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으으윽!”
폭발과 후폭풍이 모두 사라지고, 유성원은 눈이 멀어 버린 채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신은 그래도 금빛 신수의 갑옷이 지켜 주었지만, 역시 직접 바라봐선 안 되는 광경을 본 대가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가장 빨리 달려온 것은 유청과 가울프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여기 포션 있네, 계약자여… 무모해도 정도가 있지.]
“…그래도 그냥 끝까지 보고 싶었어. 아칼론의 최후를 말이야. 지금… 상황 어때?”
“어떻긴요. ‘종말기장’과 ‘종말기병’을 포함해서 ‘나이트 세이버’는 물론 골렘들까지 싹 다 전멸했습니다. 저희의 승리입니다.”
투구를 벗고 눈 쪽에 포션을 뿌리면서 유성원은 보고를 들었고, 서서히 시력이 돌아오자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아득히 많았던 골렘을 포함해서 ‘종말기장’과 ‘종말기병’들 모두 쇳덩어리 잔해만 남은 채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까지만 해도 하늘에 여럿 떠 있던 ‘마정석’으로 된 별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공허한 하늘만이 보였다.
“아… 드디어 나았나?”
“폐하, 아칼론 경을 찾았다고 합니다.”
“어디에?”
유청의 보고를 듣고 따라가니 ‘나이트 세이버’… 아니 어느새 분리되어 다섯으로 쓰러진 기사들의 잔해가 시야에 들어왔다.
인간의 희망과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강철의 기사들.
은하를 지키고, 악신과 싸운 그 전설대로 그들은 우주의 멸망을 부르는 ‘성좌’의 야망을 좌절시켰다.
“…성좌 종말자를 목표로 할 거면 미리 말이나 해 주지. 아니면 사명이 있다고 하든가…….”
“폐하를 믿은 거겠죠.”
“맨날 이거 싫다, 저거 싫다면서 징징대던 날? 보면서 혐오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가 품은 꿈과 희망은 범인인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찬란한 빛 아래에 드러난 긴 그림자와 같은 자신의 허물들이 자신을 찔러 오는 듯한 기분. 아칼론이 해낸 위업은 그 정도로 큰 것이었다.
강물에서만 살던 고기가 바다를 보았을 때의 기분을 절실히 느낀 유성원은 말없이 아칼론의 잔해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걸 보고 기억한 게… 나뿐이라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네. 아무튼… 그러셔도 이미 저질러진 건 돌아오지 못하니까 그만하시죠. ‘성좌님.’”
[크으으으윽! 으으으으으윽! 으으으으으으으으윽!]
전지전능한 존재라도 억겁의 세월 동안 쌓아 올린 자신의 과업이 무너지니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를 보거나, 노아의 방주가 침몰하는 광경을 본 하느님의 심경이 이와 같았을까?
아무튼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분노로써 몸소 보여 주는 빛 덩어리에게 유성원은 해야 할 계산에 대해 말했다.
“아무튼 해야 할 일을 하시죠, 성좌님.”
[크으윽! 그래, 할 일은 해야겠지. 그게 ‘게임’의 룰이니까. 하지만 언젠가 이 굴욕을 반드시 갚을 것이다. 그리 알아라!]
“아뇨. 일개 미물이라 그 언젠가가 오기 전에 금방 죽을 몸이라서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아무튼 썩 나가라. 나도 당장 그 ‘별’에서 퇴장하겠다.]
뭔가 심상치 않은 말을 남겼지만 유성원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칼론’에 대한 것과 이 ‘성좌 종말자’의 코어 던전에서 살아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머릿속이 가득 차서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친절히 열어 준 포탈을 타고 밖으로 나온 그들이 도착한 곳은 본래 수많은 기계들의 잔해만 남은 에어즈록 위였다.
“아… 여기 바깥의 것들도 다 파괴된 모양이네. 아무튼… 아무튼 살았어. 휴우우~”
“곧바로 성소를 통해서 모시러 올 비행기를 보내라고 전하겠습니다, 폐하.”
“그래…….”
털썩.
유청의 말을 들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유성원.
결국 멸망급 성좌 하나를 무너뜨리긴 했다. 하지만 왠지 석연치 않은 것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아칼론의 희생을 통해서 얻어 낸 승리라서 그런 것이리라.
하지만 그래도 승리는 승리였고, 이 지구에서 멸망급 성좌 하나가 사라진 건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 주역인 아칼론의 주인은 유성원이었기에 당연히 보상도 그의 것이 된다.
[위대한 사명을 ‘하나’ 완수한 것을 축하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은 전 ‘우주’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부하의 공훈은 상사의 것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경우는 확실히 구분하셔야죠.”
