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3개월 뒤, 신평양.
지하에는 각성자 전용 감옥, 지상에는 대동강 변에 마련되는 새로운 사령부. 수많은 인력들이 전선 도시를 오가거나 혹은 이곳에서 그대로 트레일러나 임시 건축물을 지어서 공사하고 있는 현장들이 많은 가운데, 한 트레일러 안에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들이 모여서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참기가 어렵군. 황금이 산처럼 쌓인 산을 두고도 아무것도 못한다니 말이지.”
“더 답답한 건 역시 말이 안 통하는 그 꼬마 계집이지요. 무슨 떡밥을 던져도 하나도 물지도 않고, 무조건 법대로 가자고 하니…….”
“심지어 여기는 재판부도 따로, 감옥도 따로라서 수작 부리다가 걸리면 얄짤없으니 답답할 지경이지. 서로 좋은 게 좋은 건데 말이야. 후우~”
여기 모인 이들은 현재 아름답게 흐르는 대동강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북한 지역 개발 공사 및 각종 사업을 하지 못하게 막는 신아영 사령관 대리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었다.
이제 막 20대가 된 소녀는 젊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곧은 건지 자신들이 어떤 메리트를 걸고 뇌물을 건네려고 해도 계속해서 사업을 내주지 않고서 오로지 공개 입찰에서 공정하게 겨루라고만 하고 있었다.
“그냥 경쟁력 대결이라면 모르지만 문제는 ‘심사’에 들어가는 조항들이 너무 광범위해요. 안전 문제 같은 거는 그렇다 쳐도 임금 규약을 지키는지, 법리를 어기지 않는지, 하청에 대한 대우는 어떤지. 아니, 그냥 가성비와 요구하는 내용물만 따지면 되는 거지, 왜 이렇게 깐깐한지.”
“어쩔 수 있습니까? 사회에 대해 전혀 모르는 애송이니까 그런 식으로 하는 거겠죠, 라곤 해도… 가진 권한과 힘이 너무나 커서 뭘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으니 갑갑할 따름이죠. 그 계집의 애비가 어느새 멸망급을 잡아 버리고, 인구 20억의 지배자가 되어 버렸으니… 하아~”
“그런 걸 제치고 수출 막히기 싫으면 그냥 눈치 봐야 하니… 정말 갑갑합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유성원의 집권 이후 정말 일할 맛이 나지 않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예전엔 그냥 ‘청룡 길드’나 ‘서울 길드’ 아니면 ‘올림푸스 길드’ 이 셋 중 하나에 돈만 적절히 바치면 여러 일을 도와주는 건 물론이고 경쟁 기업 테러, 정보 유출 등등 좋은 일도 해 줘서 근 수십 년간 아주 편하게 사업을 해 왔는데, 이제는 그런 시대가 끝나 버린 것이었다.
“물론 판이 바뀌어도 경쟁력은 여전히 저희가 우위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역시 일을 한다면 편하게 하는 게 최고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그 계집도 그렇지만 결국 유성원 그 작자가 지배하는 이상 변화가 없을 텐데요? 그렇다고 처리하자니 이미 너무 아득한 곳에 있는 사람이라.”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아직 그들에게 대항할 세력이 하나 있잖습니까? 올림푸스 길드라고 말이죠. 그리고 지금 마침 그 망나니 같은 쓰레기인 ‘뤼카이온’이 한국 주재 담당으로 있습니다.”
“그거야 이미 아는 사실이지요. 설마……? 아니,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뤼카이온’의 이름을 꺼낸 이의 생각을 읽은 듯, 깜짝 놀라는 다른 이들이었다.
확실히 유성원에 맞설 수 있는 건 이제 올림푸스 길드뿐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둘을 진짜로 붙이면 세상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자칫 잘못하다간 멸망급 성좌 둘이 풀려나 버립니다!”
“자자,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 제가 최근 어떤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어떤 정보 말입니까?”
“세계 유수의 헌터들이 지금 비밀리에 모두 미국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 말이죠. 그리고 그들 모두 자신들이 섬기던 성좌를 버리고 올림푸스 아래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까지!”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다 인도에서 일어난 일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일어난 일. 성좌 종말자의 공습도 물론 큰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일은 바로 성좌가 자신을 섬기던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들을 버리고 도망친 사건이었다.
