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올리브색과 짙은 갈색으로 장식된 무구와 갑주, 그리고 곳곳에 그려진 번개 모양과 저 특이한 강림 방식.
신아영과 가울프 모두 이곳 한국에 새로이 자리 잡은 올림푸스 길드의 담당자가 끌고 다니는 정예 군단에 대한 내용을 보고서에서 읽었던 기억을 끄집어내면서 그들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유피테르 가드?”
“아… 그 성좌 제우스의 직속 부대군요. 그래서, 처음부터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건 무슨 이유지?”
“딱히 악의는 없었다. 그저 시끄럽게 할 생각이 없었을 뿐이다. 그쪽 경계심이 과도한 게 아닌지?”
투구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조로 보아 역으로 뻔뻔하게 나오는 유피테르 가드의 태도에 가울프는 그들을 노려보면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떳떳하게 일을 하려는 자들이라면 먼저 이름을 대고 당당히 용건을 드러내겠지. 자네들의 성좌 제우스는 하늘에 계신 분인데, 자네들은 그 하늘에 부끄러운 게 많아서 그 위대한 분이 내리신 모습과 목적을 감추고 다니나?”
“…….”
“말을 하지 않으면 긍정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아무튼 제대로 된 용건이 아니라면 볼일은 없네. 그러니 사라지게. 지금 우리 아가씨는 프라이빗 타임을 만끽하는 중이니 용건이 있다면 정식으로 스케줄을 잡게나. 그럼 아가씨, 가시죠.”
가울프의 논리 정연한 말에 앞에 있던 유피테르 가드들은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리고 천둥소리와 함께 등장한 유피테르 가드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이곳으로 모이는 상황인 만큼 이대로 그들을 그냥 보내 줘야 하나 갈등하는 중이었다.
“아! 잠깐! 잠깐! 이 멍청한 녀석들아! 사람 말은 제대로 들어야지!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막 지나가려던 찰나, 멀리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면서 급히 달려왔다.
곧이어 찰랑거리는 금발에 와인색 정장을 차려입고 수많은 장신구들을 낀 화려한 남성이 땀을 흘리며 다가와서는 가울프와 신아영의 앞에 서서 허리를 숙이며 곧장 사죄를 했다.
“저는 뤼카이온이라고 합니다. 올림푸스 길드 한국 지부 담당을 맡고 있죠.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명령을 제대로 내리지 않는 바람에 이런 오판이 벌어졌습니다. 전선 도시의 지배자이자 유성원 군단의 대리자이신 신아영 양, 저희 애들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럼 이만. 다음에 정식 회견을 따로 신청할 테니 그때 뵙도록 하죠. 가자!”
뭔가 수작을 또 부릴 줄 알았더니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 뤼카이온이었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가울프와 신아영은 다시금 갈 길을 가면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 엄청 순순히 물러났네요?”
“흠, 그렇군요. 수작을 걸어올 줄 알았는데…….”
“평판을 들었을 땐 엄청 질척거릴 줄 알았는데… 말이죠.”
뤼카이온의 명성에 대해선 이미 그가 한국에 들어온 시점부터 잘 알고 있던 신아영이었다.
가울프 또한 마찬가지로 그녀의 호위를 맡은 순간부터 주요 경계 대상들에 대해 철저히 공부해 둔 입장으로, 저 뤼카이온이라는 남자의 사생활과 임무에 대해서 이미 숙지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습니다. 이유 없이 접근하는 자는 없거든요.”
“예, 그럴게요. 그러면 일단… 가던 길 계속 가요.”
아무 일이 없었지만 가울프는 조언을 해 주었고, 신아영은 그에 동의하며 둘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둘을 아주 멀리서 조용히 따라가는 차량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아까 전 둘에게 수작을 걸었던 유피테르 가드와 뤼카이온이 타고 있는 차였다.
“정말 이거면 됩니까? 뤼카이온 님.”
“나랑 오래 다녔으면서 이것도 눈치 못 채냐? 시작은 원래 조심스럽게 가야 하는 거야. 내 인식과 명성이 널리 퍼진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일단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게 먼저지. 게다가 상대도 만만치 않아 보이니 꽤 오래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뤼카이온은 평소 일하던 때와는 다른 눈빛으로 신아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역시 사람은 목적이나 목표가 있어야 열심히 하게 되는 법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 그였다.
