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음, 이만하면 됐다.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지.”
안내역을 하는 드루이드의 말과 함께 수인들이 자연스럽게 멈춰서는 다들 풀숲이나 나무에 기대어 쉬기 시작했다.
식사는 각자 마른 고기와 과일, 작은 빵 같은 것을 꺼내서 알아서 챙겨 먹고는 곧바로 눈을 붙이거나 쉬는 모습이었다.
유성원과 유청 또한 오늘은 더 이상 못 가는 걸 알고서 자리에 앉아서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캠핑은… 성좌 66천마 잡을 때 이후로 오랜만인걸.”
“그때는 폐하 혼자셨죠?”
“어, 그렇지. 그땐 더럽게 힘들었어. 아무튼 뭐 먹을까? 전투 식량으로 할래? 아니면 차려 먹을까?”
“그건 폐하께서 정하셔야지요.”
“그럼 전투 식량으로 하자.”
마치 캠핑 온 것처럼 유성원과 유청은 떠들면서 바닥에 자리를 깔았고, 성좌 진황의 영역이라 손님인 자신들에게 딱히 위협이 없는 만큼 둘 다 갑주를 벗고 식사 준비를 했다.
전투 식량 박스 구석의 버튼 캡을 벗기고 그것을 강하게 누르자, 금방 뜨거워지면서 내부의 음식이 조리되었다.
“기술 참 좋아졌다니까. 예전의 전투 식량은 그냥 데운 밥 같은 거였는데, 이젠 보존 마법에다 자동 조리가 되어서 진짜 갓 만든 음식 같이 나오잖아.”
“마정석을 이용한 응용 기술이 뛰어난 거겠죠. 이 식량 상자 하나에 얼마나 많은 기술과 마법이 적용된 건지. 참~ 저희 때는 돌 같은 빵에 육포, 메마른 야채를 잔뜩 넣고 끓인 국이 전부였는데…….”
“중세 레벨 전투 식량이면 그냥 전투 식량에도 밀리지 않냐?”
유성원이 슬쩍 딴죽을 걸었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듯 유청은 피식 웃고는 조리가 다 된 전투 식량을 먹기 시작했다.
야외에서 먹어서 그런 건지, 하루 종일 걷는 운동을 해서 그런 건지 밥맛은 꽤나 좋았다.
전투 식량인 만큼 처리는 인벤토리에 있는 재활용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묶어 두는 걸로 끝이었다.
“아, 씻고 싶은데. 음… 트레일러라도 꺼내 올까?”
“잠자리는 편하게 주무시는 게 좋습니다만…….”
“아니다. 그냥… 자자. 이런 경험도 해 봐야지.”
왠지 드루이드들과 수인들의 눈치가 보인 유성원은 그냥 자리만 깐 채로 자기로 했다.
계절 자체는 약간 쌀쌀했지만 인간을 초월한 육체를 지니게 된 지 오래라서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다만 하나, 문제는 모기를 비롯한 벌레들. 하루 종일 걸어서 달아오르고 땀도 약간 흘린 육체라서 그런지 아주 제대로 잔칫날을 잡은 듯 달려드는 게 문제였다.
“이대론… 못 참겠다. 아오… 가려워.”
철컥! 철컥!
결국 갑옷을 입고 잠에 드는 유성원이었고, 유청 또한 천검군 최강의 기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어느새 전장에서도 잘 안 쓰던 투구까지 쓰고서 자고 있었다.
최강의 인간도 결국 모기 앞에선 어쩔 수 없구나 생각하며 그렇게 밤을 보내는 유성원이었다.
***
평양 신도시.
유성원이 갑작스럽게 업무로 떠났지만 이미 신아영을 중심으로 한 체제는 완전히 굳어져서 잘 돌아갔다.
다만 유성원의 대리로 자리를 지켜야 해서 던전에 가지 못한 그녀는 S급 헌터에 진입만 한 상태로 각종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또 집을 나서서 어디론가 가 버린 아빠, 유성원에게 전화를 걸어 화를 내는 중이었다.
