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상륙 완료. 진군을 계속하라. 목표 수행을 위해서 이동 중계기 설치 허가가 났다. ‘코어 던전’ 근처 공장에서 나오는 종말기병들을 재배치. 넓은 영토를 빠르게 점령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이동. 계약에 준거하여 전투 능력이 없는 인간은 우선순위에서 배제.]
상륙한 ‘종말기장 Σ(Sigma)’는 배에서 내리는 골렘들에게 명령을 전송. 자신도 다시 움직이면서 진군에 나섰고, 동시에 ‘마정석 생산 공장’ 설치와 원활한 병력 추가를 위한 ‘이동 중계기’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동 중계기’는 말 그대로 차원문 같은 것으로, 호주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한 병력들을 즉시 옮길 수 있는 기계였는데 편리하다 못해 이게 있으면 세계 어느 곳이든 성좌 종말자의 병력을 이송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막대하게 소모하는 에너지 양이 문제였다.
[마정석 절약을 위해서 전투의 핵심인 ‘종말기병’들과 ‘종말기장’만 전송. 잔여 골렘 및 인력은 현장에서 생산하겠음. 그리고 본 기체는 대규모 위협이 있기 전까지 다시 정전 상태로 돌아가겠음.]
보고를 마친 ‘종말기장 Σ(Sigma)’는 다시 엔진을 끄고 침묵 모드에 들어갔다.
성좌 종말자는 ‘별’의 생명을 빨아들여 마정석을 만들지만, 소모가 많으면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최대한 마정석을 많이 남기기 위해 에너지 절약을 기본으로 강조하곤 했다.
“다, 다들 도망쳐어어!”
“으아아아!”
하나 이미 그의 역할은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좌가 떠난 이 땅은 이제 더 이상 저항할 의지를 상실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강철과 돌로 이루어진 골렘과 소환된 ‘종말기병’들은 인도 남부의 마을과 도시를 점령하며 계속 전진해 나갔고, 곳곳에 설치된 이동 중계기에서도 계속해서 보충되며 ‘별’의 생명을 빨아들이기 위한 공장들이 속속 세워졌다.
***
같은 시각, 인도 뭄바이 신전.
한참 육로의 방어에 대한 전략을 짜고 있는데, 남쪽 해안으로 성좌 종말자의 세력이 상륙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참여하고 있던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 그것보다 더욱 경악할 소식이 남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성좌 아이야나르 님이… 도시와 신도를 버리셨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성좌 종말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뭐라… 고? 그, 그게 사실인가? 아니, 대체 그게 무슨…….”
“사실입니다. 진실 여부에 대해선 모르지만, 통신으로 브라만님께서 자신이 모시는 신에 대한 모독과 부정을 가득 담아도 벌을 받지 않은 걸 보면 이미 성좌 아이야나르 님은 이 ‘별’을 떠나신 거나 다름없어 보입니다.”
“아니…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진짜입니다. 우리 성좌님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인도 남부가 함락되었다는 소식보다도 더 충격적인 소식.
망치로 머리를 후려친 것보다 더한 충격을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들은 받았다.
성좌가 인간을 버리고 떠나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직접 들어도 납득이 안 되는 소리였지만 소식을 전한 이가 신에 대한 맹세까지 말하자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모릅니다. 다만 수많은 피난민들과 축복을 잃어버린 자들이 지금 북쪽으로 대이동하고 있습니다. 그 숫자는… 거의 수백만…….”
“이런… 맙소사.”
성좌 종말자의 공세도 무서웠지만, 삶의 터전을 잃고 몰려오는 사람들도 엄청난 문제였다.
성좌의 지배로 나누어진 영역과 신성 전쟁으로 잡힌 질서 속에서 문명 발전의 시간은 뒤로 돌아갔고, 이런 사태를 미리 예견하거나 대비한 인간은 거의 없었다.
아니, 있더라도 수백만 명이 피난 올 것을 예상하고 대비해 두는 건 경제적으로 큰 문제였다.
“이… 이를 어찌해야? 오, 신이시여… 우리의 신 인드라시여, 이를 어찌하면…….”
[‘성좌 인드라’가 ‘이거 망했네. 알아서들 해라.’라고 말하며 이 ‘별’을 떠나기로 합니다.]
하나 ‘신’에게 간절히 비는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방금 전 들었던 성좌 아이야나르처럼 이 별을 떠난다는 성좌 인드라의 소식. 브라만들과 크샤트리아들은 동시에 힘이 쭈욱 빠지기 시작했다.
