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커억!”
“너무 뻔해.”
하지만 그 반란은 아주 잠깐의 환상이었을 뿐, 곧바로 유성원의 주먹에 복부를 맞고 기절하여 쓰러졌고, 유성원은 그를 구속했다.
그리고 잠시 후, 계속해서 배를 모는 유성원에게 천검군 병사와 기사들이 다가와 예를 갖추면서 보고를 올렸다.
“폐하, 명하신 대로 배에 있는 자들을 모두 잡아 구속 완료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돌아가면 어디 감옥 시설에 넣고 테스트나 하자.”
“한데, 이런 일에 직접 나오실 것까지는 없는 걸로 압니다만? 물론 폐하가 계신 덕분에 포탈을 써서 쉽게 일 처리를 할 수 있었지만요.”
“그게 나는… 역시 현장 체질이라서 그래. 현장이랑 인간을 봐야 상황을 알지. 그럼 운전이랑 평양 쪽 배달을 맡길게. 난 다른 곳에 볼일이 있어서~”
“예. 명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그렇게 현장 지휘를 마친 유성원은 곧바로 기사단의 성소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 다른 곳에 있는 기사가 열어 둔 포탈로 나갔다.
직접 체험해 보니 역시 생각 이상으로 유용한 능력이었다.
방금 전까지 한국 서해상에 있던 유성원이 지금은 단숨에 인도 뉴델리에 있는 신정부 호위 부대 사령부에 도착해서 업무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항의요?”
“예. 역시 너무 급진적인 정책들의 연속이라서 여기저기에서 항의가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과거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들인데… 입국 금지시킨 이들 외에도 그… 옛 사상에 얽매인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말이죠.”
“아니, 신이 도망친 꼴을 봤는데도 그래요?”
“도망쳤다고 한들…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가 보죠.”
한숨이 나오는 인도의 상황. 개혁이라는 게 당연하지만 완수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계층들이 제대로 된 교육과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전에 부릴 수 있는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들의 마지막 저항이나 다름없었다.
“국외 추방시키자니… 그것도 좀 미친 짓이고. 뭔가 대의(大義)가 필요한데… 우리가 나간다고 하면 완전히 아프리카 분쟁 지역 같은 느낌으로 개막장될 거고, 그렇다고 저 개샹놈들의 발언을 들어주면 그냥 도루묵이고~”
“저기, 이러는 건 어떻습니까?”
“어떻게?”
“일단 협상하는 척 받아 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전국에 다시 퍼뜨리는 거죠. 물론 실제로 협상을 받지는 않겠지만… 막 이런 기사들을 같이 내보내는 겁니다. ‘협상 시작!’,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나?’, ‘유성원 헌터님의 세력이 물러나기 시작’, ‘신전 복구공사 계획서 유출!’ 같은 거 말이죠.”
과거 인도 정부에서 일하던 고관 출신이 의견을 냈는데, 유성원은 아직 그 내막을 이해 못하고 있었다.
그런 기사들은 역으로 그놈들과 공식적으로 협상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하여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세대와 세대를 거치면 모를까, 지금은 다들 성좌가 도망친 일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다시 그 제도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반대할 사람은 많겠죠. 시위엔 역시 맞시위. 민의를 무기로 삼는다면 우리도 민의를 무기로 삼으면 됩니다.”
“오, 그거 괜찮은 방법이네요. 근데 역효과는 안 나려나요?”
“그건 제가 한번 잘 조율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치안과 군권, 언론을 쥐고 있는 건 저희이니 역효과가 나려고 해도 날 수가 없습니다.”
‘하긴… 일단 시설과 땅을 먹은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지.’
무력으로 빼앗을 수 없을 만큼 차이를 두고 있다면 어설픈 여론전이나 저런 시위 플레이를 한들 빼앗기려야 빼앗길 수가 없다.
정말 최악의 경우엔 유성원 헌터의 세력들이 그냥 나가 버리면 이곳은 치안과 군권에 공백이 생겨서 분쟁 지역화될 확률이 높아지니, 더더욱 혼란을 일으키는 저 과거의 잔재들을 없애야만 했다.
‘오히려 이쪽 사람들이 의욕이랑 생각이 넘쳐서 다행이네. 중국 쪽은 그냥 나 하자는 대로만 해서 문제인데…….’
스스로 방안을 생각해 내고 나아가는 모습을 고평가하면서 유성원은 그들의 제안을 승낙하고 일을 진행시키는 걸 허락했다.
그리고 성좌 종말자의 잔해 수거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나눈 다음 다시 성소의 문을 열고 이번엔 중국 북경으로 향했다.
이번 성좌 종말자 공략에 함께했던 근위대장들을 중심으로 개선 행사와 앞으로의 홍보에 열중하고 있었다.
멸망급 성좌의 공략 멤버라는 것은 나름 큰 명예이기도 했지만, 남쪽 중국 공산당 정부와 완전히 갈라치기 위해서 그들의 명예를 드높이고 압력을 막을 간판으로 만들려는 거였다.
