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보자… 상대는 성좌 인드라의 크샤트리아 중 하나군요. 추정 등급은… A급? 허어~ 저는 분명 S급이라고 했을 텐데요.”
“예. 그렇지만 지금 저희의 신 바유 님께서는 연이은 패배로 상당히 얕보이셨는지라 S급 헌터를 데려오는 것도 허세라 여겨지고 있고, 또 인드라 님의 크샤트리아 중에서 이제 공을 세워 S급으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이도 있어서…….”
“아… 대충 알겠네요.”
S급 대전으로 신청했지만 성좌 바유가 워낙 패배를 많이 한 데다 다혈질인 점 때문에 얕보인 것이었다.
거기에 성좌 인드라도 성좌 바유 측이 외부에서 크샤트리아를 고용해 온다고 해도 S급은 고사하고 A급도 고용하기 힘들다는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자신들이 가진 A급 크샤트리아를 내보내기로 한 것이다.
“한데… 이제 제가 왔다는 것을 알아챘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A급 크샤트리아를 그대로 유지한다고 했습니다. 아마… 저희가 진짜 S급을 고용한 것이 아니라 바유 님의… 허세라고 생각하는 거겠죠.”
‘그렇다는 건… 우리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거군. 정말 철두철미하게 준비하길 잘했어.’
신적 존재인 성좌의 시선을 피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닌 만큼 그녀의 말은 유성원을 안심시켰다.
이번 인도행을 위해서 엄청나게 준비한 덕이기도 했다.
행적을 감추기 위해 평소 애용하던 모든 스테이터스를 2배로 해 주는 금빛 신수의 갑옷을 벗어 던지고, 또 일부러 다른 성좌의 소속이 입을 수 있는 갑옷까지 별도로 준비했던 것이다.
‘사실 진짜로 속이는 개념은 아니지만…….’
[캬응~ 그러니까 다른 ‘성좌’님의 눈을 속이고 싶다 이 말씀이시죠? 으음~ 그런 무구가 전혀 없진 않죠. 물론 정확히는 ‘속인다.’가 아니라 ‘속아야 한다.’, ‘모른 척해야 한다.’는 ‘법칙’이 담긴 아이템이지만요.]
이 ‘별’의 게임판에서 전지전능한 ‘성좌’의 눈을 속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게임판’으로 취급되며 인간들이 그 ‘말’로서 활약하는 만큼 알면서도 ‘묵인’하거나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은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규칙’이 담긴 아이템을 착용한 것이었다.
[그러는 손님에겐 캬흥! 여기 이 ‘살아 있는 붉은 안개의 갑옷’을 추천드리겠습니다. 입고 계신 그 갑옷보다 성능은 현격히 떨어지지만, 이 갑옷은 착용자를 ‘도살왕’ 님의 권능으로 가려 그분의 부하로 판정되게 해 줍니다.]
‘벗으면 적용이 안 되나?’
[캬랑! 그럴 리가요. 그런 거였으면 추천도 하지 않았죠. 파괴되기 전에는 한번 입으시면 옵션이 그대로 남아서 다르게 보이게 될 거예요. ‘살아 있는 붉은 안개’라고 하는 악마가 기생하는 형태거든요. 물론 다른 해는 없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컁!]
성좌의 상점엔 역시 없는 게 없었다.
그렇게 모습을 ‘감춘’ 것으로 판정이 되는 아이템 덕에 무사히 회담을 마친 유성원은 그대로 성좌 바유의 신전에 도달하여 차량에서 내렸다.
하늘에서 본 그 신전과는 달리 아주 작은 규모의 신전이었다.
그리고 밖에는 마찬가지로 계급별로 사는 구획을 정해 둔 건지 구역이 나뉘어 있어 작은 규모라도 결국 법칙은 같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겠지.’
“그럼 절 따라오십시오.”
“예이~”
안내를 받으면서 신전 내의 풍경을 이리저리 감상하는데, 정말 성좌 바유가 자산을 날려 먹은 건지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청소부 몇 명과 인부 몇 명이 고작이며 무장을 한 사람은 아까 그 경호원 말고는 일절 없었다.
“상황이 심각하긴 한가 보군요.”
“예. 이미 크샤트리아는 단 한 명도 없고, 바이샤도 성좌님에게 학을 떼서인지 거의 다 떠난 상태입니다. 그나마 수드라와 찬달라는 약 400명 정도 남아 있어서 어찌어찌 꾸려 나가고는 있습니다만, 결국 다스릴 브라만이 저뿐이라서 질서가 많이 어지럽기도 합니다.”
“흠…….”
