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이미지요? 최악이던데요?”
“…그 정도야?”
“예. 오죽하면 저, 성좌 용봉왕 나라의 중국인인 척하면서 한국을 욕해야 했습니다. 어딜 신성한 신들의 겨룸에 인간이 훼방을 놓느냐는 식으로 막 화내던데요?”
“와…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구나.”
인간의 역사 중에서 인간이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성좌의 시대가 된 이후 다시 신앙에 눈을 뜬 인간도 많았다.
그리고 그 신앙을 잘못되었다곤 할 수 없지만, 성좌를 이 지구에서 추방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유성원에겐 골 때리는 문제가 된 것이다.
“이거 보실래요? 그… 회의하는 거 모올래 찍어 온 겁니다.”
“어디…….”
『배교자! 배교자! 성좌님들의 거룩한 싸움을 망치려는 배교자!』
『대악당!』
『그래도 사악한 신을 없앤 공은 있지 않습니까?』
『그럼 용봉왕 님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문명에 취한 그 인간이 우리의 신들도 가만히 놔둘 거라 보장하는가?』
아칼론과의 연결 덕분에 외국어임에도 유성원에겐 영상 속의 대화가 곧바로 이해되고 있었다.
즉, 자신들은 성좌들의 뜻에 따르는 것이 맞음에도 유성원은 그 성좌에게 칼을 겨누고 쓰러뜨리는 사악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들을 본 유성원이 한숨을 푹 쉬면서 결국 인도 쪽과의 협력은 글렀다고 생각하고 포기할 때였다.
“하지만 그래도 방안이 있습니다, 대장님.”
“…방안이 있다고?”
“예. 그… 인도는 지금 봉건제적으로 성좌들이 영토와 시민들을 갈라 먹기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른바 전국 시대 같은 거죠. 그리고 그 안에선 크샤트리아라고 하는 전사, 병사 계급을 이제 ‘각성자’들이 차지하면서 서로의 신성을 드높이고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싸우는 중입니다.”
“뭐야, 그건 또……. 아무튼 그러면 보자… 나보고 대리 기사를 뛰라는 건가?”
“예. 아시다시피 모든 싸움이 이제 성좌의 헌터들로만 운영하는 게 아니게 되잖습니까? 하하하. 약소 성좌는 강한 헌터나 전사를 직접 고용하기도 하지요. 아마 올림푸스도 저기에 많은 인원을 파견했을 겁니다. 그러니 저희도 그렇게 해야겠지요.”
성좌들의 봉건 시대 같은 거라서 그런지 겨루는 것도 ‘기사’들을 이용해서 겨루는 것 같은 구조였기에 유성원은 기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납득이 되었다.
그 방안이라면 인도에 들어가서도 직접 특정 성좌와 손을 잡거나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대강 계획은 나왔지만 유성원은 하나 더 고려할 사안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잠시 머뭇거리더니 성소의 문을 열고 기사들을 불러내었다.
“자, 다들 집합. 각 그룹 대장급들만 잠깐 와 줄래? 중요한 질문이 있어서 말이야. 유청, 천군대장군, 가울프, 크록베인, 섬멸, 아칼론, 그리고… 프르제발스키까지~”
마지막은 살짝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일단 성기사였던 만큼 소환해서 물어볼 자격은 있었다.
그렇게 모두를 모은 유성원은 최충선과 했던 대화를 그들에게 들려주면서 중요한 것을 물어보았다.
“…이렇게 내가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인도에 가서 성좌 밑으로 들어가서 ‘대리 기사’로 뛰면서 세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 ‘기사도’에 어긋난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수하고, 아닌 사람은 그대로 손 유지해 줘.”
“…그걸 물어보자고 우릴 부른 겁니까?”
“이거 은근 중요하단 말이야. 내 특성 땜에!”
[푸히힝, 시대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긴 한데… 고금동서, 얼굴과 신분을 감추고 활약한 기사들의 사례는 많으니 문제없을 것 같다. 그 활동이 무고하고 약한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나 사명을 위한 것이라면… 뭐~]
프르제발스키가 능숙하게 말하자 다른 기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는 듯 거수하지 않았다.
사실상 전원 동의. 유성원은 아직도 긴가민가했지만 아무튼 성향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기사들이 전원 동의한 것을 보면 인도에 가는 것은 아무 문제없겠다는 생각이 들던 그 순간, 천군대장군이 손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오, 반대 의견이? 천군대장군, 어째서 아니라고 생각하지?”