유성원 헌터의 양녀이자, 대리자 일을 하는 신아영이라는 소녀는 그야말로 올림푸스 길드라는 간판이 있어도 상대하기 어려운 저 드높은 절벽 위에 자리한 꽃. 잘못되면 자신의 목숨도 위험했지만, 그렇기에 더 불타오르는 것이었다.
“첫인상만으로 바뀌긴 쉽지 않겠지. 경계심을 부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해 가진 인식과 내용에 대해서 조금씩 변화를 주면 되는 거야.”
“어쩌실 겁니까?”
“일단 내가 할 일이라고는 생각 안 되는 일을 해야겠지. 사람이 마치 급격히 변화한 것처럼 말이야. 아주 차분하게 조금씩 호감을 사는 거야. 못해도 반년은 투자한다고 생각해야지. 또 좋아하는 남자상을 조금씩 투영해 주면서 움직이는 거지.”
수많은 여성과 자는 것도 자는 일이었지만, 대화하고 어울려 보기도 한 그는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무작정 유피테르 가드에게 잡아 오게 하는 게 부담스러운 상대도 있던 만큼 뤼카이온은 철저하게 준비하면서 신아영을 노릴 생각이었다.
험난한 목표가 예상되지만, 그 힘든 과정을 거친 끝에 자신의 침대에 저 소녀를 눕힐 생각을 하니 평소 ‘씨 뿌리는’ 일과 달리 하반신에 힘이 가득 들어가는 뤼카이온이었다.
***
아이언 포트리스, 지하.
[컁컁, 사실 지금까지는 그저 여흥이었습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신조 병기’의 이름에 걸맞은 걸물들이 나옵니다. 본 상점이 가진 최고의 물건이죠. 짜잔!]
“이건……?”
[예, 이건 ‘성좌 영원한 분노’의 유치(乳齒)입니다. 살아 있는 ‘별’, 별을 먹는 ‘별’. ‘성좌 영원한 분노’ 님이 아주 어릴 때 쓰던 이빨이었죠. 근데 문제가 이 특제 상자에서 꺼내면 이런 크기라서 말이죠.]
상자는 반지를 담을 정도로 작았지만, 폭시가 장갑을 끼고 그것을 꺼내자 유치(乳齒)라는 말이 무색하게 거대한 기둥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장갑으로 그것을 힘겹게 기둥처럼 세워서 받쳤는데, 이빨에 닿은 장갑과 땅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비록 ‘유치’라고는 해도 ‘성좌 영원한 분노’ 님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별’을 포식하는 힘이죠. 지금 제 장갑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시시각각으로 분해되고 있는데… 이것도 지금 마법으로 억제하고 있는 거랍니다.]
“오…….”
[‘성좌 종말자’도 처리하신 만큼 ‘성좌 영원한 분노’를 사정권에 넣으실 거라면 이것을 적극 추천드립니다. ‘별’을 먹는 이빨. 당연히 그 힘은 자기 자신에게도 통용이 되죠. 이 이빨이 효과를 잃는 건 ‘성좌 영원한 분노’가 죽는 그 순간이겠죠.]
“이거 상당히 괜찮은 것 같네.”
[단점이라면 결국은 ‘이빨’. 저희 ‘성좌 도살왕’ 님 같은 상성을 만나면 제대로 된 효과를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컁컁! 뼈와 살을 모조리 먹어 치우는 건 물론 조리를 좋아하시거든요. 아무튼 이것도 저희 사도님 중 하나가 ‘도살왕’ 님에게 푹 삶아서 고아 드리려고 구한 건데… 아무리 해도 조리가 불가능해서 이렇게 된 거거든요. 아무리 끓여도 이 이빨이 물을 다 분해해 버려서……. 아무튼 싸게 드릴게요!]
마지막 싸게 드린다는 멘트와 함께 성좌 영원한 분노의 유치를 도로 상자에 넣는 폭시.
성좌 영원한 분노의 신체 일부이자, 그를 쓰러뜨릴 가능성이 있는 히든카드라면 거부할 이유가 없는 유성원은 곧바로 가격을 물었다.
“얼마지?”
[컁! 보자, 마정석이라면… 이 정도쯤?]
“헉!”
