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쏴아아아아!
가차 없이 휘둘러진 유성원의 검, 그리고 파도처럼 퍼져 나가는 패황천검류 지성섬(地星閃)의 빛의 파도.
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은 빛에 타오르며 소멸해 갔고, 그나마 근위대장급들만 자신의 마력과 스킬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
하나 목표는 어차피 성좌 용봉왕의 화신(化神).
단상에 쳐진 장막 뒤의 그림자에서 하늘이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지면서 단상의 장막과 그림자 모두 한 번에 사라졌다.
그 소리를 들은 자금성 내의 근위대는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고, 하늘에선 마치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빛의 가루들이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몸에… 힘이!”
“아아… 그분의 축복이… 법칙이 사라진다.”
“성좌님이… 사라졌어? 우리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근위대장과 근위병, 그리고 새로이 보충되어 온 군사들 모두 이러한 기현상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하늘과 각자 자신의 상태창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적의 수괴라고 할 수 있는 성좌 용봉왕이 사라졌기에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했다.
유성원은 빨리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검을 든 채로 주변을 향해 외쳤다.
“성좌 용봉왕의 화신은 사라졌다! 우리의 승리다! 전투를 멈춰라! 더 이상 무의미한 희생을 늘릴 필요는 없다! 투항해라! 무기를 버려라!”
“…항복이다.”
“전군 항복하라! 성좌님이 사라진 이상 우린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젠장!”
“이대로 싸움을 이어 가 봐야 죽음뿐이다.”
그러자 근위대장들을 비롯해서 성좌 용봉왕의 군세는 빠르게 항복해 나갔다.
어차피 싸워서 이긴다고 한들 이미 성좌 용봉왕의 존재는 되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유성원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선 근위대장들을 모두 집결시켜라! 그리고 천군대장군! 남쪽의 중국 공산당 정부와의 국경에 가서 사령 군단을 집결시켜서 경계를 지켜라. 가는 동안 국경 수비대 쪽엔 연락을 넣겠다.”
“예, 장군!”
“아칼론과 섬멸은 성좌 진황 쪽의 국경 상황을 살펴라. 그리고 진석은 천검군을 모두 줄 테니 그들을 이끌고 북쪽 러시아 쪽! 마찬가지로 국경 수비대에 연락을 넣겠다! 지금 이동해라!”
“예!”
게임처럼 승리했다고 전부가 아니다.
승리하고 난 이후의 후속 조치가 더욱 중요했다.
외국엔 조짐이 전혀 없던 아주 짧고 굵게 끝난 내전이었지만, 성좌 용봉왕이 장악하던 시스템이 깨진 것을 금방 눈치챌 것이기 때문에 수비가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다른 이를 통해서 남은 근위대장들을 모아 온 유성원은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딱히 이 나라를 점령하거나 지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애초에 먼저 멋대로 날 유폐하고 내 기사들을 빼앗으려 한 것은 성좌 용봉왕이었고 말이지. 다만 그렇다곤 해도 이대로 무책임하게 그냥 떠나 버리면 이 나라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지배하시겠다는 겁니까?”
“서두에 깔아 놓은 말 못 들었나? 나는 지배할 생각 없다고! 그렇다고 그냥 방치하면 여기에 막 혼란 생기고 세기말이 되거나 중국 공산당이랑 러시아 애들이 미쳐 가지고 쳐들어오겠지. 그리고 그다음은 혼돈과 파괴의 시작일 거고, 이후 벌어지는 개판은 세계를 뒤흔들겠지. 너 상상급이니 특특급 맞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아까 내가 우리 기사들 보낸 데로 연락해서 국경 지키라고 했으니까 너희도 국경 수비대나 그쪽 부대에 연락 넣어. 우리 쪽이랑 협력한다고 대충 둘러대고 말이야. 성좌님 나가리 된 걸 알려 봐야 혼란만 커지니까…….”
끄덕.
자신들의 성좌를 쓰러뜨린 자에게 협력하는 것은 탐탁지 않았지만, 근위대장들은 지금 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이 나라의 평화가 위험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곧장 그의 말대로 각 부대와 수비대에게 연락을 넣어 서로 협조하라고 전했다.
원체 통제가 잘되고 서열과 계급 구성이 잘된 나라답게 상상급과 특특급의 근위대장들이 말을 전하자, 다들 이견 없이 국경 수비대와 전국에 있는 군부대는 침착하게 외부 경계로 돌아가게 되었다.
***
이틀 뒤.
