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일이 있다고 해서 오지 않는 게 아니라, 오고 난 다음에 일을 하러 가는 게 순서가 아닐까요?”
“…그게 일단은 중환자라고 대외 발표를 했기 때문에 인도에 머물러야 했고, 진짜진짜 급한 일만 처리하고 오느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누님…….”
“엄마, 그쯤 해요. 애초에 코어 던전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인데…….”
“맞아, 맞아.”
“그것도 멸망급이잖아요. 보통 사람이라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요, 엄마.”
대한민국 정부 요인들을 피 말리게 하는 유성원은 현재 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 중이었다.
확실히 예전과 다르게 이제는 가정이 있는 몸인 만큼 ‘코어 던전’에서 나왔을 때부터 곧장 연락을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실책이었다.
다행히 아영이를 비롯한 아이들이 말려 준 덕분에 책망은 금방 끝났고, 유성원은 겨우겨우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던전에서 나오면 절대로 가족에게 안부부터 전하세요. 알았죠?”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제부턴 이동이 달라져서 더 빠르게 오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죠?”
두말할 거 없이 유성원은 ‘기사단의 성소’의 문을 열고 거기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것을 통해 앞으로 기사들만 파견해 두면 세계 어디든 오고 갈 수 있게 된 것을 부연 설명하면서 한국에서 인도, 중국을 모두를 관리하면서도 가족과 지낼 수 있다는 결론을 설명했다.
“그건 엄청 좋네요!”
“그렇지. 게다가 인도가 안정화되는 거랑 지금 호주랑 동남아, 일본에 산더미처럼 쌓인 성좌 종말자 부하들의 잔해 정리 등등…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당분간 던전 갈 일도 없어.”
“오오!”
“아마도 다른 멸망급이 난리를 부리지 않는 이상은 여기서 출퇴근하며 평온하게 보낼 것 같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에 가족들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사정상 국외 출장이 잦은 편이었던 유성원이 국내에 머물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되자 다들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급 인사가 되고서 오히려 이런 상황이 되자 결국 서임을 받은 것은 큰 보상이라 생각되는 유성원이었다.
***
멸망급 성좌의 소멸의 여파는 생각 이상으로 크게 퍼져 나갔다.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인도의 지침. 그것은 거기에 새로이 들어가려는 길드나 성좌 세력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데, 성좌 종말자의 군세를 두고 성좌들이 도망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최소한 싸우다가 밀렸거나, 아니면 사도들에게 힘을 남겨 둔 채로 도망갔으면 또 모를까? 싸우지도 않고 보따리부터 싸서 도망쳐 버렸으니, 위상은 땅 밑으로 꺼진 레벨이었다.
당연히 남은 소수의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들로 시작한 인도 정부였지만, 이미 수정 법안에서부터 무조건 성좌에 대한 신앙을 금지하고 그들에 대해서 ‘각성’을 미끼로 ‘거래’만 하는 대상으로 인식이 낮아져 버린 것이었다.
“일단 국방은 유성원 헌터님이 일부 맡아 주실 겁니다. 그분이 남겨 준 시간 동안 우리는 ‘성좌’의 힘 없이 싸울 수 있는 방법과 ‘각성자’들을 강하게 할 방법을 찾아봅시다.”
“아예 ‘성좌’와의 계약에 쉽게 당하지 않도록 교육 매뉴얼을 만드는 건 어떨까요?”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한 번 당했으니 절대 두 번은 안 당하도록 조치해야죠.”
천만다행으로 성좌의 시대가 되기 전에 일했던 과거 인도 정부의 요인들이 과거 자료와 데이터베이스들을 몰래 숨겨 둔 것이 큰 호재였다.
그리고 노령이지만 남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들을 통해 새로운 인도 정부는 하루가 다르게 피해를 복구하고 국가로서의 질서를 잡아 가기 시작했다.
“역시 제일 중요한 건 그 쓸데없는 카스트 제도를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한 번 그것 때문에 영국에게 지배당하는 역사를 만들었고, 두 번째로 성좌라는 존재에게 속았습니다. 세 번… 세 번은 절대 안 됩니다.”
“모든 도시를 싹 밀어 버리고 재건축하죠. 흔적을 없애야 하니까요.”
“공공 교육도 강화하고 법안도 재정비해야 하고, 할 게 정말 많군요. 또 특히나 홀대당하던 여성 인권도 챙겨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성좌를 버리게 된 만큼 모든 인구의 역량을 써서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강해져야 합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그렇게 인도는 한번 무너진 것을 교훈 삼아 두 걸음, 세 걸음 나아갈 계획을 짜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겠지만 적어도 정부 구성원과 사회 지도층들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단 나으리라.