[그가 활약을 하게 되고, 이 장소까지 오고, ‘성좌 종말자’의 ‘코어 던전’에서 기회를 잡은 것 모두 당신이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위업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보상이라면 충분히 받은 것 같은데… 레벨 업 엄청… 이 아니라. 이거… 100에서 더 안 오르는데? 설마 레벨이 여기서 카운터 스톱이야?”
[Lv.100 유성원]
유성원은 자신의 스테이터스창을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아칼론의 자폭으로 ‘우주’ 단위의 ‘멸망급 성좌’ 세력을 모조리 쓸어 담아 버린 만큼 그 여파로 들어오는 경험치로 인해 레벨은 한계점에 도달, 물론 보통 방법으로도 도달하기 힘든 레벨이지만 그곳에 도달해 버린 유성원이었다.
모든 스테이터스는 이제 SSS급. 명실상부한 세계 최초의 트리플 S급 헌터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그다지 와닿지는 않았다.
“…뭐, 그런가? 하긴 계속 강해지면… 그분들의 게임판이 기묘해지겠지.”
만약 ‘강해짐’에 한도가 없다면 사도와 ‘성좌’의 구분은 어느샌가 모호해질 것이고, 싸움 규모도 기묘해질 터였다.
아무튼 보상 외에도 이미 엄청나진 상태였는데, 여기서 또 뭐가 주어질지 궁금한 그의 눈앞에 한 자루의 검이 떠올랐다.
[지금은 우선 보상이 아닌 ‘인정’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인정?”
[당신에게 진정으로 ‘별’을 수호할 마음이 생긴 것을 확인했기에 ‘별의 수호 기사’로 진정한 서임을 하고자 합니다. 무릎을 꿇으세요.]
‘아, 클래스를 주는 건가?’
보통의 각성자와 다르게 클래스란만 늘 비어 있던 유성원이었기에 눈치껏 무릎을 꿇고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저 ‘기사도의 길’ 스킬의 보유와 배울 수 있는 것들이 ‘기사’에 관련된 클래스임을 예상하고 있었을 뿐, 확실히 자신이 어떤 클래스라는 정의는 내려지지 않았었다.
그것이 이제 진짜로 확정된다는 것인데, 멸망급 성좌나 되는 거물을 잡고서야 인정된다는 게 기이할 따름이었다.
‘뭐, 새로 얻은 스킬 포인트랑 함께 추가로 스킬을 배울 수 있을 테니까… 무조건 좋지.’
[그대, 드디어 이 ‘별’을 위해서 진심으로 싸울 마음이 든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동안 고되고 힘들었지만 다른 기사들과 함께한 여정을 통해 당신은 보통 인간으로서 이 자리까지 왔고, 인간의 ‘가능성’을 증명했습니다. 이제 그대는 진짜 ‘수호 기사’로서 이 ‘별’의 생명을 지키는 기사가 될 것입니다. 그대는 ‘별’을 위해 싸울 것을 ‘맹세’합니까?]
“예.”
아무튼 보상이고,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제안이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맹세 또한 이미 ‘사명’을 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거부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러자 유성원의 몸을 빛이 감싸기 시작했다.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든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일어났다.
[그동안의 여정을 통해서 당신은 이곳까지 도달했고, 당신은 ‘별의 수호 기사’가 되었습니다.]
“으음, 뭔가 바뀐 건 없는 것 같은데… 어디, 뭐가 있는지 볼까?”
[유성원]
Class:‘별의 수호 기사’
…….
…….
…….
“어라? 왜 이거 말곤 아무것도 안 보이지? 그리고 레벨은 어디로… 갔어? 뭐여?”
유성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상태창을 이리저리 눌러 보았지만, 나오는 건 오직 자신의 이름과 클래스를 적어 둔 창뿐이었다.
이게 무슨 보상인가 싶어 어이없어하는 그의 눈앞에 금방 새로운 상태창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당신이 얻고, 선택해 온 모든 힘들은 이제 당신 고유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동경과 쟁취, ‘위대한 기사의 길’을 통해서 걸어온 길의 종착점에 섰고, 그 모든 자격을 갖추었기에 더 이상 ‘각성’으로 인해 빌리거나 받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영겁의 세월 동안 당신의 것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각성으로 얻은 거지만 이제는 마치 내 본래 능력 같은 게 되었다는 건가?”
[그렇게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아무튼 이제 ‘각성’의 틀을 벗어난 고유의 힘이기 때문에 여러 방해로부터 자유로울 겁니다.]
뭔가 보상이라기엔 거창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각성’의 틀을 벗어나게 된 힘이라고 하니 ‘성좌 용봉왕’ 때와 같이 상태창으로 장난치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다만 명확하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상태창이 사라진 건 좀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젠 그것들이 있든 없든 해야 할 일을 알고 싸움을 겁내지 않게 되었으니 상관없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맞다. 이제 나도 ‘성소’ 이용이 되려나? 아니지, 내가 기준점이 되지 않으면 어차피… 똑같구나. 대피소로나 써야겠네.”
