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근데 아직도 성좌 종말자 쪽 소재랑 마정석 수급이 안 끝났다며?”
“거기는 절반도 안 끝났죠. 게다가 스캐빈저들이나 타국 정부에서도 노리는 만큼 시간이 엄청 걸립니다. 심지어 일부 현장에서는 올림푸스 길드 놈들도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여차하면 한판 붙겠다는 건가?”
“아뇨. 그냥 배짱부리는 걸 겁니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제정신인 이상 올림푸스 길드에게 전쟁 선포를 하지 않을 걸 아니까요. 그냥 소재나 마정석 좀 주고 말겠지, 하겠죠.”
성좌 종말자의 ‘종말기장’의 기체가 가진 소재의 가치 때문에 올림푸스 길드도 대형 길드답지 않게 도둑질을 하는 형세였지만, 본래 강대국일수록 더더욱 이런 뒷공작에 심혈을 기울이는 법이었다.
또 철두철미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증거도 못 잡을뿐더러, 잡는다고 해도 정부 차원에서 철저히 부정하면 실제로 전쟁을 걸지 않는 이상 그냥 할 말이 없어진다.
“으음… 그것들 좀 모이면 신조병장 구입이나 해 볼까? 아니면 카오스 아티팩트라도? 뭔가 결정적 한 수가 필요한데…….”
“옛 폐하의 검만 해도 상당한 물건이 아니신지요?”
“물론 이거랑 패황천검류도 막강하긴 한데… 너무 순수하게 강하기도 하고… 사용할 틈을 잡는 게 너무 힘들어.”
검술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시동어도 외워야 하고, 무엇보다 기술의 피해 범위가 너무 커서 대인전이나 난전엔 사용하기 걸맞지 않았다.
아무튼 현재 상황이 매우 갑갑하게 돌아가자 유성원은 뭔가 정신의 환기라도 시킬 게 필요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서 결단을 내렸다.
“말 나온 김에 지금 상점을 열어서 알아보자. 신조 병장! 카오스 아티팩트! 뭐뭐 파는지! 보고 생각해도 될 거 아니야! 너도 참관하면 불만 없지? 지금 딱 서류 다 처리했으니 다시 쌓이기 전까지 보러 간다!”
“그러시죠, 폐하.”
“뭔가 좀 좋은 게 있었으면 좋겠네.”
그렇게 말하며 유성원은 유청과 함께 아이언 포트리스 지하 단련장으로 내려갔다.
신조 병장과 카오스 아티팩트의 완전한 구입은 아니어도 성능 실험이나 사용 방법을 비밀리에 보기엔 이곳이 적합한 장소였다.
도착한 그는 곧바로 도살왕의 가호가 깃든 반지를 착용한 다음 성좌 도살왕의 상점을 운용하는 폭시를 불러내었다.
[컁컁, 오랜만입니다. ‘별의 수호 기사’ 님! 이제는 저희를 찾지 않는 줄 알았어요.]
“다른 곳에 거래할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부른 셈이지만… 아무튼 신조 병장… 혹은 신조 병기랑 카오스 아티팩트 좀 보려고. 당장 구입은 무리지만, 뭘 파는지 봐야 구매를 고려할 수 있으니…….”
[컁컁! 우주에 명성이 높은 ‘별의 수호 기사’ 님이면… 명성도 충분하시고, 지불 능력도 되시는 것 같으니 기꺼이 보여 드리겠습니다. 컁컁!]
호칭부터 철저히 불러 주면서 그녀는 작은 포탈을 열더니 그 안에 손을 집어넣고 여기저기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 상자 같은 것을 여럿 꺼낸 그녀는 조심스럽게 장갑에 안경까지 갖추고서 유성원의 앞으로 상자 하나를 열어 보였다.
[컁! 가장 먼저 보여 드릴 것은 역시 저희 성좌이신 ‘도살왕’ 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바로 이 검입니다.]
“검인가?”
[예. 이 검의 이름은… ‘별의 수호 기사’ 님이 계신 세계의 언어로 하면 ‘만육검(萬肉劍)’이라는 물건입니다.]
“도살왕 님다운 이름이네요.”
상자에서 나온 만육검(萬肉劍)의 모습은 날이 넓은 대검의 형태로 심상치 않은 붉은 기운이 흐르고 있어서 과연 신조 병기라는 이름에 걸맞은 포스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특히나 그 잔혹하고 무시무시했던 성좌 도살왕이 직접 만든 것이기에 분명 무시무시하고 흉흉한 성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유성원의 앞에서 폭시는 이 무기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컁, 이 무기는 말이죠. ‘성좌’님이 직접 힘을 불어넣으셔서 어떤 뼈와 살이든 모두 갈라 낼 수 있는 절단력을 갖추고 있습니다만! 여기까지면 심심하죠. 바로 휘둘러서 적을 죽이는 즉시, 적은 뼈와 살이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뼈와… 살?”