이 쇼크는 어쩌면 멸망급이 사라진 것보다도 세계에 더 큰 충격을 준 것이었는데, 어쭙잖은 성좌를 섬기면서 성장이 더뎌지는 헌터들에게는 의심이 생겨났고, 결국 다들 배신이든 뭘 하든 차라리 도망 안 칠 최고의 성좌를 찾아서 섬기자는 의견이 대세가 되고 있었다.
“오오… 그런 일이!”
“지금 전선 도시에 대기하는 줄만큼 올림푸스 길드에도 수많은 헌터들이 그들의 성좌와 계약하기 위해 줄 서 있다네.”
“그렇다면…….”
“그래, 멸망급 성좌를 쓰러뜨린 일이 오히려 올림푸스 길드를 강화시킨 셈이지. 아무리 20억 인구의 지배자라고 한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아직도 성좌의 시대일세. 성좌 없는 유성원 놈에겐 어림도 없지.”
멸망급이 하나 사라지긴 했고, 성좌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아직도 성좌의 시대는 여전했다.
그리고 놈은 결국 인간. 오래 살아 봐야 100년, 좀 특이한 스킬이나 특성을 가졌다고 해도 조금 더 버티고 살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변명 덕분에 20억의 정점이지만 결국 세계는 놈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저런 독불장군식 운영을 하는 강대국이 생기는 걸 바라진 않을 테니 말이죠.”
“오…….”
“그러니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올림푸스 길드가 세계 최강이 되는 시점에 ‘뤼카이온’을 부추기면 됩니다. 그때까지만 우리는 아주 잠시 저것들이 정의 놀음에 어울리며 참고 지내면 됩니다. 하하핫, 건배하시죠.”
쨍!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완전히 지구가 파멸하지 않는 이상에야 지금의 위치는 변하지 않고, 자신들은 가진 것을 내줄 필요가 없다.
아주 잠깐 동안의 밤일 뿐, 언젠가 자신들의 세상이 돌아온다는 걸 아는 그들은 지금의 굴욕을 웃으면서 버티기로 하고는 계속해서 술잔을 나누며 떠들었다.
***
같은 시각, 평양 신사령부.
하나, 밖의 트레일러에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와 정보는 마찬가지로 유성원에게도 전해졌다.
그리고 당연히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는 딸인 아영이와 함께 성좌 종말자의 잔해와 자료들을 바라보며 연구에 힘썼다.
하지만 성좌의 격차도 그렇고 별의 수호 기사인 점을 빼고서 대항하고자 하니 가슴이 답답해지고 난감할 따름이었다.
“기술 개발을 한다고 해도… 그 종말기장은커녕 종말기병급 메카닉도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사용하는 미래형 무장도 재현해 낸다고 해도 그 막대한 에너지를 공급할 코어 엔진이 없습니다.”
“끄으으으응~ 역시 무리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칼론에게 하나 혹은 둘 정도는 남겨 달라고 할걸… 하아~”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다, 다만 계속해서 연구는 지속하겠습니다.”
역시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겠다고 생각한 유성원은 서류들을 보면서 계속해서 고민했다.
멸망급 성좌, 성좌 종말자가 사라진 이후 올림푸스 길드의 성장세가 역으로 가파르게 올라갔다는 건 자신의 귀에도 들려왔다.
일이 잘 풀려서 안심하던 차에 들려온 이 소식은 그에게 엄청난 고민거리였는데, 결국 별의 수호 기사로서 올림푸스 길드의 12성좌도 내쫓아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골치 아프네. 다른 멸망급들은 그냥 싸워서 해결한다고 쳐도 올림푸스 길드는 이게 전면전을 하기가 참… 곤란하단 말이지.’
미국에 자리 잡은 길드이며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바가 너무나 큰 만큼 싸움을 걸면 세계의 공적으로 몰릴 판국이다.
이미 성좌 영원한 분노와 성좌 복수의 티탄을 막고 있고, 세계 각지에 지부를 두고서 인재 모집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헌터들을 투입해서 지켜 주고 있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B급 이상의 웬만한 헌터들은 다 여기로 가고 있네. 심지어 한국에서도……. 에휴… 진짜 성좌 종말자의 여파가 얼마나 큰 거야? 하아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유성원이었다.