결국 자신을 중심으로 시전이 되어서 문이 열리는 만큼 여전히 직접적인 사용엔 제약이 있을 테지만, 그래도 다른 사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는 ‘성소’에 대한 생각을 바꿔 두기로 했다.
“오… 비행기 온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네. 가면… 어디… 아칼론 무덤이나 만들어 줄까?”
비록 ‘그림자’라곤 하지만 이곳에서 자신과 삶을 불태웠던 ‘아칼론’에게 조의를 표할 생각을 하며 유성원은 자신을 태우러 온 전용기를 타고 돌아갔다.
***
그리고 3일 뒤, 세계는 난리가 나 있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호주를 점거하고 있던 성좌 종말자의 세력이 스스로 폭발하거나 사라지는 광경이 전해진 뒤로 각국에서 조사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필시 그 3일 전에 코어 던전으로 들어간 유성원 헌터가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추측을 내놓게 되었다.
“당장 알아봐! 이건 대사건이야!”
“젠장! 설마? 진짜 멸망급을 잡았다고?”
“와, 말도 안 돼. 아시아의 제왕이 그럼 이제 어디까지 가게 되는 거야?”
뉴스, 헌터 길드, 정부 모두 인도와 한국에 사람을 보내서 현 상황에 대해 파악하게 되었지만, 인도의 상황이 가장 빠르게 급변했다.
성좌 종말자의 세력이 물러났다는 걸 알자, 사람들은 다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하나 인도에선 혼란스러운 상황이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는데, 바로 성좌 종말자의 침략에 국외로 도망쳤던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들이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공항과 주요 시설은 피난민들로 만들어진 임시 정부에서 장악한 상황으로, 돌아온 그들과 곧바로 충돌하게 되었다.
“당신들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타고 온 비행기를 타고 다시 돌아가십시오. 밖에서 잘 먹고 잘 사시지, 왜 돌아온 겁니까?”
‘그야 거기선 암만 해 봐야 밑바닥이니까. 적응한 놈들도 있지만,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가 거기서 먹힐 판인데…….’
부를 소유하고 있긴 하지만 외국에선 결국 힘도, 권력도 없는 브라만들이다.
크샤트리아들과 공존하긴 했지만 ‘성좌’의 가호가 사라진 만큼 다른 헌터보다 밀리기에 현지에 있는 세력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지 몰라 인도에서 성좌 종말자가 물러나자 잽싸게 돌아온 것이었다.
“어딜 감히 천한 것 주제에! 신의 말씀을 전하는 나에게 명령한단 말이냐? 썩 비켜라. 안 그러면 신의 심판이 너희를…….”
그러니 뻔뻔하게 예전처럼 신의 권위를 세우며 공항의 경비를 압박해 보았지만, 시대는 바뀐 지 오래였다.
“그 잘난 신님께선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하셨죠? 신의 전사라고 하는 크샤트리아도! 신의 말씀을 전하는 당신들도 모조리 도망갔잖습니까? 그런데 감히 돌아올 생각을 하다니! 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다시 신의 섭리와 질서를 세우기 위해선 결국 피가 필요한가? 허허허.”
피난민들로 구성된 임시 정부 아래 모인 사람들의 마음엔 이미 ‘신’이라는 존재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는 그저 거짓말쟁이들로 낙인찍힌 뒤였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그들을 강제로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들에겐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해도 각성자인 크샤트리아들이 존재했다.
“그럼 그 질서, 우리 앞에서 펼쳐 보시지. 이미 카스트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종교는 이제 단순한 신앙의 영역일 뿐 더 이상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새로운 법 아래에 정립되었다.”
하지만 이런 사태를 예상 못한 게 아니기에 유성원은 그들을 지키기 위해 진작 천검군과 기사들을 파견해 두었다.
쫄아붙은 경비 대신 앞으로 나와 그들을 향해 선포하는 청색과 백색의 갑주를 입은 천검군의 정예병이었다.
“뭐냐? 이방인 주제에!”
“이방인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건 성좌 종말자를 이 ‘별’에서 몰아낸 유성원 헌터님의 명령이다. 그분은 너희의 신들이 도망친 상대인 그 성좌 종말자를 이긴 분. 너희 말대로라면 그분이 너희 ‘신’들보다 위에 있는 분이다. 그러니 그분 말대로 하고 썩 나가라. 아니면 싸우든지.”
“으으윽!”
천검군 정예병의 말에 브라만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 말대로 신격을 논하자니 클래스 차이가 났고, 그렇다고 억지를 부리며 무력을 쓰자니 상대 세력은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몰라도 성좌 종말자를 쓰러뜨린 자들이다.
결국 그는 분해하면서도 휘하의 크샤트리아들을 데리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고, 올 때 탔던 비행기를 타고서 그대로 인도를 떠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