“…아니, 아빠, 종말자 잡았으니까 이제 당분간 집에 있는다면서요. 근데 또 출장이라뇨. 아빠가 빵꾸 낸 업무는 누가 메워야 하는지 모르세요?”
(끄응…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별’이 위험하니까. 대신 인도랑 중국 업무는 원격으로 처리할 테니 한국만 부탁할게.)
“에휴~ 알았어요. 몸 성히나 돌아오세요.”
(그래, 잘 부탁할게.)
뚜… 뚜…….
전화를 끊고 한숨을 푹 쉬는 신아영.
본래 이렇게 되는 걸 바란 게 아니었다. 그냥 길드 활동하면서 어머니랑 새로 들어온 동생들이랑 오순도순 살면서 아빠랑 엄마가 낳은 동생도 보는 거였는데…….
저 아빠라는 사람은 지금 너무 스케일이 큰, 세계를 위한 일로 뛰어다니느라 집안 상황을 거의 돌보지 못하고 있다.
“물론 돌아올 때마다 최대한 어울려 주는 건 좋은데…….”
“누나! 시킨 일 다 했어.”
“던전 다 조지고 왔어!”
“스캐빈저 다 처리했어!”
“어, 재영이, 하영이, 수영이 왔니? 하아~”
축 늘어져 엎드려 있던 사이,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한 가족이자 그녀의 일을 도와주는 유재영, 유하영, 유수영 셋이 돌아왔다.
본래 일본의 S급 헌터였지만 그들에게 행해진 비인간적인 실험과 대우에 화난 유성원이 데려온 아이들로,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젠 진짜 가족처럼 가까워진 사이였다. 셋은 이곳 사령부 기동대로 활동하면서 성좌 도살왕의 잔당 처리 및 야생 던전 처리와 지하 감옥 관리 등을 하고 있었다.
“누나, 왜 그래? 아버지 또 출장 갔어?”
“어~ 이번엔 오래 있겠지~ 싶었는데… 그새 또 가셨더라. 정말 못 말린다니까…….”
“어쩔 수 없지. 아버지는 성좌 레벨이랑 싸우는 사람이니까~ 아니면 우리도 성소를 들락거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으음~ 그거 아빠 부하들이나 ‘기사’들만 갈 수 있는 거니……. 근데 우리 중엔 ‘기사’ 클래스가 전혀 없잖아.”
엄연히 ‘기사단’의 성소인 만큼 신아영을 비롯한 가족 멤버들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누군가 기사 클래스 같은 걸로 전향하고 싶어 했지만, 넷 다 자질이 부족한 건 아닌데 이미 다른 클래스로 돌아가 버린 상황. 굳이 한다면 성좌와 거래하는 게 좋은데 지금 S급인 그들로서는 성좌와 거래하기가 묘한 상태였다.
“성좌랑 거래하고 싶어도… 아빠가 ‘별의 수호 기사’라. 결국 다 내보내야 하잖아.”
“근데 그게 가능할까?”
“글쎄? 그렇지만 아버지라면 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하아아~”
이야기를 주고받는 신아영과 아이들은 한숨을 쉬었다.
성좌를 ‘별’에서 추방한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물론 그것을 위해 이 ‘지구’가 그를 택한 건 맞지만, 과연 그 목적이 약 100년을 사는 인간 생에서 가능한 것일까?
어쩌면 유성원은 죽을 때까지 일반인의 생활로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신아영이었다.
“…하아~ 뭔가 다른 거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엄마는 그저 ‘믿고 기다리렴.’이라고 할 뿐이고 말이지.”
“어머님은 굳세시니 말이죠.”
“하지만 불안하신 건 마찬가지인지 계속 던전이랑 여기저기 전투하러 가시더라. 말씀은 안 하셔도 그런 것 같아.”
“아우으으! 일! 일이나 하자. 이렇게 있어 봐야 뭐가 되지도 않아.”
가족의 행복이 점점 멀어져 간다는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신아영은 불길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흔들면서 일에 집중했다.
고민해도 딱히 명확한 해답도 없는 상황.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게 답이었다.
***
2주 뒤…….