그리고 이번 성좌 종말자 사건은 세계 각국에도 충격을 주었는데, 성좌라는 존재가 인간을 배신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과 그 의심이 성좌를 섬기는 모든 길드와 헌터들에게 아주 작은 싹이라도 생기게 만들었다.
물론 성좌들이 감시하는 아래에서 대놓고 이야기할 순 없었지만, 다들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성좌님도 배신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거 무턱대고 저 양반만 믿다간 우리도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이상한 과업은 줘 놓고 보상이 시원치 않은 경우도 있던데…….’
‘앞으론 좀 더 확실하게 보상과 임무에 대해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아.’
‘말로는 도망 안 친다지만, 그걸 어떻게 믿어? 저기 인도 꼬락서니가 돼 봐야 알아?’
올림푸스 길드급 초대형 길드는 이미 쌓아 놓은 길드의 규모와 사도들에게 베푼 혜택이 커서 의심의 여파가 그리 퍼지지 않았지만 중위, 하위 길드의 구성원들에게는 이런 생각들이 속속 퍼져 나갔다.
아무래도 올림푸스급으로 강한 성좌들이 아닌 만큼 사도나 추종자들에게 처음부터 막강한 힘을 제공해 주지 않는 건 각자 추구하는 바나 원하는 가치가 달라서였지만, 인간은 끝없는 욕심을 가진 생물이다.
‘애초부터 성좌 차이가 큰 게 아닐까? 저 각성한 지 몇 년도 안 되는 놈은 지금 멸망급 잡고 있고, 15년 넘게 헌터로 목숨 걸고 일하는 나는 여전히 C급인데?’
‘또 개X 같은 일만 시키네. 경험치는 X도 안 주면서…….’
‘차라리 돈이라도 많이 주든가… 백날 벌어 봐야 그게 그건데… 으음…….’
멸망급 성좌를 잡은 것보다도 성좌에 대한 신뢰에 균열이 간 것이 더 심각한 사태였고, 이 사실을 성좌들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그럼 결국 그런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결국 갑이 되는 존재는 성좌였으니, 암만 불만이 쌓여 봐야 인간은 속으로만 끓이는 걸로 끝이었다.
인간을 능가하는 존재로 ‘각성’한 것을 포기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
그다음 멸망급 성좌를 쓰러뜨린 것에 가장 영향을 받은 세력은 역시 홀로 멸망급 성좌와의 전선 2개를 맡고 있는 올림푸스 길드였다.
이쪽도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의심이 들었지만, 이내 사람을 보내고 금방 영상 자료가 올라옴으로써 확인이 되자 더 크게 놀랐다.
헌터가 된 지 고작 몇 년도 되지 않은 신규 헌터가 이젠 멸망급까지 때려잡는 경지라니. 게다가 중국, 인도 정부를 손에 쥐고 어느새 인구 20억의 정점에 서게 된 경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이걸로 전부 모이라는 건 심하지 않습니까? 현장에서 힘쓰는 우리는 나중에 정리된 자료나 보면 될 것 같은데 말이죠.”
“틀린 말은 아니네만, 그래도 이번 사안은 꽤 중요해서 듣는 게 좋을 것이라 모두 모이게 한 것이네.”
“솔직히 말해서 멸망급, 우리도 못 잡는 게 아니잖습니까? 잡고 난 이후에 후달릴 거 생각해서 그냥 몸 사리는 거지. 까놓고 말해서 저랑 유피테르 가드만 갈 수 있게 해 주시면 까짓것 저도 이기고 오죠.”
“헤라클리온! 진정하게. 자네가 아무리 헤라클레스의 가호를 받은 자라고 해도 멸망급 성좌의 코어 던전에 무턱대고 가게 둘 수 없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젠장! 그렇게 몸만 사리니까 저 애송이한테 뒤처지는 겁니다.”
“그는 이 ‘별의 수호자’일세.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야.”
올림푸스 길드 최상층부는 이미 유성원이 이 ‘별’, 바로 지구의 수호자로 선택받은 것을 알아차렸다.
성좌의 존재도 언급하지 않고 그저 ‘기사도’니 뭐니 하면서 하던 행동부터가 이상했으며 소환하는 기사와 소환수들의 존재만 봐도 일반 ‘헌터’로 규정할 수 없다는 건 뻔하디뻔했고, 조사하자 금방 드러나는 일이었다.