[굳이 이름을 감추지 않고, 직접 군을 이끌고 정벌하시는 방법도 있습…….]
“…아니, 그건 기각. 우리가 지금 그렇게 대놓고 활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거든. 그런 거 했다가는 세계대전이 열린다고…….”
[그럼 더 좋은 거 아닙니까?]
“…….”
…….
당당한 천검대장군의 태도에 순간 어이가 없어진 유성원이었지만, 성좌 66천마의 수하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그는 태클을 걸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기사도에 정통한 이들이 인증한 만큼 이번 인도 참여 계획은 잠입하여 기사로서 활동하는 것으로 결정한 유성원이었다.
***
한 달 뒤.
인도, 콜카타(Kolkata).
예전엔 캘커타라 불렸던 이 도시는 인도 동부 서벵골주의 주도로, 도시권 인구만 약 1,500만에 달하는 인도 주요 도시 중 10위쯤에 속하는 곳이었다.
본래 도시엔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흔적인 영국식 건물이 남아 있었지만, 성좌의 시대를 거치면서 도시의 풍경은 상전벽해 수준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시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사원부터 시작해서 도시의 건물들은 마치 분리수거장처럼 구역이 칼같이 나뉘어 있었고, 나뉜 구역의 건물들은 빈부 격차와 용도가 아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듯 모양이 완전히 달랐다.
“내가 인도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도시 구역을 이렇게 딱딱 잘라 놓는 건 이상하지 않나?”
비행기를 타고 콜카타 공항으로 향하던 유성원은 꽃밭처럼 정리된 도시 풍경을 보며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현재 유성원은 평소 입던 황금 갑옷과 티탄의 말뚝이 아니라 화려한 불꽃 문양이 그려진 붉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둘 다 성좌 도살왕의 상점에서 구입한 영웅급 아이템으로, 신원을 위장하기 위해 현실적인 아이템을 두른 것이다.
“나한테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이냐? 흥! 내게는 그저 잘 분류해 놓은 식탁처럼 보이는데 말이지.”
“그냥 대화나 하자고 물어본 거야, 레그혼.”
“애초에 나한테 그런 걸 묻지를 마라. 너는 식빵이 어느 밀밭에서 만들어지는 것까지 궁금해하나?”
그리고 이번에 유성원을 수행하는 것은 바로 성좌 도살왕의 수하이자 아크데몬 비스트 중 하나였던 레그혼.
그는 현재 마력을 사용해서 붉은 장발을 늘어뜨린 선이 굵은 청년으로 변신하여 유성원을 따르는 중이었다.
다른 기사들도 있는데 굳이 그를 데려온 것은 이미 유성원의 명성이 세계적으로 퍼진 상황에서 주요 기사들의 신변 또한 정보국에 많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아~ 상대도 바보가 아니니까 천검군, 사령 군단, 직속 부대, 용봉왕 근위대 모두 신원을 파악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을 테니 말이야.’
물론 그 대상엔 유성원도 들어가지만 그나마 그는 엘드라엔이라는 용을 타거나 아이언 포트리스 지하로 빠져나가는 등등 동선과 행적을 감출 방법은 많았고, 황금 갑옷을 다른 기사에게 주고 던전을 들어가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속일 수 있었다.
“아… 배고프다. 어이, 뭐 먹을 거 없냐? 신선한 인육 같은 거라든가?”
“있겠냐? 그냥 마정석이나 빨아 먹어.”
“쳇! 성좌 도살왕 님 명만 아니었어도 이딴 짓거리는 하지도 않는 건데…….”
‘그냥 프르제발스키를 데려올 걸 그랬나? 하아~’
수행원이라고 데리고 왔지만 비협조적인 레그혼의 태도에 유성원은 머리가 아팠다.
인도로 가는 길에 다른 아크데몬 비스트가 아닌 굳이 레그혼을 데려온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녀석이 가장 빠르고 조용하게 ‘죽은’ 아크데몬 비스트여서 외부에 그 존재감이 제일 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인간 모습으로 변화가 가능해도 결국 마력이나 스킬로 파악이 쉬운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일 다 해야 하지만, 이런 경우도 있는 법이지.”
“뭐? 문제 있어?”
“비행기에서 내리면 그… 가오나 잡고 있어. 아, 이제 착륙이군.”
