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밖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유성원은 돌아오자마자 해방의 기분을 느끼며 얼마 안 되는 휴식을 즐기려고 애를 썼다.
전선 도시에서 거하게 파티를 열고, 미친 듯이 놀기 시작한 것이다.
먹고 마시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노는 일에 더 주력했는데, 아영이를 비롯해서 재영, 하영, 수영이와 함께 아이언 포트리스 지하에 있는 던전 시뮬레이터로 만들어진 헌터용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오오오오오오!』
“히야아아악! 개, 개무셔!”
쾅!
현재 유성원은 시뮬레이터로 만들어진 던전의 광경에서 실물과 다름없는 좀비의 모습에 기겁하여 자신도 모르게 티탄의 말뚝을 꺼내 휘둘러 눈앞에 나타난 좀비를 때려 부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 시뮬레이터로 생겨난 것이었기에 빛이 흩어지는 걸로 끝났는데, 문제는 허상을 넘어서 시뮬레이터실 바닥까지 깨졌다는 것이었다.
“아니, 무슨 공포 게임을 이렇게 리얼하게… 허억… 허억…….”
“아, 바닥 부서져서 타일 보인다.”
현재 던전의 배경은 음습하고 어두운 풍경을 가진 목재 저택이었는데, 유성원이 휘두른 티탄의 말뚝 때문에 깨져서 새하얀 타일이 그대로 보였다.
시뮬레이터는 계속 풍경을 복구하려 하지만 깨진 타일 때문에 일치하지 않는 건지 지지직거리면서 이 던전이 허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진짜 무기를 꺼내면 어떻게 해요? 시뮬레이터용 무기 있잖아요, 아빠.”
“미안… 너무 당황한 바람에… 요즘 기술 정말 좋구나.”
“아버지, 코어 던전 다녀오고 성좌 때려잡은 사람 맞아요?”
“이런 공포물 타입 던전은 처음이라서 말이지. 게다가 이런 몬스터 타입도… 처음이고 말이지.”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면서 이리저리 변명을 해 보는 유성원이었다.
시뮬레이터로 던전 게임 같은 것을 즐기자고 해서 왔는데, 세계 톱급 헌터라는 이름과 다르게 망신살만 늘어나고 있었다.
이래저래 위엄 있는 아버지 같은 건 못 될 것 같은 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능숙하게 다가오는 좀비들을 사격으로 처리하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역시 계속 싸워 보지만 결국 좀비에게 물려서 게임 오버를 당하고 말았다.
“아이고~ 당했다. 아, 게임 오버 당하면 자동으로 시뮬레이터가 풀리는구나. 어이쿠, 폐가 안 되게 비켜 줘야지. 놀아 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네.”
“수고 많았어요. 오자마자 쉬어야 할 텐데, 이렇게 노는 건 더 힘들 텐데…….”
“이게 쉬는 거죠, 누… 님. 아, 부부인데 여보란 말이 입에 안 붙네요.”
“천천히 적응해 나가는 거예요. 저도 아직 당신… 이라고 하는 게 편해서…….”
그렇게 시뮬레이션 룸에서 나온 유성원은 신소미와 나란히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구경했다.
그래, 잠자고 뒹굴거리는 것만이 휴식이 아니다.
목숨 걸고 싸우는 격전에서 벗어나서 이렇게 같이 일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힐링이 되는 것이었다.
“뭐, 무리해서 그렇게 할 거 없잖아요. 그냥 우리 식대로 편하게 가죠. 급할 거 없으니까요.”
“으음, 그렇지만 딱 하나 급한 게 있긴 한데 말이죠.”
“딱 하나?”
“그… 아영이 동생…….”
그렇게 말하며 슬쩍 얼굴을 붉히는 신소미였고, 유성원 역시 그것이 뭔지 단숨에 눈치채고는 마찬가지로 얼굴이 붉어졌다.
역시 가족 하면 피가 이어진 아이를 만들어야 하는 것도 포함이 된 것이었고,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해외로 나간 유성원이기에 지금 이런 시간은 더없이 소중하고 급했다.
그렇게 눈이 맞은 두 사람은 말없이 시뮬레이션 룸을 떠나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유성원은 기사단의 성소 스킬을 막아 버렸고, 혹시 모르기에 기사들에게 2세 생산(?)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뒤 방문을 단단히 잠그고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
다음 날 오후, 전선도시 사령부.
유성원은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일어나서 겨우겨우 전선도시 사령부에 출근했다.
이미 사람들은 한창 일을 하며 주변을 오가는 중이었다.
다들 아시아의 제왕으로 불리는 그를 발견하고 경외심과 존경심을 담은 눈빛을 보내는 가운데, 부담은 느끼지만 그래도 애써 그것을 무시한 유성원은 아영이가 일하고 있을 최상층으로 향했다.