한창 전선과 전투를 준비하던 크샤트리아, 아이라바타 도 역시 갑자기 날아온 성좌의 상태창 메시지와 함께 빠지는 힘을 느끼고 경악하며 절규했다.
“아니, 아니…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힘이… 아니, 우리 스킬이… 신이시여!”
“신이시여어어어!”
절규하며 신을 찾아보지만, 그들의 성좌는 더 이상 답해 주지 않았다.
유성원이 알았던 진실대로 그들은 그저 이 ‘별’에서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과 익숙한 신격의 이름만 빌려 썼을 뿐, 진짜 이곳 인간들이 섬기던 신 인드라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성좌는 그냥 이 ‘별’에서 인간들과 잠시 놀던 것뿐, 무언가 뚜렷한 목적이나 책임감 따위는 없는 존재였다.
개나 고양이를 가족만큼 사랑하고 인생의 동반자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잠시 갖고 노는, 살아 있는 장난감처럼 생각하는 자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서 승천시키는 성좌가 있는가 하면 버릴 타이밍이 생기면 가차 없이 버리는 성좌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안 돼! 안 돼에에에에!”
“브라만이시여! 정신 차리십시오. 당장 대책과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으아아아아!”
“브라만이시여! 가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카스트 제도하에 선택받은 사회 지도층들은 성좌의 가호와 목소리가 사라지자 그 충격에 다들 미친 듯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절규하며 신전을 뛰쳐나가서 어디론가 떠났고, 누구는 울부짖으면서 기도하고 있었으며 또 누군가는 갑자기 칼로 자신의 목을 찌르는 등, 지금 사태에 대한 대응책은 누구도 내지 않고 광란에 빠져 있었다.
“이런… 젠장할!”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여보! 나야! 애들은 어딨어? 지금 큰일 났어. 빨리 도망쳐야 해.”
브라만들이 정신이 나갔다면 그다음 집권 계층인 크샤트리아들이 정신을 차리고서 이 흔들리는 상황을 부여잡고 해결해 나가거나 조직을 운영해야 했지만, 그들도 성좌의 힘이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더 무언가를 할 용기라곤 전혀 없었다.
일반 군인들로 이루어진 크샤트리아들은 성좌가 사라진 것을 모른 채 각성자인 크샤트리아들이 위에 있기에 지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 각성자로서 힘이 사라진 크샤트리아들은 모두 도망칠 계획을 세우거나 이미 빠져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뭐야? 일이 어떻게 되는 거야?”
“갑자기 시끄럽네. 크샤트리아님의 동네는…….”
“무슨 행사라도 하는 건가? 아, 그러고 보니 동남아 쪽에서 성좌 종말자 님의 군대가 올라온다고 했는데 그거 때문인가?”
웅성웅성…….
광란에 빠진 브라만, 힘을 잃은 크샤트리아들의 대탈주가 시작된 상황이었지만 남은 사람들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신전을 중심으로 카스트 제도에 따라 계층별로 구역이 분리되어 있을뿐더러, 하위 계급이 상위 계급 영역으로 무단 침범할 시 엄벌에 처한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와도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정확히 알기가 힘들었다.
“근데 어디로 도망치죠? 적어도 비슷한 문화권으로 가야 할 텐데…….”
“몰라! 일단 인도를 뜬다! 성좌님도 포기한 마당인데 뭘 더 하겠어? 빨리 도망쳐! 돈이나 귀금속은 있는 대로 챙기고!”
“예!”
성좌의 이탈도 계속해서 늘어나는 판국이라 각 도시의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들은 항공편, 배편, 육로를 사용해서 재산과 가족만 챙겨서 모조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럼 자연스럽게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군인들과 하위 계층들은 이제 위아래에서 오는 성좌 종말자의 군대를 맞이하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
한국, 아이언 포트리스.
성좌 종말자와 거래를 했지만 현재 공식적으로는 성좌 종말자의 코어 던전 공략을 준비 중인 유성원은 혹시 다른 일이 생길까 봐 미리 인도에 기사들 몇 명을 보내 두어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보고받는 중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인도에 있는 성좌들의 이탈과 수뇌부의 붕괴로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인도의 상황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그 잘난 브라만이랑 크샤트리아가 죄다 도망을 갔다, 이 말이지?”
“예, 단장님. 확실합니다.”
“…나 어디부터 충격 먹어야 하냐? 하아아~ 이게 말이 되나?”