[네. 컁컁! 제가 사용하진 못하지만… 설명을 드리자면 만약 이걸로 인간을 베어서 죽이게 되면 그 즉시 자동으로 내장, 뼈, 고기가 얍! 하고 분리돼서 땅에 떨어지게 되는 거죠.]
“…….”
“…….”
어이없는 폭시의 설명에 ‘뭐야, 그게…’라는 말을 간신히 참아 내는 유성원과 유청이었다.
물론 생명체의 뼈와 살, 가죽을 무조건 갈라내는 능력은 좋은 편이었지만, 왠지 심심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상대하던 적들의 수준이 높다 보니 이 정도로는 성에 안 찬다고 해야 할까? 살짝 실망한 눈치였다.
[캬, 컁! 물론 이게 끝이 아닙니다! 이 검에 있는 비장의 기능! 그것은 바로! 전 우주의 그 어떤 고기라도 최적의 조리를 해 주는 기능! 조미료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아도 ‘도살왕’ 님의 은혜로 검에서 자연스럽게 소금과 후추, 올리브 오일 등등 각종 조미료가 나와 고기에 깃들게 됩니다. 또한 언뜻 보면 한쪽 면만 익히는 것 같지만 이 ‘적색 오라’가 고기를 감싸면서 양면을 똑같은 온도로 동시에… 지금 바로 시연을 해 보이자면…….]
“으음… 그건 필요 없을 것 같아. 다른 건 없을까?”
무슨 쇼핑몰 광고도 아니고… 하지만 일단 성좌 도살왕의 물건이기 때문에 폐를 끼칠 수 없는 유성원은 조심스럽게 애 둘러서 거절했다.
그러자 상인의 감각으로 눈치를 챈 폭시는 얼른 만육검을 집어넣고, 다른 상자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이번에 들어 있는 것은 작은 목걸이였는데, 아주 아름다운 보석이 박혀 있어 매혹적인 자태를 뿜어내고 있었다.
“오… 이건 뭐지?”
[성좌 ’미의 탐구자’ 님이 만드신 것으로 ‘진실한 미의 목걸이’입니다. 목걸이를 끼면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하게 되죠.]
“으음, 나쁜 물건은 아닌데 우리한텐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런 단순한 개념으로 생각할 게 아닙니다, 고객님. ‘신조 병기’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것으로 ‘성별’이 바뀌거나 하지 않고도 지고의 아름다운 육체가 될 뿐 아니라 각종 만물의 축복이 걸리게 됩니다. 영혼이 깃든 모든 존재를 매혹시키는 그야말로 최고의 액세서리로…….]
“아… 근데 난 이미 결혼까지 해서 필요 없을 것 같아.”
이렇게 신조 병기라는 것들에 대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실제 상품 및 물건들은 뭔가 묘하게 나사가 빠지거나 아니면 성좌들의 관점에서나 좋은 건지 기묘한 것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건~ 성좌 ’오물의 강’ 님이 만드신 반지 ‘오물 수집가’입니다. 이것을 끼면 그 이후로부터 배변과 오줌, 노폐물이 신체 내에 축적되지 않고 별도의 공간에 모이게 되며, 주문을 통해서 특정 영역에 분출이 가능하죠. 추가적인 능력은 같은 ‘오물의 강’ 님을 섬기는 신도들에게서 배변과 노폐물을 모두 끌어모을 수 있다는 장점이…….]
“…야, 도저히 난 성좌님들의 취향을 이해 못하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
그렇게 한참을 신적인 메커니즘이 있긴 하지만 기괴하기 짝이 없는 물건들의 나열을 지켜보던 둘의 반응을 읽은 건지, 폭시는 비장의 물건을 꺼내기로 마음먹고 눈을 빛내면서 두 사람의 앞에 자랑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
서울, 강남.
같은 시각, 신아영은 아주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와서 그 나이대에 맞는 소녀의 일상을 보내며 자유를 듬뿍 느끼는 중이었다.
일단 명목상으론 성좌를 찾는다고 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사령부에서 일했던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다.
그동안 사고 싶었던 것들을 잔뜩 사는 지름신 쇼핑, 영화 관람,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학교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등등, 성좌를 찾는 일은 약간 뒷전이었다.
“후아아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흐음… 그 말씀, 한 300번은 듣는 것 같군요, 아가씨.”