“나 왔다.”
“음? 아빠? 기왕 쉬시는 거 좀 더 쉬시지.”
“아니, 그래도 밤이 되기 전에는 일어나야지. 하아암~ 그보다 일은 잘 되어 가냐?”
“예. 아시아의 제왕이 되신 덕분에 아주 쑥쑥 뚫리고 있어요. 막히던 일도 알아서 고개 숙이며 협조해 줄 정도로 말이죠.”
유성원의 입장 변화 덕분에 일이 편해지는 걸 넘어서 이젠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운마저 모두 사라졌다. 하자는 대로 알아서 기는 레벨로 떨어지게 된 것이었다.
유청 없이 일이 잘 진행될까 걱정했던 유성원은 오히려 더 편하게 되었다는 말에 어처구니없어하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거 잘됐네. 아, 맞다. 엄마는?”
“아이언 포트리스 갔죠. 아, 그보다 지금 거 진짜 아빠 같았어요. 추가 점수 드릴게요.”
“어디다 쓰는 점수인데? 에휴~ 아시아의 제왕인가? 그런 걸 노리고 중국에 간 게 아닌데 말이지.”
“대강 듣자하니 성좌들이 기사님들을 빼앗으려고 했다면서요?”
“어, 대충 그래. 나는 그 양반 도와주러 간 거였는데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하아아~ 그거 때문에 계획이 엉망진창이 되었어.”
본래는 성좌 용봉왕의 세력을 키워 올림푸스를 견제하게 만들어야만 했는데, 이래서야 역으로 올림푸스 길드에 좋은 일만 시킨 셈이었다.
좋은 결과가 나왔지만 해야 할 사명을 생각하면 악수가 된 상황.
첫수부터 흐트러진 이 판을 재정비해야만 했다.
“일이 더럽게 꼬였어.”
“그냥 큰 성좌들부터 잘라 가면 안 돼요?”
“네가… 성좌 영원한 분노를 못 봐서 그래.”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바닷물과 땅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구멍, 그리고 그곳에서 기어 나오는 거대한 괴수들로 구성된 군단. 상상하기만 해도 아찔해져 오는 존재감이 느껴지는 진체(眞體)로 강림한 성좌.
올림푸스 길드도 간신히 결계를 틀어서 막아 내고만 있는 게 한계인 그 존재를 대체 어떻게 쓰러뜨린단 말인가?
“…으음~ 결국 최종 보스는 악(惡) 성향은 영원한 분노이고, 선(善) 성향은 올림푸스 길드라는 거네요. 그러면 그 아래 등급부터 차곡차곡 잡아야겠죠?”
“하아아아~ 그렇… 겠지? 국제 회의에서 발표 끝나면 뭐부터 손대야 할지 감이 안 잡혀. 명분이라든가 그런 것도 주의해야 하니까……. 모든 성좌를 추방한다는 걸 들키면 곤란하잖아.”
“그렇죠. 그거 들키면 당연히 견제받는 건 무조건이고, 성좌로 인해서 국제 관계가 변한 국가들도 많으니까요. 그러면 일단 가까운 데부터 처리하는 건 어때요? 딱히 다른 명분이 필요 없을 곳이 바로 위에 하나 있잖아요.”
아영이의 말에 유성원의 머리가 번뜩했다.
성좌 도살왕. 오랫동안 대한민국을 위협한 적으로, 인신 공양을 받는 악 성향의 성좌이기에 두말할 필요가 없이 처리해야 할 적으로서 타깃으로 삼기에 딱 좋았다.
‘그러네. 그 자식들이 있었지. 지금쯤 그 이 목사는 뭘 하고 있을까?’
막상 생각을 하니, 중국에 있던 언더시티를 날려 버리면서 헤어진 이래 갑자기 궁금해졌다.
인간 공장이라는,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는 걸 알았는데 시간이 꽤 지난 지금 포기하지 않았다면 또 그것을 실행하려고 애쓰는 중이리라.
그러니 확실히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한 유성원은 국제 회의 이후 성좌 도살왕을 타깃으로 잡기로 결정을 내렸다.
***
러시아, 아쿠츠크.
기존 성좌 도살왕이 세력을 떨치던 중국 만주 영역도 안전하지 않았기에 이 목사와 스캐빈저 일행은 아니꼽지만 러시아 쪽으로 대피해서 유랑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헌터들의 트레일러를 빼앗아서 이 도시, 저 도시를 누비면서 인간들을 잡아먹고 성좌 얼어붙은 지배자의 영역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러시아 정부의 추적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하는 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아, 쓰읍! 더럽게 춥네! 우리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합니까? 어우으으으으!”