전투의 상처를 지우고, 급한 불을 끄고 난 뒤에 휴식을 취한 유성원 일행과 근위대장들은 다시 한 번 회의실에 모여서 회의를 시작했다.
“이제 한시름 놨네. 하지만… 아직 멀었지. 이제 그 성좌 용봉왕 양반 없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정해야 하니까…….”
“정말로 지배할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없다고! 하아아~ 그럼 우리 그냥 갈까? 이후 대책, 너희 근위대들끼리 세울 수 있어? 성좌 용봉왕 사라진 거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후 운영 계획은? 혼란이 일어나거나 주변국에 뜯어먹히고 끝나고 싶어?”
“…그럼 그쪽 목적은 뭡니까? 성좌님만 없애고 정말 아무것도 필요 없는 겁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아까도 말했지? 너희 성좌님이 먼저 시비 털었다고! 우린 그냥 너희가 얌전히 국가 체제 유지 잘하면서 운영되길 빌어. 혼란 생기고 여길 다른 곳이 먹으면 다른 성좌들이 강해지니까……. 또 자칫해서 세계 대전급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바라지 않고…….”
아직도 미심쩍은 느낌과 서로 간에 감정이 남아 있었지만 대안이 없기에 유성원과 근위대장들의 통제 아래 일단 성좌 용봉왕의 중국을 안정시키고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응급 처치에 불과했다. 앞으로 미래를 비롯해서 주변국의 위협에서 이곳을 지키기 위한 본격적인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지금이야 감추고 있고 유천의 공격으로 부서졌다고 둘러댈 수 있지만 머지않아 소문이 날 거야. 그 성좌님이 깔아 둔 시스템이 부서진 이후의 이 나라 운영이 문제인데…….”
“어떻게 하시렵니까?”
“아니, 그걸 내가 정할 순 없지. 일단 너희 근위대장들이 사실상 성좌 용봉왕 님 다음 서열이니까 너희가 모여서… 그 뭐냐? 국가 재건 위원회 같은 거 생각해 봐… 라고 하면 어떻게 하고 싶니? 그 국민 여론은?”
“아마 저희는 물론이고 국민들도… 이대로 유지하고 싶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겠지.”
복잡한 생각할 거 없이 성좌 용봉왕이 시키는 대로, 주는 지위대로, 대우대로 살아가면 된다.
최하층민이라도 거주 공간과 식사, 결혼 모두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일을 부여해 주기에 아무런 걱정이나 고민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만큼 성좌 용봉왕의 지배 아래서 살던 사람들은 그가 없는 삶은 이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 와서 갑자기 자기들끼리 정부를 구성하고 다시 운영을 하라니,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옛 세대는 이미… 다 없어졌지?”
“예. 남아 있어도 아주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 성좌 용봉왕 님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아… 겁나 머리 아픈 문제네.”
이대로 속인 채로 오래 있을 수 없다.
목표는 우선 자연스럽게 이곳에 남은 사람들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서 국가 운영 체제를 갖추고 국민들의 삶을 지킬 수 있게 되어야 하는데, 수동적으로 일해 온 이들이 많은 구조라 체제를 갖추는 것부터 머리 아픈 일이었다.
“그… 근위대장들 중에 대표라도 뽑아 볼래? 일단 임시 국가 총수 같은 게 있어야 하니까…….”
“그걸… 유성원 님께서 맡아 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될 이유도 없고, 어차피 임시직이니…….”
근위대장 중 하나가 손을 들고서 충격적인 발언을 하는데, 유성원은 기겁하면서 반발했다.
“말이 되냐? 나 외쿡 살암이에요! 아니, 설사! 한다고 해도 납득하겠냐?”
“성좌 용봉왕 님을 이겼다고 하면 충분히 납득할 것 같은데요?”
“돼도 안 해! 나한테 떠넘기지 말라니까! 나도 할 일 많… 어이! 너네, 박수 치지 마! 박수 치지 마! 누구야? 지금 갑자기 스타워즈 임페리얼 마치 튼 녀석?”
유성원은 정말 답답할 노릇이었다.
학습된 무기력으로 인해 오랫동안 스스로 생각을 한 일이 거의 없는 이들에게 스스로 무언가를 하라고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이들도 그러고 싶지 않은지 몇몇 근위대장들은 그냥 유성원을 대장으로 삼는 게 좋겠다고 은근슬쩍 어필하고 있었다.
“와, 진짜 답답하다. 어떻게 하냐? 그냥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아무튼 채근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 근위대장들끼리 의견을 나누라고 한 다음 유성원은 홀로 자금성에 마련된 궁전에서 전경을 보며 신세 한탄을 하는 중이었다.