“아니, 그동안 제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당연하죠. 서류도 서류지만~ 나이 어리다고 얕보던 그 노친네들이랑 아저씨들 상대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데요.”
“소인배들의 행동 따위에 일일이 신경 쓰면 피곤할 뿐입니다, 아가씨.”
그리고 그런 그녀를 호위하는 것은 바로 유성원의 기사 중 하나인 가울프.
평소 입던 갑주와 무장 차림이 아니라 말쑥하게 양복을 빼입은 채 집사처럼 신아영을 보좌하고 있었다.
“그보다 아가씨, 슬슬 성좌에 대해서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는지요?”
“우우웅~ 뭐, 안 하고 있는 건 아닌데요. 좀 더… 쉬고 싶어요.”
“과연 일의 반동이 강하게 와서, 복귀하면 다시 또 사령관 대리를 해야 하는데 그 부담감이 크신 거군요.”
“윽, 너무 마음을 잘 읽는 거 아니에요?”
가울프의 지적이 정확했다는 듯 그녀는 마시던 커피의 빨대에 공기를 불어넣으며 딴청을 피우고자 했다.
유성원의 공백 중 해야만 했던 ‘대리’ 운영. 재능과 지혜,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극복해 나갔다곤 해도 엄청난 심적 부담과 책임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던 만큼 그녀는 성좌를 구하는 걸 끝내면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하아~ 나는 말이죠. 아빠랑 엄마랑… 그리고 하영이랑 수영이랑 재영이랑 가족이 뭉쳐서 모험이라든가, 던전을 갈 줄 알았거든요. 근데 현실은… 아빠는 기사들과 다니고, 우리만 남아 있다든가? 아주 반대로 서로 멀어지기만 하니…….”
“그렇게 따로 움직이는 게 현명한 길이 맞습니다, 아가씨. 다 같이 움직이다가 몰살당하면 조직이 와해되거든요. 고금동서, 후계자는 조직의 미래를 위한 안전 대책이니까요. 거리를 둬야 하는 게 정석입니다.”
“우우~ 가울프 경이 가장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 신청했는데… 우리 아빠보다 더해. 섬멸 언니로 할걸.”
“섬멸 경은 아마 저보다 더할 겁니다. 흠하하핫.”
“그럼 크록베인… 은 길에서 엄청 쪽팔리겠구나.”
신장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용인(龍人) 기사가 자신을 에스코트한다고 생각하자 끔찍해지는 그녀였다.
현재 크록베인은 유하영과 함께 성좌를 찾는 여행을 떠났으며, 재영과 하영에겐 섬멸과 중한이 붙었고, 모친은 진석 경이 수행하는 상태였다.
아무튼 가울프 경의 말에 따라 슬슬 놀고먹는 것도 적당히 하고, 성좌에 대해 진지하게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신아영이었다.
‘으음~ 요새는 전투력보다는 나는 그냥 행정, 사무 특화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
무력은 이미 유성원과 기사들로도 차고 넘칠 지경이고, 다른 곳과 싸워 이기면 이길수록 계속해서 힘을 흡수하고 더 크게 키워 나가고 있어서 자신이 무력을 더 쌓는 게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성좌에 대해서도 무조건 무력(武力)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크지만, 조금만 관점을 바꾸면 성좌 종말자는 나름 ‘기술력’과 ‘에너지 선호’ 같은 쪽이라서 계열이 다르긴 했다.
‘지혜, 지혜가 필요하겠지. 어떤 경우엔 칼보다 책상 하나와 펜 한 자루가 더 큰 가치를 가지는 경우가 있으니까…….’
칼은 땅을 빼앗을 수 있어도 운영하지 못한다.
땅을 운영하는 것은 결국 펜과 책상. 그 위에서 굴러가는 무수한 숫자들을 통제하고, 운영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
지금 그 영향이 크게 티가 나지 않는 것은 무력과 국가 단위 행정적 능력을 겸비한 ‘천검군’ 기사들이 있는 덕분이었다.
‘배우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그 이상의 능력이 필요하니… 그쪽을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
“실례합니다. 전선 도시의 통치 대리를 맡으셨던 신아영 양이 맞으신지요?”
“흠… 묻기 전에 자신들의 이름부터 대는 게 순리 아니던가? 수상한 친구들.”
생각하면서 가던 그들의 앞을 웬 검은 선글라스에 양복을 입은 남성들이 질문을 하며 가로막았다.
그러자 어느새 검을 꺼내 든 가울프가 앞으로 나서서 신아영의 앞을 막아서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가울프의 시선을 받은 그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양복을 벗어 던졌고, 그 순간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크게 치면서 번쩍 빛을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