“성좌들에게서 이 ‘별’을 지키는 자. 굳이 따지자면 우리 성좌님들에겐 ‘최종 보스’ 같은 존재이지. 그리고… 이젠 정말 ‘최종 보스’에 맞는 위용을 갖춘 놈이 되었지. 저걸 이제 어떻게 상대하지?”
“그냥 저랑 아킬레온, 오라이온, 헥토리아 넷이 가서 때려잡으면 끝 아닙니까?”
“…쉽게 생각하지 말게. 그의 곁에도 사도급 기사들이 널려 있어. 천검군, 사령 군단, 용봉왕 휘하의 군단, 일부는 도살왕 밑에 있던 마수들까지. S급 헌터들 다수를 투입해야 하는 레벨인데, 멸망급을 잡은 헌터가 쉽게 당하겠나?”
“거참~ 머리 아프네요. 결국 저놈도 못 잡고, 그렇다고 우리는 멸망급 성좌를 공략하지도 못하고. 참 나~ 그렇다고 저놈들에게 시켜서 또 해내면 결국 또 강해지고. 대체 어쩌라는 겁니까?”
헤라클리온의 말대로 지금 손대니 어쩌니 하는 건 이미 늦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자기들이 멸망급에 꼬라박아 보자니 잃을 S급과 SS급 헌터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 왔다.
코어 던전들을 여럿 공략해서 그들도 잘 아는데, 그곳들은 단순히 강하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방안은 뭡니까? 그냥 그 친구 칭찬하자고 부른 건 아니잖습니까?”
“앞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최종 보스라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그 친구에 대한 정의를 재정립한 것이지, 그다음은 이제부터 이야기할 사안입니다.”
헤라클리온을 진정시키는 한 중년 남성. 이름은 오디세이어로 오디세우스의 가호를 받은 자였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정중하게 건네는 그의 말을 들은 헤라클리온은 진정하고는 중얼거렸다.
“최종 보스라…….”
“다른 성좌님의 세력은 경쟁자이지만 이 ‘별’을 지키는 ‘수호자’는 결코 우릴 용납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세력도 커졌고. 인구 약 20억의 정점, 최종 보스로 손색이 없지요. 허허허.”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걸 그럼 어떻게 잡을 겁니까? 멸망급도 무서워서 안 잡는다고 난리면서~ 최종 보스는 대체 어떻게?”
“오히려 더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단 같이 이 ‘별’을 지키는 데 힘을 쓰는 중 아닙니까? 저 흉포한 성좌 영원한 분노와 성좌 복수의 티탄을 막아 내고 있는 게 우리 입장인 이상 상대는 먼저 우리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오디세이어의 말대로 유성원의 위상이 오르든 말든 올림푸스 길드는 아직도 세계 최고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주요 멸망급 성좌 둘을 상대하며 지구를 지키는 데 큰 기여를 하는 건 사실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그쪽에서 먼저 멸망급 성좌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말을 걸어올 겁니다. 그러니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한데… 그 전에 다른 쪽부터 가면 어쩌죠?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가 있지 않습니까?”
“그쪽은 걱정할 거 없습니다. 그분은 절대 잡을 수 없는 존재이니까요.”
“아… 맞다.”
헤라클리온은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에 대한 내용을 떠올린 듯 박수를 치며 오디세이어의 말에 긍정했다.
아프리카에 있는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는 그들 말대로 좀 특수한 케이스라서 자신들도 잡을 수 없는 존재라 결정지어 놓은 성좌였던 것이다.
“지금 일단 내정을 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남은 멸망급 성좌에게 다시 도전하기 위해 올 것이고, 그것은 분명 성좌 복수의 티탄이나 성좌 영원한 분노일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때 협력한다고 한 다음 처리한다는 거군.”
“바로 그겁니다. 인류에 다소 혼란이 있겠지만, 그게 뭐 문제겠습니까? 저희에게 중요한 건 오직 저희 성좌님들이 이 ‘별’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다들 해산해서 각자의 일을 보러 갑시다.”
오디세이어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가 흩어졌다.
유성원이 먼저 와서 말을 거는 것에 대비하고 그를 처리할 준비는 그가 말을 거는 그 순간부터 준비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올림푸스 길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좌가 지구의 주인이 되길 바라면서 오늘도 각자 맡은바 할 일을 계속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