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다음 날.
‘성좌 인드라’의 도시 ‘콜카타’ 외곽 ‘신성 전쟁터’.
규모가 작은 성좌들 간의 싸움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성좌들의 이름이 걸린 신성 전쟁인 만큼 폐허가 된 작은 도시 하나를 통째로 전투 필드로 사용하고 있었다.
무너지거나 오래되어 허름해진 빌딩과 부서진 도로, 콘크리트 잔해물이 어지럽게 널려진 이 싸움터는 한두 번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신성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대체 얼마나 많이 싸웠던 것일까? 유성원은 그리 생각하며 성좌 바유 측 대기 장소에서 무장을 한 채로 무릎 꿇고 앉아서 대기 중이었다.
‘…빨리 싸웠으면 하는데, 뭔 의식을 저리 많이 하는 건지.’
도시 정중앙의 하늘엔 작은 섬 하나가 떠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신전에 현재 브라만 계급들이 모여서 이상한 기도문을 외우고 축사를 하는 등등, 그래도 신성 전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온갖 의식들을 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크샤트리아들은 주변에 떠다니는 섬에서 신성 전쟁을 참관, 그 외의 계급은 지상의 도시 외곽에 이리저리 모여서 관람하는 형태였다.
‘죄다 신분대로인가? 후우~ 불쾌한 건 맞지만, 일단 지금 목적은 그런 게 아니니까 참자.’
지금은 싸워야 하는 만큼 유성원은 정신을 차리고 슬쩍 멀리 있는 상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상대인 A급 헌터이자 크샤트리아로 훤칠한 키에 그을린 피부를 가진 남성이었는데, 반나체 차림에 금강저를 2개 허리에 차고서 진중한 표정으로 자신처럼 대기 중이었다.
‘금강저인가? 근데… 저걸로 어떻게 싸우는 거지? 마법사 스타일인가? 아니면 격투가 스타일인가? 종잡을 수가 없네. 인도 영화 같은 거 좀 봐 둘 걸 그랬나? 아무튼 나도 비장의 수가 있는 척 무기를 꽂아 두고 맨손으로 싸우기로 했는데…….’
[…이에 양측의 명예를 건 ‘신성 전투’가 시작됩니다. ‘성좌 인드라’ 님 측은 사도이자 크샤트리아 ‘아니루드 바쥬’, 그리고 ‘성좌 바유’ 님 측에선 외국인 용병, 크샤트리아 기사 ‘레드’. 양 선수, 이제 일어나서 전투를 시작해 주십시오!]
“아, 예의 차리느라 무릎 꿇고 있는 거 더럽게 힘들었네. 가 볼까?”
뚜둑! 뚜둑!
드디어 일어날 수 있게 된 유성원은 몸을 풀며 앞을 응시했다.
아니루드 바쥬 또한 몸을 풀고서 서로 잠깐 시선을 마주한 다음 곧장 무기를 쥐고 달려 나갔다.
유성원도 맨손 상태로 건물을 오가며 그에게 달려갔는데, 상대인 아니루드 바쥬는 그런 유성원을 보며 생각했다.
‘흠, 다 망한 성좌 세력이 급하게 고용한 용병치곤 상태가 좋군. 어쩌면 진짜 S급을 구해 온 걸 수도?’
아니루드 바쥬는 A급 각성자로 성좌 인드라의 가호를 받은 각종 번개 마법과 체술을 사용하는 전투 주술사였는데, 더 큰 공훈을 세우기 위해 이번 결투에 뛰어들었다.
S급으로의 승격을 바라는 그는 이번에 반드시 승리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왔지만, 상대가 예상보다 강해 보이자 속으로 난감해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성좌 바유 님의 세력은 이미 쇠락한 지 오래야. 기껏해야 A급에 축복이나 가호 몇 개 줘서 도금질한 거겠지. 지금 성좌 바유의 세력으로는 무리다. 설사 진짜 S급이어도… 그 대우로 올 놈이라면 그렇게 강하지 않을 거다. 좋았어! 보였다! 인드라시여, 날 봐 주시옵소서!’
파지지직!
푸른 뇌전을 띄운 채로 아니루드 바쥬는 곧장 붉은 갑옷을 향해서 돌진, 같은 A급이라면 절대 질 리 없다는 자신감을 다시 한 번 더 단단히 다지고 마주 달려오는 유성원을 향해 금강저를 쥔 손을 내질렀다.
“뇌격권(雷擊拳)! 하아앗!”
뇌전을 머금은 주먹으로 난타를 가하는 아니루드 바쥬.
번개가 잔상을 남기면서 푸른빛으로 번쩍였고, 푸른 맹수가 붉은 갑옷을 입은 유성원을 잡아먹을 듯 압도적으로 덮치는 형세였다.
하나 유성원은 그 거친 맹수의 공격에도 일절 이동하지 않고 뇌격을 담은 주먹을 모조리 받아 내고 있었다.