묵묵하게 숲을 거닌 지 약 2주. 제대로 씻지 못하고 걷기만 한 유성원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전신 일체형 갑옷의 효과 덕분에 그나마 외양은 멀쩡해 보였지만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반면 유청은 대체 무슨 관리를 하는 건지, 아니면 숲의 축복이라도 받은 건지 자신과 똑같이 씻지도 않고 먹고, 자고, 걸으면서 보냈는데, 외양의 기품이나 미모가 전혀 죽는 기색이 없었다.
“저기, 너… 뭐 마법 같은 거 쓰냐?”
“아뇨, 폐하. 소신에겐 마법의 재능은 없습니다만?”
“성지(聖地)에 다 왔노라.”
그때, 둘이 떠드는 것을 멈추게 하는 드루이드의 말에 유성원은 앞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이 지겨운 숲이 끝나고 그 너머엔 거대한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고, 앞엔 높은 언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언덕 꼭대기엔 커다란 나무와 함께 거대한 하얀 사슴이 하나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그 사슴의 머리엔 용의 머리가 달려 있었다.
“…기린(麒麟)?”
[어서 와라, ‘별의 수호 기사’여.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성좌 진황’의 분신 중 하나. 이 ‘신목(神木)’을 코어 던전 삼아 이 ‘별’에 머물고 있느니라.]
그 순간, 유성원의 머릿속으로 아주 곱고 자애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좌 진황의 목소리. 이 ‘별’에 직접 만든 분신이 말하는 것을 들은 유성원은 그 친절한 설명에 감사하면서도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아… 예? 저기, 그러면 관측되었던 ‘코어 던전’은 뭐죠?”
[살아남기 위한 지혜 중 하나이지. 아무튼 어서 올라오너라. 할 이야기가 많겠지.]
“예. 그럼… 음? 뭐야?”
그렇게 유성원이 언덕을 오르려는데, 뒤따라오던 유청이 드루이드와 수인들에게 제지를 당했다.
순간 당황한 유성원이 말리려고 했지만, 드루이드는 당당하게 유성원을 바라보며 반박했다.
“저희 성좌님이 허락한 것은 오직 ‘별의 수호 기사’인 당신뿐. 이자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끄으으응… 좀 봐주면 안 될까? 걔가 내 브레인이라서 말이지.”
“안 됩니다. 그분에게 물으시는 건?”
“하아~”
슬쩍 성좌 진황의 분신인 기린을 쳐다봤지만 그 또한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 그도 유성원만이 올라오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런 만큼 유청은 결국 언덕 아래 남겨 둘 수밖에 없었고, 손을 저어 유청을 물러가게 한 유성원은 홀로 언덕을 올라갔다.
“쩝, 아무튼 제가 올 걸 아셨는데… 어디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요?”
[우선은 그대가 여기까지 오면서 느낀 것을 말해 보아라.]
“으음… 일절 꾸미는 말 없이?”
[그래, 꾸미는 말 하나도 없이 고하라.]
“솔직히… 힘들고 불편했죠. 성좌님이 또 자연환경에 민감하신 분이라서 트레일러도 꺼내기 뭐했고, 그러니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밥이야 뭐 기술의 도움으로 좋게 먹었지만 결국 문명 생활도 못했고, 집에는 돌아가지도 못하고…….”
[솔직해서 좋구나. 그럼 하나 묻겠다. 그대는 이 ‘별의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 생각하는가?]
성좌 진황의 난데없는 질문에 유성원은 당황했다.
뭔가 철학적인 내용을 묻는 건지, 아니면 자신에게 진짜 대답을 요구하는 건지 전혀 아리송하기도 했지만 질문 자체도 너무나 난해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인가? 아닌가? 정답은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일부라기엔 인간은 언제나 자연을 거스르고 저항하면서 자신들의 영역과 문명을 세웠다.
그렇다고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고 하기엔 물, 태양, 바람, 대지 같은 모든 자연 요소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생물이다.
‘음… 이거 뭔가 뻔한 대답을 요구하는 것 같진 않은데…….’
성좌가 처음에 언급했던 솔직한 답을 원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기억한 유성원은 투구를 벗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받아들인 그대로 대답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