 것뿐인데 좋을 거 있어?”
헤라클리온은 지혜롭게 넘어가자며 유성원을 달랬지만 오히려 그런 태도가 유성원을 더 열 받게 하고 있었다.
뤼카이온이 저지른 짓은 누가 봐도 천인공노할 짓이었다.
멀쩡한 남의 집 딸내미를 잡아다가 강간하려는 것은 고금동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제우스의 사도라지만 그걸 덮겠다고 추하게 구는 게 더 화날 따름이었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나 같은 사람들이 세상을 포기하는 거야. 법이니 정의니 떠들면서 결국 돈과 권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하고, 심지어 자기들끼리 판 다 짜 두고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곤 법과 정의가 지켜졌습니다, 떠들지…….”
“아니, 잠깐만. 이건 그런 게 아니라.”
“만약 우리 아영이가 내 양딸이 아니었으면? 후계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보나 마나 납치당해서 더럽혀진 딸만 남고 너희는 도망쳐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저 제우스 꼬추 자식은 자기 할 일을 그대로 해 왔겠지. 차라리 제우스에 맹세코 처형한다고 했다면 모를까, 그냥 무사히 데려가는 꼬락서니를 보느니 거절한다.”
“아, 아니, 이 자식에겐 사정이…….”
“하잘것없는 감성 팔이라면 더더욱 거부하지. 저 녀석에게 당했던 모든 사람들과 앞으로 당할 모든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 이 자리에서 기사도와 정의의 이름을 걸고 추악한 악을 없앤다.”
스릉……!
유성원은 여기서 더 물러날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인 듯 티탄의 말뚝을 놓고 패황 기사 유천의 검을 뽑아 겨누었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주변의 다른 기사들과 군대는 일제히 무기를 겨누며 전투 돌입 직전에 들어갔다.
유성원이 도저히 말을 들어 먹지 않자 헤라클리온은 무언가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는데, 옆에서 뤼카이온은 고개를 저으면서 하지 말라고 하고 있었다.
“자, 잠깐, 그러면 일대일 결투! 결투로…….”
“정의를 모르는 추악한 비겁자와 명예를 나눌 생각은 없다. 공격해라. 그리고 저 꼬추 놈… 그냥 없애라. 웬만하면 평양 지하에 넣어 두고 평생을 후회하며 살게 해 주고 싶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잠깐! 잠깐! 잠깐만! 잠까안!”
헤라클리온의 절규가 무색하게, 유성원의 부하들은 일제히 무기를 들고 공격에 나섰다.
일단 원형진을 짠 유피테르 가드가 버티고 있었지만 이미 새로운 무장을 한 사령 군단과 천검군 기사들의 공세, 그리고 유성원도 직접 나서서 헤라클리온에게 달려가 검을 휘둘렀고, 그는 난감해하면서 힘겹게 곤봉으로 그것을 받아 내었다.
“잠깐만! 이봐! 말 좀 하자. 말로 하자고! 이대로 우리 둘 다 없애 봐야 올림푸스 길드와 영원히 척을 지는 거와 마찬가지라고. 정의도 좋지만, 세계 생각도 해야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보겠어? 세계 대전이라도 일으킬 거야? 별의 수호 기사잖아. 좀 더 생각…….”
“알까 보냐.”
콰득!
헤라클리온이 이야기하는 틈을 타서 유성원은 인벤토리에서 티탄의 말뚝을 꺼내 던졌다.
유피테르 가드가 방패를 들고 막아 내긴 했지만 그 충격을 완전히 흡수 못했는지 그대로 뤼카이온을 깔고 넘어가 버렸다.
“으가아아악!”
“야, 야이 멍청아! 관리 잘해! 그 자식 죽으면 우리는… 그리고 날 상대하라고, 너는! 비겁한 녀석아!”
“미성년자 강간 시도 납치한 새끼를 감싸는 네놈은 비겁하지 않고?”
퍼어억!
내친김에 하나 더 잡아서 던지자 이번엔 헤라클리온이 몸으로 티탄의 말뚝을 막아 냈다.
뾰족한 부분을 투창처럼 던졌는데, 말뚝은 드디어 제 역할을 하듯 그의 몸에 박혀 버렸다.
이 정도로 몸을 날려서 지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유성원. 하지만 저러니 반드시 쳐 죽여야겠다는 마음이 든 그는 눈빛으로 주변 기사들에게 신호를 주었다.
헤라클리온은 필사적으로 곤봉을 휘두르면서 막아섰지만 이 난전 속에서 소리 없이 날아간 섬광 하나가 뤼카이온의 머리에 적중했다.
“…어?”
털썩……!
그렇게 단숨에 머리에 구멍이 난 뤼카이온은 그대로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져서 땅에 쓰러졌다. 유피테르 가드들과 헤라클리온이 달려들어 치유하려고 했지만, 진형이 무너진 그들을 제압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자, 잠깐! 이거 놔! 이거… 이거 놔! 안 돼! 안 돼에에에!”
“젠장! 빨리 엘릭서를… 포션을! 커억!”
“으아악!”
“아… 누님이었나? 으음… 막타를 양보하려고 했는데, 직접 하셨으니 다행이네.”
섬광이 날아온 하늘을 바라보자 그곳엔 전술 헬기를 타고 거대한 라이플을 든 자신의 부인, 소미 누님이 있었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얼음장 같은 눈빛을 하고서 뤼카이온을 끝까지 노려보며 와이어를 통해 지상으로 내려와 입을 열었다.
“아영이, 찾았어요.”
“네. 정말 죄송합니다, 누님. 제가 초기 대응을 좀 더 서둘렀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없었을 텐데…….”
“멋대로 죽였는데 괜찮나요? 도저히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는데… 책임질 일이 있으면 제가 질게요.”
뤼카이온을 사살한 것이 혹시나 유성원에게 폐가 될까 싶어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말을 하는 신소미였지만, 유성원은 깜짝 놀라 말했다.
“그걸 왜 뭐라고 하나요? 저건 짐승 새끼인데 말이죠.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하죠. 이렇게 일을 더디게 처리해서 정말 죄송해요.”
“아뇨. 올림푸스 길드가 상대이고, 유피테르 가드인데… 아무 일 없이 몸 성히 돌아온 게 다행이죠. 정말 빠르게 행동해 주셨어요. 죄송할 거 없어요.”
“가족인데… 당연하잖아요.”
둘은 서로 끄덕이면서 가족 간의 신뢰와 애정을 다졌다.
정말 더럽고 구질구질하게 도망치고 버틴 제우스의 꼬추 놈이었지만, 결국 그 대가를 목숨으로 치렀다.
그리고 아영이도 무사히 되찾았으니, 이제 남은 건 유피테르 가드와 저 헤라클리온을 제압해서 얌전히 올림푸스 길드에 반납하든가 아니면 처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유성원이 고개를 돌리던 그때, 갑자기 또다시 천둥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