“여기 크샤트리아 구역에 있는 저택의 열쇠입니다. 위치는 나이트 레드 님의 단말기에 전송해 두었습니다. 시중들 인원을 보내 드릴 터이니 편히 쉬시면 됩니다.”
“아뇨. 시중들 인원까진 필요 없습니다. 저희끼리 얌전히 쉬고 내일 뵙지요.”
결국 열쇠를 받고, 자신들이 묵을 크샤트리아 거주구로 걸어서 향하는 유성원.
인기척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작은 저택들이 모여 있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성좌 바유의 크샤트리아인들은 모두 신성 전쟁으로 팔려 가거나 다른 곳에서 죽었기에 유령 도시 같은 전경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멀쩡한 집이네. 게다가 훈련장도 개개인 주택별로 딸려 있고, 저 옆의 것들과 차이도 크고 말이야.”
몰락한 성좌 세력이라도 크샤트리아는 핵심 계급인 만큼 나름 대우해 주려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물론 바이샤의 영역은 싹 비었고, 그 옆 수드라의 집은 성냥갑 같은 조악한 주택. 그 옆쪽 멀리 보이는 찬달라의 영역은 아예 텐트로 된 거주 주택이었다.
“정말… 우리 기준에선 끔찍한 동네야.”
“그러게 고만고만한 것들끼리 뭐가 그렇게 차이 난다고 우열을 나누는지. 배 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말이야.”
“뭔가 의미가 다른 것 같지만, 아무튼 짐 풀고 밥이나 먹자.”
“아, 인육 먹고 싶다아. 이 목사가 해 줬던 로스트 휴먼 고기가 엄청 맛있었는데…….”
“마정석이나 빨아.”
징징대는 레그혼의 말을 무시한 채 유성원은 짐을 풀고 한국에서 챙겨 온 식량을 꺼내어 먹기 시작했다.
혹시 종교적 문제나 충돌이 생길까 봐 철저히 콩과 밀 및 야채 분말로만 압축해서 만든 에너지바를 들고 왔는데, 맛은 거의 없었지만 칼로리는 높고 영양소는 다양하게 들어 있는 물건이었다.
이 미지의 땅에선 사소한 것 하나라도 조심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유성원은 1분 만에 에너지바를 물과 함께 삼키고는 식사를 끝냈다.
“아, 배부르다.”
“말에 영혼이 전혀 없구나.”
“그래. 마음 같아선 나도 컵라면에 김치 곁들여서 밥까지 말아 먹고 싶지만 참는 거야. 그나저나 더럽게 심심한 동네네.”
문명화된 시대를 넘어 마정석과 마법까지 등장해서 기술력의 발전이 더더욱 초월적으로 올라간 바깥 세계와 달리 이곳은 마치 수백 년 전의 마을로 타임 슬립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성좌 바유의 영역이 특히 낙후된 곳일지도 모르지만, 먼 곳을 바라봐도 해가 저물 때쯤인데 도시의 빛 같은 것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성좌 용봉왕은 그래도 국가나 문명의 발전은 신경 썼는데 말이지. 여기는 와… 무슨 원시 사회도 아니고…….”
“그야 여기 있는 성좌 놈들은 그냥 노는 기분으로 모여서 사는 놈들이니 그렇지.”
“그게… 무슨 의미냐?”
“말 그대로다. 카스트 제도라는 것의 의미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거… 이 ‘별’에 있던 문화 그대로지? 딱 봐도 써먹기 좋아서 그냥 쓰고 있는 거야. 아까 공항에서 나와서 도시를 잠깐 살펴봤는데… 여기랑 구조 거의 비슷했지?”
“뭐, 그랬었지.”
그냥 기본 인프라와 세력의 차이로 인해서 시설의 더 좋고 나쁨의 차이였을 뿐, 확실히 도시 구조는 중심에 신전을 두고 동쪽부터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찬달라의 영역으로 나뉘는 건 똑같았다.
“우리가 섬기는 도살왕 님도 그렇지만, 성좌라는 분들이 이렇게 똑같은 도시를 그대로 두는 걸 원하리라 생각하나? 게다가 밑의 애들 좋아하는 순서까지 똑같다고?”
“…어라? 그건… 그러네?”
카스트 제도라는 인도의 문화적 특성과 결합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지, 레그혼이 지적한 내용을 듣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성좌들은 어떤 의미로 말하면 개성이라는 것을 개념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인육을 좋아하는 악마들을 이끄는 성좌 도살왕, 인간을 오직 재능과 자질로만 파악하고 우열을 가리는 성좌 용봉왕.