“그러니까 저기… 내가 평생 여기를 통치할 수 없다니까? 선거 준비하라는 거 했지? 아니, 최소한 당은 안 만들었어?”
“그냥… 입헌군주제 하면 안 될까요?”
“의회나 만들고 그 소리 해라. 좀! 아이고…….”
하지만 역시나 성좌 용봉왕 아래에서 수동적으로 일하던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 건지 그들은 계속 이대로 유성원 측이 지배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일단 그의 성향도 그렇고, 교육하라고 투입된 진석, 유청 같은 천검군 기사들의 능력도 매우 뛰어나서 그런지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이 망할 근위대장들은 떨어질 줄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사실상 저희도 ‘폐하’의 부하 같은 취급이고 말이죠. 애초에 아시아의 제왕이라는 건 또 여기를 지배한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하잖습니까?”
“…그걸 좀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면 안 되니?”
“제도란 도구이고, 결국 사람이 중요한 겁니다. 게다가 지금 무리해서 저희가 선거로 독립해 봤자 이 혼란한 아시아 상황을 제어하기가 힘듭니다. 차라리 폐하 밑에 모두 뭉쳐 있는 게 낫지요.”
“그거 완전 그냥 ‘우리는 이대로가 좋아요.’ 선언 아니니? 하아아~”
“아무튼 이게 저희의 의견입니다. 하하핫!”
중화사상의 근본에 깔린 민족성인지 그냥 한 명의 하늘(天) 아래가 편하다고 하는 근위대장들이었다.
그나마 군부 통치스러운 건 성좌 용봉왕 아래에서 일하던 공무원과 사람들 덕분에 많이 희석된 느낌이지만, 국가 주요 안건이나 방향성은 계속해서 유성원 쪽에 물어 오니 미칠 노릇이었다.
좀 알아서 하라고 해도 보고해 오고, 그게 아니어도 이렇게 와서 승인받고, 몇 번을 독촉해도 바뀌지 않고 그냥 이대로 가자고 하니 속이 터지는 건 유성원이었다.
“하아아~ 아무튼 다른 경과 있으면 보고해. 이상… 그럼 난 한국 간다.”
“예, 폐하!”
일단 회의를 마친 유성원은 다시 성소를 넘어서 한국으로 갔다.
도착한 곳은 아이언 포트리스. 이제 다시 인류 최후의 보루로 돌아가고 있는 곳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시설에서 구해 온 아이들을 돌보는 요람이기도 했다.
성인이 된 아이들은 일을 하기 위해 전선 도시나 평양 신도시로 보내지지만,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의 경우 보호가 필요하고 또 외부에 맡길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뭐, 교육 철학을 마음껏 펼치시니 좋아 보이시네요?”
“그런가? 그래. 자네 덕분에 새로운 인생을 맞이한 기분이긴 하지. 근 30년보다 최근 3년이 더 값어치 있는 시간이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자네도 많이 달라진 것 같아 보이는데?”
“예. 교정당한 느낌이지만요, 어르신.”
백가연 어르신은 여전히 이 아이언 포트리스의 본래 주인이었기에 이곳을 맡고 있었다.
물론 때때로 정부와의 교섭이나 이야기를 진행하기도 하고, 근래엔 신평양에 만들 새로운 아카데미를 준비하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보다 교사나 교수를 맡을 헌터나 사람들이 문제라고 하던데 그건 해결됐나요?”
“걱정 말게. 아주 철저하게 실력, 인품 모두 보면서 뽑고 있으니 말이야. 그보다 걱정할 건 나보다도 자네이지 싶은데…….”
“예. 문제가 엄청 많죠.”
“역사적으로 급성장한 세력은 늘 문제가 많지. 오히려 자네는 축복받은 인재들 덕분에 잘 버티고 있지만 말이야. 특히 그 천검군의 친구들은 정말… 난세의 영웅이자 치세의 현신이더군.”
뛰어난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적응하며 시대나 환경을 초월해서 활약한다는 것을 보여 준 자들.
중세 같은 환경에서 살던 기사들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게 바로 천검군이었다.
이해력도 뛰어나고, 천재적인 발상과 실력, 경험이 모든 것을 받쳐 준 덕분에 유성원 일행은 이런 빠른 확장을 하면서도 부작용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근데… 신평양 문제에 대해선 들었는가?”
“아뇨. 무슨 문제 있나요?”
“그 신도시와 주택 건축에 수많은 건설 회사들이 붙어서 난리이지 않은가?”
“아, 그거야 들었죠. 사령부 만들고 난 다음부터 입찰하려고 하는데… 벌써부터 경쟁에 들어갔나요?”