[헉! 하실 게 아니랍니다. 컁! 이건 엄연히 ‘성좌’의 진체(眞體)의 일부라고요. 이 특이한 성질 때문에 가공이 안 돼서 그렇죠.]
확실히 ‘헉!’ 소리가 나올 만큼 비싼 가격이긴 했지만, 성좌 영원한 분노와 관련된 것이니 그럴 만하다고 이해할 수 있었다.
살아 있는 ‘별’의 육신인 시점에서 이미 신조 병기라 볼 수 있는 것이며 성좌 영원한 분노를 처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응용이 가능한 물건이었다.
‘가령 방패처럼 벽으로 삼아도 되고, 때려 박은 다음에 티탄의 말뚝으로 후려쳐서 집어넣어도 되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어디 가서 이만한 가격에 이만한 물건은 못 구하실걸요?]
“그건… 사실이니까. 휴우우~ 그… 저기, 혹시 할부되나?”
[물론이죠! 컁컁! 고객님이라면 회수 가능한 물품들이랑 담보가 꽤 있어서 충분히 가능하답니다. 컁컁!]
결국 한 번에 사기엔 너무나 부담스러운 나머지 할부까지 하게 되는 유성원이었다.
이 작은 상자에 들어 있는 ‘이빨’ 하나의 가격이 국가 예산 수준을 넘어선 엄청난 가격이라니. 자신이 구입하고도 믿기지 않는지 유성원은 손이 덜덜 떨렸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받아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당분간… 잠을 편히 못 잘 것 같아.”
“하하…….”
[컁컁, 큰 거래 성사 매우 감사합니다. 덕분에 실적이 엄청 올라갔네요. 감사의 뜻으로 작은 선물을 하나 드릴게요. 컁컁!]
철컹!
상상 이상의 큰 지출에 상심하는 유성원의 앞에 폭시는 사은품을 꺼내 놓았다.
그녀가 내놓은 것은 웬 검은 기계였는데, 표면이 많이 부식되고 이상한 체액이 묻어 있는 걸 빼면 형태는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완전히 고철 쓰레기였지만, 유성원은 그것이 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건… 설마? 성좌 종말자의…….”
[예. 저희와 싸우는 다른 ‘별’에서 얻은 것입니다. 전투 중 저희 ‘사도’님이 이걸 한입에 삼켜서 위액으로 녹여서 제압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속에서 전기가 빠지직해서 뱉으신 거라고 합니다.]
“이, 이게?”
유성원은 앞에 놓인 기계에 손을 대 보았다.
일단 외부는 많이 부식되고 부서져 있었지만, 내부 프레임은 꽤 무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좀 더 안을 파 보니 내부에 있는 ‘코어’와 ‘부품’들은 모두 멀쩡한 상태였고, 지겹게 싸우면서 빛나는 것을 보았던 마정석 엔진도 멀쩡한 것을 발견했다.
‘아칼론이 퍼뜨린 자폭 시퀀스에 모두 터져야 했을 텐데… 아!’
폭시의 이야기와 물건의 상태를 보면서 유추할 수 있는 건 다른 ‘별’에서 싸우던 성좌 도살왕과 성좌 종말자의 세력들이 전투 중 큰 손상을 입거나 아니면 신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아칼론의 자폭 시퀀스를 실행하지 못한 기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마정석 코어 엔진부터 시작해서 기술 요소가 그대로 담긴 기체. 게다가 이 기체를 카피할 재료는 차고 넘치게 깔려 있어서 시간과 돈만 투자해서 분석하면 금방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상만 해도 대박이다.’
[아무튼 이용 감사하고, 할부 지급은 제가 직접 받으러 오겠습니다, ‘별의 수호 기사’님. 그럼! 컁컁!]
“그럼 할부 지급 때 보자고.”
인사와 함께 사라지는 폭시. 아무튼 대박이라는 생각을 한 유성원은 곧바로 이 기체를 분석하기 위해 아이언 포트리스에 있는 분석 시설로 달려갔다.
어떻게 보면 이 고철 같은 기체 하나가 아까 전에 산 성좌의 유치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성원은 구조 분석에서 나오는 데이터를 보면서 끝없이 감탄을 내뱉었고, 성좌 종말자의 자재 회수팀에게 곧바로 주요 자재들을 아이언 포트리스로 가져오라는 지시까지 보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