“듣기론 ‘성좌’가 먼저 이 ‘별’을 손절했다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야… 그분들에겐 게임장이나 노래방 하나 떠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물론 이 비유는 성좌 종말자같이 진짜로 이 ‘별’에서 뭘 얻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케이스는 제외였다.
그들은 어차피 세력비라든가, 능력의 차이 때문에 가망이 없으니 적당히 ‘신’으로서 놀다 간다는 의미.
결국 불쌍하게 된 건 인도였고, 상류층이 붕괴되었으니 앞날은 매우 어둡기 짝이 없었다.
“아무튼… 사람들은 아주 제대로 ‘신’에게 실망하겠군. 심지어 그 잘난 브라만과 크샤트리아가 죄다 도망쳤으니 이제 진짜로 카스트의 ‘카’도 언급 못하겠군. 그래서, 성좌 종말자 측은 어때?”
“그건 두고 봐야 알겠습니다만, 일단 ‘성좌 종말자’의 군대는 계속해서 골렘들을 진격시킬 뿐만 아니라 무슨 차원문 같은 기계까지 설치해서 마치 세균이 퍼져 나가듯 인도 주요 도시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멸망급이니까… 그 정도 기술은 가지고 있겠지. 나 걔네 무기 보는데 SF 영화인 줄 알았다니까……. 한 놈은 무슨 광선검도 꺼내더라.”
골렘과 기계들로 이루어진 모습에서 예상했어야 했지만, 주력인 ‘종말기장’들의 무장은 전부 SF 메카닉 영화에서나 볼 법한 것들이었다.
그 하위인 종말기병들 또한 위력만 낮을 뿐이지, 기술력으로는 만만치 않은 무장들을 쓰면서 방해꾼들을 제거하는데, 이제 인도에 있던 ‘성좌’들이 모두 도망가고 일반 군대만 남았으니 그것들은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골렘으로만 상대해도 충분할 터였다.
“아마 약속 시간까지 인도 정복은 시간문제이겠군. 국경 쪽에 임시 대피소를 건설하는 걸로 작전을 바꿔야겠어. 중국 공산당이랑 파키스탄에 이야기해 놔야겠네.”
“괜찮으시겠습니까? 믿을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어쩌겠어. 파키스탄 한 방향으로만 사람이 몰리지 않잖아. 또 사람들 전부한테 인도 최북단인 카시미르로 모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국경이 닿는 나라엔 일단 모조리 말해 놔야지.”
어떻게 보면 자신이 이 일을 부른 주범이기에 인도주의적인 배려와 지원은 당연히 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하나 위안이 되는 것은 이제 인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신’은 사라질 것이고, 카스트라는 제도는 금기를 넘어 분노의 상징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위기의 순간 ‘신’이 자신들을 버리고 사라지는 일을 겪은 인간들이 어떻게 다시 ‘신’을 믿겠는가?
‘어쩌면 이 일의 파장은 더 클 수도…….’
“단장님, 그리고 추가 정보입니다만 ‘성좌 진황’이 갑자기 정령과 괴물들을 모아서 남하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방향을 보면 여지없이 인도 쪽으로 오고 있구요.”
“…성좌 진황이?”
성좌 진황. 중국 서쪽에 위치하여 중국을 4등분하는 데 일조한 성좌다.
환경 친화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정령과 야생 괴물들의 연합으로, 산업화와 자본주의로 인해 과도하게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중국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곳이었다.
다만 그들이 내민 환경 기준 및 자연 보호 정책만 지킨다면 공격 대상이 아니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아……! 올 만하구나.”
그렇게 보면 성좌 종말자는 성좌 진황과 완전 상극에 있는 존재였다.
골렘과 기계들을 움직여 ‘별’의 생명을 빨아들여서 마정석으로 만드는 자들. ‘별’을 황폐한 죽음의 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욕망으로 인해 대지를 죽음으로 몬다는 점에서 최악의 환경오염, 그것도 생명의 종말을 부르는 성좌 종말자는 성좌 진황의 숙적이나 다름없었다.
“판이… 커지네.”
멸망급인 성좌 종말자에는 비견되지 않지만, 그래도 성좌 진황도 나름 성좌 용봉왕이 제압하지 않고 우호적인 관계로 돌릴 정도로 강한 세력이었다.
그 둘이 격돌하게 되었으니 판이 커지는 동시에 인도의 점령에 대한 계약이 궁금해졌다.
유성원은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리며 계속해서 ‘코어 던전’ 공략을 준비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