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솔직히 자연의 일부는 아닌 것 같아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해야 할까요? 어려운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자연의 일부라고 하기엔 우린 너무 이질적이기도 하고, 또… 언제나 자연에 저항해 오고 지배하려고 한 것 같으니까요.”
가감 없는 솔직한 대답. 철학적인 생각을 깊게 하지 않은 유성원이었다.
2주간 여기 오면서 문명 생활에 벗어난다는 게 얼마나 피곤한 건지 절실히 느끼고 나니 더더욱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니 뭐니 하는 말이 와닿지 않았다.
“사실… 자연으로 돌아가기엔 이젠 휴지 하나만 없어도 상당히 불편하니까요.”
[그래, 솔직한 대답 좋구나. 그럼 하나만 더 묻겠다.]
“…오, 마지막 질문이라. 좋죠.”
[그대가 수호하고자 하는 ‘별’은 이 ‘별’ 자체인가? ‘인간들의 문명’인가?]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엄청 무거운 질문이 날아왔다.
이게 아마 성좌 진황과 협력할 수 있을지 아닐지에 대한 갈림길. 유성원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젓는 등, 어려운 질문인지 고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기를 약 30분, 결정을 내린 유성원이 답했다.
“으음… 때에 따라서 같은데요?”
[때에 따라서?]
“예. 결국 저도 인간이고, 이미 문명 생활에 쩔어 버린 종자라서 인간도 버릴 수 없지만… 그렇다고 ‘별’ 자체를 무시할 순 없죠. 지구를 탈출할 게 아닌 이상은 결국 그것도 신경 써야 하니까요. 그래서 스트레스 받아 가면서 중국, 인도를 등에 짊어지고 가는 거죠. 특히 인도가 장난이 아닌 게, 막 신정 사회로 돌아가서 그런지 시설 관리 같은 게 개판이 되어 가지고…….”
[그래도 ‘성좌 종말자’가 인구를 꽤 줄여 준 덕분에 좀 낫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
“사실 죽인 걸로 치면 ‘성좌 종말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들끼리 죽인 게 더 많지만요.”
이건 차후에 보고서를 통해서 들은 일이다.
정부를 재구성하면서 당연히 이번 사태로 인한 사상자 숫자 통계와 앞으로 나가야 할 일 등등 많은 것을 보고 들었기에 제대로 반박할 수 있었다.
성좌 종말자의 군세 탓이라기보다 인간끼리의 약탈, 파괴, 방화, 피난길에 식량과 식수 부족으로 인한 사망이 훨씬 많았었다.
[그리고 그건 그대가 부른 일이지.]
“예, 뭐… 잘 알고 있습니다.”
[가끔은 책임을 방기하고 싶지 않나?]
“아까 마지막 질문이시라면서요. 그렇긴 한데… 쓰레기도 먼저 본 사람이 치워야 하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지, 못하는 사람에게 시킬 순 없잖아요.”
유성원의 대답 이후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성좌 진황은 잠시 유성원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성원의 앞에 작은 빛이 일렁이면서 번쩍 빛나더니, 웬 빛으로 된 왕관 같은 게 나타났다.
“…이게 뭐죠?”
[내 ‘약속의 증표’다. 그것을 갖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다. 도움을 원하면 그것에 대고 생각하면 들어 주마.]
“이렇게 쉽게요? 그… 저, 옆의 중국 공산당을 뒤엎는다든가, 세계 탄소 배출량을 절반으로 만들라든가, 같은 거 안 시키고요?”
[그것은 우리 힘으로 해야 할 일. 그대에게 바랄 건 그저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원하는 ‘바람’을 불러 주었고, 앞으로도 계속 불러일으킬 거라 판단한 것뿐이다.]
“아…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아무 조건 없이 도움을 준다는 것에 유성원은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뭔가 다른 것을 하지 않고도 성좌 진황의 마음을 얻은 것이니 손해는 아니었다.
다만 하나 궁금한 점이 생기긴 했는데, 유성원은 왕관을 인벤토리에 넣으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기… 하나 질문해도 괜찮겠습니까?”
[말해 보아라.]
“그… 여기 올 때, 왜 굳이 그냥 걸어서 오게 한 것인가요? 차량 같은 건 매연이 싫으신 거라고 이해하겠는데…….”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더냐? ‘활자’, ‘가축’, ‘농업’. 이 셋이야말로 문명의 시작이지 않느냐?]
“아… 그러면 즉…….”
[나갈 때도 걸어가거라.]
“포탈 정도로 봐주시면 안 될까요?”
[…….]
찌릿!
성좌 진황의 눈빛에서 전류가 느껴진 유성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려왔다.
목표하던 바도 이루었고, 다른 조건을 따지지 않는 건 좋았지만 결국 또 이 성좌 진황의 영역을 나가기 위해서는 다시 2주간 왔던 길을 걸어가야 했기에 도합 한 달의 시간을 사용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
2주 뒤, 아이언 포트리스.
그렇게 한 달간 자연 속에서 여정을 보낸 끝에 돌아온 유성원은 성좌 진황의 영역을 벗어나자마자 포탈을 사용해 아이언 포트리스로 귀환했다.
금빛 신수의 갑옷의 도움을 받았어도 제대로 이발도 안 하고, 씻지도 않은 그의 몰골은 반쯤 상거지 꼴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성좌 진황의 땅을 다녀온 유청은 기묘하게도 조금 냄새 나는 것만 빼면 고고한 미청년의 외모를 유지 중이었다.
“너… 나 몰래 뭐 한 거 아니지? 너 왜 수염도 안 자라?”