그렇게 비행기가 착륙, 유성원은 콜카타 신공항에 도착한다.
그리고 곧장 무기 및 아이템 수속, 헌터 입국 수속 등을 마치고는 공항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클라이언트를 만났다.
연한 갈색 피부에 새하얀 천 옷을 걸치고 머리카락을 모두 가린 두건에 새하얀 가면을 쓴 소녀가 건장한 남성 수행원들을 이끌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말을 건 것은 그들 쪽으로, 만나기로 한 사람이 맞는지 휴대폰에 저장한 이미지로 확인한 유성원은 말을 걸어온 이들을 바라보았다.
“아! 여, 여깁니다! 그… 나이트 레드?”
‘내가 지었지만 진짜 촌스러운 이름이다. 하지만 버닝 카이저니, 더 엠퍼러니 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름보단 훨씬 낫지.’
다들 온갖 화려한 예명을 붙이려고 했지만 유성원은 가뜩이나 외양도 화려해서 난감한 데다 이름 짓는 센스가 없었기에 단순하게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너무나 촌스러운 걸 참기란 힘들었다.
하지만 갑옷을 입은 그대로였기에 그 당혹스러운 표정은 보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예, 접니다. 그러니까… ‘성좌 바유’의 브라흐민 사제이시죠?”
“예, 맞습니다. 예정대로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일 신성 전쟁에 혹시나 못 맞추실까 걱정을 너무 해서…….”
“이래 봬도 프로인 만큼 시간은 잘 지킵니다. 하하핫.”
“아무튼 따라오십시오. 저희 신전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서 따로 마련된 차량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일행이었다.
계획한 대로 유성원은 위장 신분과 장비 구입을 통해 인도 쪽 헌터계에 용병으로 등록, 고용할 사람을 기다렸고 근래에 딱 적합한 성좌 세력을 찾아서 적절히 고용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이 성좌 바유의 세력이었다.
“미리 들으셨겠지만, 지금 상황과 이곳의 문화에 대해서 다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신성 전쟁이라는 것은 이 인도의 성좌님들이 서로 무언가를 걸고서 싸우는 신성한 싸움입니다. 영토, 인물, 갖가지 재보를 거는 것은 물론 승리하여 자신의 성좌를 찬양하는 의식이기도 하죠.”
“미리 자료는 봤습니다.”
“예. 그리고 저희 성좌 바유 님은 그… 바람의 신이기도 하신데, 워낙 성격이 자유분방하시고 혈기가 넘치는 축에 속하셔서 다른 성좌님들보다 뭐랄까… 그… 열정적으로 신성 전쟁에 참여하시는 바람에…….”
자신이 모시는 신이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러운 말투로 돌려서 정중히 표현하고 있었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다혈질에 호승심 넘치는 성좌 바유는 다른 어떤 성좌들보다도 신성 전쟁에 열심히 뛰어들었고, 그 결과는 뻔했다.
한 판, 한 판 신중해야 하는 신성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영토, 인물, 국민, 보물 온갖 것을 다 빼앗기고 날려 먹었는데도 그의 호승심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은 도박 중독이라는 거잖아.’
“결국 크샤트리아 계급이 모두 전쟁 중 죽거나 아니면 신성 전쟁으로 빼앗기기를 반복해서 끝장난 상황인데도…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신성 전쟁을 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브라흐민 계급까지 판돈으로 올리시면서 말이죠. 하지만 알다시피 저희는 크샤트리아 계급이 없기 때문에 결국…….”
“절 고용했다는 말씀이시군요. 걱정 마십시오. 대가를 받는 이상 꼭 이기겠습니다.”
“정말… 정말 꼭 부탁드립니다. 이번 신성 전쟁에서까지 패배하면 아마 저까지 다른 성좌님에게 팔려 가는 것은 물론 백성들은 다른 성좌 세력 아래의 수드라 계급이나 찬달라 계급으로 격하되어 고생하게 될 겁니다.”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하긴 했지만, 이런 성좌 바유는 유성원 측에게 있어 최고의 고객이기도 했다.
세세한 걸 묻고 확인할 정도가 되지 않는 절박한 상황과 또 신성 전쟁을 자주 하는 성향. 이용해 먹기 딱 좋았기에 유성원 측은 그들의 제안을 받자마자 더 깊게 생각할 것 없이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리고 유성원은 곧바로 내일 있을 신성 전쟁의 내용에 대해 검토해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