‘너무… 느린걸? 이게 A급?’
“하아아앗! 차앗! 뇌질주, 뇌연권!”
‘게다가 심지어 속성 공격인데… 뇌전 대책을 안 해 왔을 거라고 생각하나? 읏챠…….’
파지직!
물리적인 주먹 공격은 무예의 차이로 피했지만 그래도 그의 금강저에 흐르는 뇌전이 마치 채찍처럼 유성원을 때려 대고 있었다.
인드라의 가호 덕분에 그 힘을 느끼는 아니루드 바쥬는 유성원이 움찔거리기 시작하자 기세를 올렸다.
“하하핫! 맛이 어떠냐? 성좌 인드라의 가호가 깃든 뇌전이다! 몸 쓰는 솜씨가 좋아서 주먹을 피하더라도 이 뇌전의 힘에는 옴짝달싹 못하겠지. 하하하핫!”
‘…훈련 목적만 아니었으면 그냥 대가리 깨 버리는 건데…….’
물론 유성원은 그 공격은 물론 곁다리로 따라오는 뇌전에도 전혀 데미지를 입지 않고 있었다.
이미 보고서를 받았을 때, 상대 세력과 나오는 선수를 보고 어떤 능력을 가지고 힘을 쓸지 예상하고 있었기에 준비한 것이었다.
‘폐하께서 주문하신 전기 절연 내의입니다. 소재는 케블라, 합성 고무, 미스릴 실로 되어 있어 유연성, 가벼움을 모두 챙겼으며 전기 감전과 뇌전 공격을 막아 줄 뿐만 아니라 마력에 대한 저항력도 올려 주는 상품입니다. 자금성 내에 있는 장인들에게 특별 주문해서 3시간 만에 완성했습니다. 이런 임무를 주신 것에 대해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폐하.’
‘빨리 가져다줘서 고맙긴 한데, 너희는 폐하라고 하지 말랬잖아.’
정말 시키는 일은 더럽게 잘하는 중국이었다.
아이언 포트리스나 전선 도시였다면 이렇게 빨리 가져다주지 못했을 것이다.
전날 밤에 이야기해 놓으니 고작 몇 시간 뒤, 아침에 완성품을 가져다주는 것. 성좌 용봉왕 밑에서 지시한 일 하나만큼은 철저히 해 오던 자들인지라 실행력 하나는 끝내줬다.
‘애초에 나는 그냥… 오늘 쓰는 게 아니라 이 성좌 세력과 싸울 때를 대비하려고 했는데… 정말 말은 잘 들어요.’
“하아앗! 에잇!”
그렇게 생각하며 유성원은 노 데미지 상태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거나 막으면서 한계를 끌어내는 훈련을 계속하는 동시에 자신도 뻔한 공격을 내지르거나 고의로 주먹에 맞아 주는 등등… 철저히 비등비등한 싸움을 연출해 나갔다.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지만 굳이 비등비등한 장면을 연출하는 이유는 성좌 바유의 사정과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한 연막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 신성 전쟁의 도박판을 위한 것이었다.
‘원래 도박판도 다크호스 같은 게 나오면 갑자기 주목받고 해서 말이지.’
“하하핫! 그 정도 공격으론 어림도 없다!”
‘이 녀석한텐 좀 미안하지만 사명을 위해선 괜찮다고 하니까… 그리고…….’
애초에 자신의 기량은 스킬에 의한 것이고 싸움에 있어선 늘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만큼 이번 기회를 이용해 많은 싸움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근 몇 년간 헌터 생활을 해 왔지만 유성원은 늘 압도적인 힘과 무구로 상대를 짓눌렀기에 지속적인 교전과 또 전투를 보고 읽는 눈이 부족했다.
‘소용없는 거 아니야? 무재가 다 하잖아.’
‘거기에 물을 준다고 생각하십시오. 폐하의 스테이터스가 좋아지면 자연히 티탄의 말뚝의 위력이 올라가잖습니까? 곱셈의 원리와 같죠. 뒤의 지수를 올려도 되지만 앞의 지수를 올려도 됩니다. 결국 육체, 감각은 폐하의 것이니까요.’
‘…라곤 하는데… 어차피 해야 할 지겨운 연기니까 상관없겠지.’
“젠장! 이방인에다 급히 고용되었다고 하기에 별거 없을 줄 알았는데, 꽤나 제법이군. 인드라시여! 나에게 힘을 주소서! 하아아아아아!”
‘온다. 본래의 나라면 도망치거나 아예 피해 버렸겠지만… 이걸 당당히 맞서는 게 훈련이었지.’
“뇌전신파격!”
콰르르릉!
거창한 이름과 함께 낙뢰가 유성원에게 떨어지면서 동시에 전신에 뇌전을 머금은 아니루드 바쥬가 돌진해 왔다.