“…소환된 그림자 같은 거니 그런 말씀을 하셔도…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됐다. 아무튼 씻고 이발이나~ 얼른 해야겠다. 또… 제대로 설명 안 하고 다녀온 거 가족에게 사과하고… 아무튼 씻고 싶어어어어억!”
더 이상 말하기도 힘든 듯 그는 잽싸게 욕실로 뛰어 들어가서 곧바로 씻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머리카락부터 깎고 샤워하는 게 국룰이지만, 지금 완전 상거지 꼴로 이발소를 간들 오히려 민폐이리라.
들어가자마자 샤워한 다음 뜨거운 물에 몸을 불리고 때를 벅벅 밀어 대는데, 거의 가죽이 벗겨진다 생각할 정도로 때가 쏟아졌고, 도저히 안 되겠는지 유성원은 자그마치 2시간이나 욕실에 있으면서 때를 불리고 샤워하고를 반복하는 전쟁 같은 목욕 끝에 청결한 모습으로 돌아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성좌 진황 님 영역은 다음부터 다른 사람 맡기든가, 아니면 다른 캠핑 도구를 더 챙겨 가야겠다. 친환경 캠핑 용품이면 뭐라고 안 하겠지.”
“젖은 수건 계속 쓰지 말고 새 거 써요.”
“네……! 누님, 아… 그러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가장이라는 놈이 암말도 없이 나갔다가 돌아오지도 않는 출장을 해 버려서 죄송합니다.”
“아뇨. 무사하니 다행이죠. 일은 잘됐나요?”
“예. 자세한 건 다 모아서 설명드릴게요. 너무 급박하게 출발해서 정말 죄송해요. 본래 순서가 반대로 되어야 하는데… 하아~ 가장이라는 놈이 이렇게 책임감이 없어서야.”
아무 말 하지 않는 부인이자 누님의 태도에 더더욱 미안해지는 유성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그가 벗어 둔 옷가지들을 챙겨 가면서 말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책임감이 있는 거예요. 세상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인간들도 많은데 말이죠. 아무튼 애들 모아서 갈 테니, 먼저 올라가서 조금이라도 더 쉬세요.”
“넵, 누님……!”
이해심 넘치는 부인의 태도에 한결 마음이 놓인 유성원은 그녀의 말대로 옷을 갈아입고서 먼저 올라갔고, 약 1시간쯤 지나자 여기저기 흩어졌던 아이들과 부인이 집결해서 가족들이 전부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신아영을 비롯해서 아이들 모두 유성원을 보자 반기면서 달려들었다.
“아빠다!”
“아버지, 오셨군요!”
“다들… 정말 미안하다. 내가 또 생각 없이 일을 저질러 버렸구나. 아니… 생각을 하긴 했는데, 또 가정을 까먹었어.”
안아 주면서도 유성원은 아이들에게 백번 사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정이라는 것에 대해선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장으로서 아이들을 이끌고 책임지는 입장이라고 한다면 이게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혈연이 없기에 더욱 철저히 과정을 지키고, 서로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줘야 하는데 그것을 저버린 셈이니 말이다.
“잘못이란 걸 더더욱 아는데, 내가 너무 미안하구나. 이런 거 반복되면 막 습관 되고 난리 날 텐데…….”
“괜찮아요, 아빠. 고칠 방법을 생각해 놨어요.”
“아영이 네가? 뭔데?”
“이번에 하는 일, 저희도 도울게요. 성좌들 모은다고 했죠?”
이번 일에 대해선 근 2주 동안 야생 생활을 하면서 전화로 진저리 날 만큼 설명하고 사죄했던 유성원이었다.
당연히 가족들은 이번에 할 일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어? 그렇기야 한데… 너희도?”
“예. 이미 아빠가 혼자서 야생 버라이어티 찍는 동안 저희끼리 계산하고, 생각해서 정했어요.”
“정하다니, 그건…….”
“저야 아빠가 맡긴 일 때문에 턱걸이 S급이지만 그래도 성좌님의 이목을 끌 정도의 인재이고, 엄마는 직속 사도였으니 문제없죠. 게다가 하영이, 수영이, 재영이 모두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S급까지 오른 애들이고, 지금 올림푸스 길드가 세계의 헌터들을 다 쓸어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뭔가 떠오르는 게 없어요?”
“아… 그건…….”
“적어도 저희가 흩어지면 못해도 성좌 한 분 정도는 끌어오거나 직속 사도가 될 수 있어요. 그러면 아빠의 일이 훨씬 더 편해지죠. 동시에 여러 사람이 일을 하는 거니까요.”
신아영의 제안에 유성원은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그런 수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오로지 자신이 돌아다니면서 성좌들을 만나고 그들의 시험이나 거래를 받아서 숫자를 늘려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아영이의 말대로 지금 가족들이 나서서 성좌를 하나둘 더 모아 준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매우 위험할 텐데? 그리고 알다시피 성좌님들도 성향이 다 제각각이야.”
“세계가 위험하다면서 혼자 뛰어다니는 거 보며 마음 졸이는 것보단 낫죠.”
“아니, 그건 그렇지만 그… 잘못된 거래라든가, 부조리한 걸 시킨다든가, 그런 걸 당하면…….”
“적어도 아빠보다 엄마랑 내가 성좌님을 더 많이 모시고 다녔는데 모를까 봐요? 그리고 재영이, 하영이, 수영이는 성좌보다 더 독한 인간들 밑에서 지내서 경계심은 아빠 정도일 거고요.”
“으으… 음!”
아영이의 논리적인 대답과 종합적으로 봐도 실리적인 의견에 유성원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고, 그제야 자신이 돌아온 것에 대해 부인이 왜 아무 말 안 한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튼 뭐라도 핑계를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끙끙대기만 하던 유성원은 결국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아영이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