“그야 당연하지. 전선 도시와 같은 도시로 자네가 만든다는 건 둘째 쳐도 대동강으로 이어지는 무역 라인부터 해서 대륙 간 철도를 만들기 적절한 도시이기도 하지. 평양은 잠재력이 보통이 아닌 곳일세. 북한 정권이 멸망하고 어떻게든 수복하려고 괜히 난리 친 게 아닐세.”
서울이 한국의 중심 도시라는 점과 함께 그 잘난 한강 뷰 때문에 땅값이 천원돌파했던 걸 생각하면 평양은 이제 전선 도시의 업그레이드판이 될 거고, 대동강 뷰라는 입지 조건까지 가지고 있어서 건설 회사든 재벌계든 모두 군침을 흘리는 장소였다.
“자네 딸이나 부인이 이야기 안 하던가? 심심하면 정부나 기업들이 초청하는 만찬회 같은 데 가서 알랑방귀 뀌는 걸 보고 들어야 하는데 말이지.”
“아…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문제없을 텐데요. 결정은 제가 하니까요.”
그리고 그 엄청난 이권이 걸린 사업의 제어권을 가진 것은 바로 유성원 본인.
아시아의 제왕을 넘어선 갑 오브 갑이 된 그에게 모든 결정권이 있는 셈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동네 문구점도 그가 밀어주기 시작하면 재벌 계열에 드는 게 불가능이 아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 문제는 어떻게 하겠나? 아마 머리 아플 텐데? 이미 재벌가와 그 외 기업 간의 격차가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 상황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도 곤란하지 않겠나?”
헌터의 시대와 성좌의 시대를 넘어선 지금 이미 격차가 벌어져 있던 재벌과 일반 기업 간의 차이는 이제 하늘과 땅, 아니 태양과 돌멩이의 차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 만큼 실력, 자본 어느 쪽이든 상대가 안 되기에 결국 사업 경쟁을 걸면 평양 개발은 모두 재벌가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아뇨. 그다지 곤란하지 않아요.”
“음? 해결책이 있나?”
“그야 재벌이든 기업이든 그 자체로는 나쁜 게 아니죠. 다만 수단과 방법을 어떻게 쓰느냐? 와 죄를 지어도 벌을 받느냐, 안 받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요점은 질서와 심판이 공정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 같은 음주운전 사고나 마약 범죄를 저지르지만 누구는 5년형, 10년형을 받는데 누구는 집행유예나 심지어 바르고 깨끗하게 살라면서 무죄 방면하는 경우가 있다.
사회 질서와 공정한 규칙을 위해서 만들어진 법전이 올라와 있지만 사람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문제. 역으로 생각하면 그거만 해결하면 될 뿐이다.
“그냥 평양도 전선 도시처럼 운영하면 땡이에요. 뭘 걱정하세요. 이제 우리 영역은 법안 및 집행 자체가 아예 별도이니까요.”
국회가 계속 미적거리면서 개혁을 늦추니, 아예 미국의 독립된 주처럼 법과 집행을 별도로 만들어 버린 유성원이었다.
이젠 그가 그렇게 요구해도 한국 정부는 굼벵이처럼 꾸물거리면서 ‘하,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밖에 할 방법이 없었다.
유성원의 심기만 건드려도 그들 또한 사실상 중국 공산당과 같은 처지가 되어 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옆에서 교본을 보여 주는데도 안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하기 싫은가 봐요. 이 정도면 꽤 오래 기다려 준 것 같은데 말이죠.”
“허허허, 원래 썩은 물들은 스스로 빠져나가려 하지 않는 법이니……. 하지만 문제는 과연 그런 방식으로 좋을까? 라는 거지. 사실상 왕조 시대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그건 그냥… 전선 도시랑 평양 신도시를 중심으로 북한 영토 싹 개발한 다음에 의회를 만들어서 자치하면 되는 거죠. 근데 엿 같은 문제는 저기… 우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정신을 안 차리니까 그걸 못하는 거구요. 만들면 끝나니까요.”
“으으음… 생각은 하고 있어서 다행이구먼. 이젠 정말…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겠구먼.”
백가연 어르신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유성원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가 바라는 것은 모두 다 이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방식엔 문제가 많았지만 그래도 그 방향성만큼은 어떻게든 희망찬 미래를 그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 또 이제 세계를 쥐고 흔들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기에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음? 어르신, 왜 웃어요? 제가 뭐 이상한 말 했나요?”
“아닐세. 아니야. 그냥… 이렇게 된 자네가 대견해서 말이지. 그렇게 싫다, 싫다, 안 해, 안 해를 노래처럼 부르던 청년이…….”
“…아니, 사실 지금도 그 마음 비슷한데… 그냥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거라니까요.”
“그래그래, 열심히 하게나.”
“어르신, 제 말 안 듣고 있죠?”
그렇게 유성원이 뭐라고 하든 백가연은 자신의 인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며 행복한 기분을 느꼈고, 유성원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그녀를 어쩔 수 없다는 듯 놔두고는 자신의 일을 계속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