“이 목사 저 인간이 내려가자고 할 때까진 참아야지, 별수 있겠어? 그나마 나는 몸 절반이 악마라 버틸 만하지만 너네는 정말 춥겠다.”
“지금 우리 난방으로 쓰는 마정석이 제일 많을 겁니다.”
하나 그 일상은 결코 편안한 것이 아니었다.
식량과 연료는 그래도 황금 갈기 호에서 뜯어낸 것 덕분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성좌 얼어붙은 지배자가 내뿜은 혹한의 냉기와 끊임없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얼어붙은 전사들과 던전들은 엄청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역시 제일 힘든 건 영하 10도, 20도는 기본이고 심하면 30, 40도까지 떨어지는 이 혹한의 추위였다.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이 망할 세상. 낮이든 밤이든 춥고 눈보라가 불어오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지옥의 풍경이었다.
그나마 물자가 풍부한 덕에 따라온 수백의 스캐빈저들의 숫자는 줄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옥 같은 삶인 건 틀림없었다.
“더 짜증 나는 건 ‘이 목사’ 그 양반은 치사하게 코어 던전으로 도망칠 수 있다는 거죠. 우린 이 더럽게 추운 곳에 놔둔 채 말이죠.”
“어쩌겠어? 그 인간이 우리 유일한 희망인데…….”
성좌 도살왕의 가호를 받는 스캐빈저들의 기분은 요새 최악이었다.
가뜩이나 서울 쪽으론 사령 군단에게 막혀서 밥벌이도 안 되는 판국인데 이젠 아예 유성원 헌터 놈이 그것들을 지배하고 있었고, 어느새 아시아의 제왕이라는 말도 안 되는 위치에 등극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성좌 도살왕의 사도들은 코어 던전에 꽁꽁 숨어 있을 뿐이었고, 희망은 오직 이 목사뿐이었다.
“요새 자주 안 나오고 계속 인간만 잡아 오라고 난리죠? 아예 사 오라고 하기까지 하고요.”
“그거야 문제가 안 되는데… 그걸로 뭘 하는지가 걱정이지. 승천까지 했으면 얌전히 성좌님에게 봉사나 할 것이지.”
[고난이… 나를 시험할지라도… 이 모든 것은 신의 인도하심이라. 어두운 먹구름 아래에서도… 한 줄기 빛은 나를 인도하심에… 나는 그 빛을 쥐고서… 끝까지 당신의 성전을 세우리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한창 이야기를 하던 중 이 목사가 포탈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나온 것은 혼자가 아니었다. 뒤에는 올림푸스 길드의 트리토니아스로 보이는 인간들이 수도 없이 따라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멍한 눈을 한 채 이 목사를 따라 나왔고, 그걸 본 박숙자와 곽영호는 경악해서 소리쳤다.
“와… 그거 다 뭐야?”
[연구 성과… 상황이 급해졌기에 가능한 모든 자원으로 S급 헌터인 이놈을 양산했다.]
“오오… 굉장하잖아? S급 헌터 양산이라니! 세계 어딜 가도 환영받을 만한 성과 아닌가? 이거라면 꽤 나쁘지 않은 전력이고 기술을 미끼 삼아서 어디든…….”
박숙자가 흥분해서 떠들어 댔지만, 이 목사는 그녀를 무시한 채로 갑자기 인벤토리를 열어서 식탁과 조리 기구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마치 생선을 손질하듯 트리토니아스의 클론을 하나 잡아다가 그 위에 올리곤 아무렇지 않게 목을 따 버리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
[아니, 지금부터 난 이‘것’들을 먹을 거다.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말이지. 그리고 너희 것도 마련하지.]
“으엑? 머, 먹는다고?”
[그래… 결국 정착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신앙을 지키려면… 성좌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지금부터 먹는다. 거부할 녀석들은 거부해라. 나는… 이 S급 인간 식재를 마음껏 먹을 테니 말이지.]
“가, 갑자기 왜 그래?”
[계시가 내려왔다. 놈이… 우리 코어 던전을 노리려 한다는 계시가……! 성좌를 둘이나… 이 세상에서 추방시킨 놈이… 이번엔 우리의 신을 노리려 한다. 그러니 지금은! 먹어야 한다.]
퍽! 콱! 콱!
이 목사는 그렇게 말하며 계속해서 식재료(?)들을 무섭게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엔 유성원이 코어 던전에 들어가는 것을 겁냈기에 이런 계시가 내려오지 않았지만, 이제 그가 사명을 위해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벌써 둘이나 되는 성좌를 이곳에서 내보냈기에 내심 급해진 성좌 도살왕은 ‘계시’를 내린 것이었다.
그렇게 ‘계시’에 따르기 위해서 ‘이 목사’는 인간을 먹고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고, 가진 모든 역량을 다해서 트리토니아스의 클론을 만든 다음 그것을 먹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