성내는 이미 다 정리가 끝난 상태이며, 사람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계 부품처럼 각자 자신들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냥 계약자가 옥좌에 오르면 되는 거 아닌가?]
“가울프, 지금 도시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 사람에게 그건 너무 가혹하지 않아?”
[어차피 자넨 세계의 성좌들을 모두 없애야 하는데…그러려면 한 국가를 아군으로 둬서 나쁠 게 없지 않은가? 시야를 좀 더 넓게 두고 보게. 그렇게 보면 이 나라도 작아.]
“하아아아~ 그런가? 하지만 난데없이 먹을 순 없잖아.”
[자네가 안 먹으면 누군가가 먹으려 들 걸세. 이 수동적인 인간들에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한 말이야.]
가울프의 조언대로 생각을 조금만 해 보면 이 나라를 노릴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
근 수십 년간 성좌 용봉왕이 정성을 다해서 키워 놓은 만큼 국가 내에 마련된 인프라, 경제와 문화 수준, 그리고 자금력 등등 우수한 점이 너무 많아서 기존 중국 공산당을 밀어내고 세계에 중국으로 공인될 정도였다.
“…당장 중국 공산당이 알면 가만히 안 있겠지? 어우! 상상만 해도 끔찍해.”
‘본래 우리 나라였다 해! 그러니 내놓으라 해! 거기 국민들은 우리가 다시 흡수해서 돌보겠다 해!’
중국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와 함께 유성원의 머릿속에선 강제로 이 성좌 용봉왕의 중국을 병합하고자 하는 중국 공산당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진황, 용봉왕, 도살왕 세 성좌에게 국토가 네 동강 나서 가뜩이나 국력이 줄었었는데, 그중 알짜배기인 이 하북과 북경 중심의 성좌가 사라졌다고 하면 그 무엇보다 반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새끼들이 멀쩡했으면 그냥 넘기고 끝내면 그만인데…….”
아쉽게도 넷으로 분열되고도 중국 공산당과 그 국민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중화사상, 공산당 독재를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력하게 국민들을 구속하고 통제하는 건 물론 넷으로 쪼개져도 아직도 인구수가 억 단위라서 배짱부리는 건 여전했다.
그런 만큼 다른 건 몰라도 그들에겐 절대로 돌려줄 수 없다는 게 유성원의 생각이었다.
“위구르, 홍콩을 생각하면 여기를 돌려받으면 또 무슨 짓을 저지를까? 끔찍하네.”
[음, 그러면 아예 여길 모조리 통일해 버리면 되겠군. 하하핫! 그런 사악한 존재라면 납득할 수 없지.]
“터무니없는 소리를 또 하네. 하아아~ 그나저나 결국 협력하러 왔다가 목을 따 버렸으니 다른 성좌들도 긴장하겠지?”
인간들은 몰라도 성좌들은 이제 이 지구에서 플레이하고 있던 성좌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을 눈치챘을 것이고, 그 원인이 유성원이라는 것까지 다들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 성좌들부터는 없애는 게 아주 힘든 일이 될 것 같았다.
[애초에 정당방위이지 않은가? 흠하핫,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했으니 대가를 치른 거지. 이야기를 들어 보니 성좌라서 완고하지 않았고, 협력하는 척하면서 천검군 녀석들을 꼬드겼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걸세.]
“뭐, 그러니까 성좌인 거겠지. 그래서 다른 방법이 없어서 유천 황제를 소환한 거고 말이야. 하지만 그게… 패착이 되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아마 시스템창이 혼란스러운 상태로 성좌 용봉왕의 완벽한 지휘와 그의 시스템 아래에서 근위대와 싸워야 했으리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좌를 공격할 수단이 없어서 부하들을 챙겨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게 한계였을 터였다. 물론 애초부터 계획이 그거였지만 말이다.
여러모로 상대의 욕심과 운 덕분에 이긴 싸움인 만큼 유성원은 절대 자만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가? 아니면 그 패황 기사님이 다 해서일까? 이상하게 보통이라면 들어왔을 보상이 들어오지 않았더라고~ 쩝. 사실 이 검이면 충분하지만, 늘 들어오다가 이번엔 없으니 섭섭하단 말이지.”
[뭐, 그런 경우도 있는 법이겠지. 아무튼 슬슬… 휴식 시간은 끝일세. 계약자여, 들어가세나.]
“예예. 일하러 가겠습니다.”
원하디원하던 신조 병기에 가까운 유천의 검을 얻었기에 다른 보상이 들어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유성원은 가울프를 따라서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