그들은 서로가 선호하는 것을 인간들에게 그대로 결부시켜서 다스리거나 운영했고, 그것으로 ‘별’에서 전쟁을 치렀다.
“그러게. 이상하네. 확실히 카스트 제도가 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건데 성좌들이 그걸 따를 이유가 없을 텐데 말이야. 아니, 합의했어도 적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성향의 ‘인간’이 있을 텐데…….”
현실적으로 보면 카스트 제도라는 형식을 따르더라도 상인을 좋아하거나, 농민을 좋아하거나 하는 식으로 계급 구조를 살짝 바꿔 두는 개성을 가진 성좌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듣기로는 이 인도라는 국가권에 있는 성좌들은 모두 똑같이 카스트 제도를 따르고 있었다.
그 절대적 존재인 성좌들이 인간의 제도를 따른다니. 반대로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었다.
“뻔하지. 신성 전쟁이랍시고 그냥 땅따먹기나 하며 노는 놈들이야.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잉여 성좌라고 해야 할까? 패배자 같은 거지.”
“패배자? 잉여?”
“그래. 우리 성좌 도살왕 님이라든가, 다른 성좌님들은 나름 목표를 가지고 사도와 신도들을 이끌면서 나아가잖아. 이 목사처럼 우수한 성과를 낸 사도는 필멸자를 불멸자로 승천시켜 주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걸 하려면 역시 ‘힘’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그야 그렇겠지.”
“반대로 ‘힘’이 없는 성좌님들 같은 경우는 어떨까? 사도도 없거나 너무 적고, 그래서 자기 ‘별’을 지키는 게 한계인 분들 말이지. 이 ‘별’에서 벌이는 게임에 참여하기엔 세력이 너무 작고, 다른 참여한 성좌님들과 격차가 너무 벌어지는 걸 안다면?”
레그혼의 비유 덕분에 유성원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별’을 멸망시킬 만한 멸망급 세력을 가진 성좌가 있다면 그 반대로 야생 던전 레벨의 빈약한 성좌도 있을 수 있다.
분명 필멸자에 비하면 위대한 존재인 건 맞지만, 가진 세력이나 힘이 부족해서 이 ‘별’의 게임판에 그냥 참여만 한 채 노는 레벨의 성좌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건가?”
“그래. 어차피 바유라는 이름도 결국 자기 성향과 맞아서 사칭하기 위해 붙인 거지, 진짜 이 ‘별’에 내려오는 전승 신인 ‘바유’가 아닌 거 알잖아. 물론 일부러 착각하게 해서 신앙심을 북돋으려고 사용하는 거겠지만 말이지.”
“그러면 녀석들은 여기서…….”
“뭐긴, 신성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인간들을 갖고 노는 거지. 그러다가 다른 체급 강한 성좌가 오면 냉큼 도망치고 말이야. 그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게 아니야. 우리가 몇 개의 ‘별’에서 싸우고 다녔는데. 늘 보던 건데, 뭘~”
“…….”
레그혼에게 그 말을 들은 유성원은 뭔가 기분이 확 나빠져 버렸다.
그래도 지금까지 성좌라는 존재는 자신을 섬기는 이들을 버리지 않고 관리하거나 운명을 함께한다는 느낌을 조금은 받고 있었는데, 이곳의 성좌들은 그냥 대놓고 인간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니 살짝 울컥한 것이다.
“그런가…….”
확실히 신경을 썼다면 좀 더 개성이 묻어 나와야 했을 것이다.
유성원이 계속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자, 레그혼은 기분이 좋은지 피식 웃으면서 유성원에게 다가와 이죽거렸다.
“역시 화나나?”
“아니, 그냥 여기 사람들이 갑자기 불쌍해졌어. 그들은… 그런 진실을 모르잖아.”
“하! 어차피 말해 줘도 알아듣지도 못할 건데 무슨 상관!”
“그래서 더… 불쌍한 거야.”
과연 여기서 성좌들의 장난감으로 다뤄진다는 걸 알려 줘도 받아들일 사람이 있을까?
브라만, 크샤트리아야 당연히 권력층이고 자신들이 ‘카스트’의 상위에 있는 만큼 거부할 것이다.
그렇다고 바이샤, 수드라, 찬달라 같은 하위층이 이 진실을 알면 받아들일까?
그들 역시 성좌 용봉왕에게 다스려지던 중국처럼 익숙한 제도와 문화를 갑자기 바꿔야 한다면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참… 난감한 곳에 왔어.’
성좌 종말자를 상대하기 위한 세력을 얻기 위해서 온 인도의 실정을 보니 뭔가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유성원은 그 마음을 품은 채 내일 있을 신성 전쟁에 대비하여 일단은 쉬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