이렇게 되면 설사 다른 셋의 멸망급 성좌를 잡고 나서도 올림푸스 길드의 독주 체제가 되고 손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고 멸망급을 잡기 전에 올림푸스 길드부터 처리하자니 이미 주가는 높아질 대로 높아졌고, 지금 헌터들이 몰리는 순간에 공격하게 되면 올림푸스 길드의 세력은 더 급격히 커질 것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저 종말기장이나 종말기병의 기술이라도 본격적으로 연구해 보자고 한 건데… 아, 이거 곤란하네.”
“여기서 뭐 하고 있나요?”
“아, 누님, 별건 아니고… 들어온 소식을 보고 이거저거 고민 좀 하고 있었습니다.”
“고민이라니. 멸망급 잡고 난 이후로 편해졌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게 말이죠…….”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곁에 다가온 부인 신소미. 유성원이 고민하는 걸 본 그녀는 의아해하며 물었고, 그 질문에 유성원은 지금까지의 정보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이야기를 듣자 유성원과 마찬가지로 표정이 어두워지는 그녀였다.
“그렇… 군요.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하니 또 고비가 생긴 격이군요.”
“뭐, 그렇죠. 물론 저녁쯤에 애들 다 모아서 회의할 거긴 한데… 그 전에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한번 고민해 본 거예요.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결국 성좌 종말자의 유산이었지만 말이죠. 아무튼 근데… 무슨 일로 온 거죠? 또 뭔 일 났나요?”
“손님이 왔어요.”
“손님? 예약된 손님은 없는 걸로 아는데…….”
이제는 보통 사람들보다 아득히 높은 자리에 있는 만큼 만남 약속 같은 것도 쉽게 잡을 수 없는 그였다.
중국, 인도, 한국을 계속 오가면서 일하는 그의 스케줄은 약 30분 단위로 빡빡하게 관리되는 만큼 손님이 왔다고 해서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의아해하는 유성원이었는데, 신소미가 파일을 하나 그에게 내밀었다.
“으음… 아직까진 여기 연구소에서 궁상 떨 시간이라 보긴 할 텐데… 가능하면 그래도 정식 스케줄을 잡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이런 거 한번 받으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기도 하고, 기존에 잡혀 있던 사람들… 이거?”
“그걸 보셨으면 아시겠죠?”
“어우… 아… 으으음… 그러네요. 때로는 다른 스케줄을 미룰 정도의 손님이 올 때도 있죠. 지금 어디 계시죠?”
“사령부 본부에 있어요.”
파일 내용을 본 유성원은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뒤집으면서 벌떡 일어나 본부로 향했다.
그래, 스케줄도 중요했고 약속도 중요했지만 그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손님이 온다면 그것을 무시할 수도 있는 법이다.
특히나 그 손님의 존재가 지금 이 답답한 상황을 헤쳐 나갈 열쇠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자라면 더더욱 그래야만 했고 말이다.
“정말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제가 궁상을 좀 떠느라 말이죠.”
“아뇨. 갑작스럽게 찾아온 저희야말로 죄송할 따름이죠. 유성원 헌터님, 아니 별의 수호 기사.”
“하하… 그 칭호는 아직도 부끄러운데 말이죠.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좌 복수의 티탄의 사도이신…….”
“프로메테우스의 가호를 받은 자, 커류라고 합니다.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유성원의 말에 대답을 한 손님은 신장 약 2미터에 엄청 좋은 체격을 가진, 금발에 적안을 한 남성이었다.
자신을 성좌 복수의 티탄의 사도이자 프로메테우스의 가호를 받은 자, 커류라 소개한 그는 유성원에게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했고, 유성원은 그것을 받아 주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예. 부탁이라고 하면 역시 올림푸스 길드 문제일까요? 그거라면 저희도 반가운 일입니다.”
“예상하신 바가 맞습니다. 멸망급 성좌인 성좌 종말자가 사라지고 난 이후 상황에 대해서 말이죠.”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앉으시지요.”
이해를 맞춘 둘은 마주 앉아서 곧바로 올림푸스 길드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