뇌전의 2연격. 그리고 그것에 가격당한 유성원은 그대로 땅을 구르면서 널브러졌고, 아니루드 바쥬는 뇌전의 잔상을 남긴 채 폐허의 중심에 있는 건물 위에 당당히 섰다.
그것을 공중에서 보는 성좌 인드라의 브라만들은 흡족한 웃음을 띠며 옆에서 불안해하는 성좌 바유의 브라만에게 말했다.
“허허허, 역시 아니루드 바쥬답군. A급이지만 S급에 비견되는 기라성 같은 인재야. 승부는 난 것 같은데 말입니다, 바유 님의 브라만이시여?”
“…예. 승부가 났네요. 하지만 승자는 다른 것 같은데요?”
“뭐? 아, 아니?”
쿵!
한껏 뻐기던 성좌 인드라의 브라만이 고개를 돌려 다시 땅을 바라본 순간, 건물 위에 서 있던 아니루드 바쥬는 땅에 추락한 채 엎드려 있었고, 그 옆에선 유성원이 당당히 주먹을 쥐고 서 있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봐! 아니루드 바쥬! 뭐 해? 일어서! 일어서라고!”
“승부가 났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신성 전쟁은 우리 성좌 바유 님 측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고로 조건으로 걸었던 도시와 백성들의 소유권은 이제 저희 것입니다. 신의 앞에 맹세한 것 아닙니까?”
“…알겠소. 멍청한 녀석, 내가 그렇게 방심하지 말라고 했는데… 돌아가면 설교를 해야겠군.”
얻고 잃는 것은 결국 성좌였지만 브라만들은 그 사도 중 핵심 인물들이었기에 신성 전쟁에서 패배한 것에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성좌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전쟁이었기에 패자 측은 승자 측에서 건 보상을 깨끗하게 줘야만 했다.
성좌 바유의 브라만은 승리의 보상인 토지와 거주 백성들을 받는다는 내용의 서류를 들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신성 전쟁마저 졌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그 허름한 촌구석마저도 잃었을 테니 말이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이트 레드 님. 덕분에 벼랑 끝에서 구원받은 기분입니다.”
“아뇨. 별말씀을. 돈 받은 만큼 일하는 건 당연하죠. 대가나 깔끔하게 주십시오.”
“예. 그럴 생각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정말로 사람을 크게 놀래 주시더군요. 건물 위에 서 있던 성좌 인드라 님의 사도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저희가 패배한 줄 알았습니다.”
‘뭐, 일부러 그렇게 연출한 거지만 말이지. 큰 기술이 올 때 카운터를 넣고, 휩쓸려서 쓰러지는 연기하느라 힘들었네.’
아슬아슬하게 이긴 것으로 보이기 위해서 약간 아크로바틱한 모험을 한 유성원이었다.
결과는 완벽히 성공. 성좌 바유의 사도도 눈치 못 챈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니 잘 먹혀 들어간 것 같았다.
그렇기에 능청스럽게 몸을 털며 말했다.
“상대가 그만큼 만만치 않았다는 거죠. 아무튼 도시랑 백성들을 받았으면 계약은 여기서 끝난 것 같은데… 이제 보상만 받고 가면 되겠군요.”
계약은 어디까지나 이번 신성 전쟁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성좌 바유 쪽은 이번에 망하면 그냥 국외로 도망쳐야 하는 신세나 다름없었기에 다음에 또 신성 전쟁을 치르기 위해선 새로이 계약을 해야만 했다.
“그것에 대해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만…….”
“아, 계약 연장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예. 이번 신성 전쟁으로 새로운 땅과 백성을 얻었지만 저희 쪽엔 아직 ‘크샤트리아 계급’이 충원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조금 더 나은 대우를 해 드릴 테니 추가로 계약을 해 주시는 건 어떨는지요?”
‘좋았어. 계획대로다.’
압도적으로 강하게 짓밟았다면 도저히 하지 못했을 제안일 테지만, 오늘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장면을 연출한 덕분에 더 큰 부담을 품지 않고 연장을 제안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평소 실력대로 압도적으로 이겼다면 이쪽이 역으로 추가적인 비용을 계산하느라 머리가 아팠을 거고, 혹은 유성원이 그냥 돈만 벌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닐 거라는 의심을 품었을 터였다.
“대가만 준다면 일을 하는 게 용병의 생리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휴~ 다행입니다. 기껏 이겼는데 또 금방 날릴까 봐 걱정이 되었는데… 강한 전사분이 함께해 주신다니 정말 든든합니다.”
‘…고생이 많으시구먼.’
마치 도박 중독에 빠진 아들을 둔 어머니처럼 심려가 컸는지, 그녀는 유성원의 계약 연장에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성좌 바유의 세력과의 계약은 연장이 되고, 그들과 깊은 관계를 이루어 무난히 협력을 얻어 낸다는 계획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