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으음… 뭔가 이상한데?’
자금성 쪽에 침입한 유성원은 뭔가 미묘함을 느끼고 있었다.
최대한 조심히 들어온다고 들어왔지만 도시는 그렇다 쳐도 자신 같은 침투 작전의 초보가 자금성 내에 들어왔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게 이상했기 때문이다.
처음 이 자금성에 왔을 때 상당한 수의 경비 인력과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봤고, 이곳은 현재 성좌 용봉왕이 운영하는 이 나라의 심장부 같은 곳이었기에 이 적막과 고요함은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 이거 딱 그거네. 올 테면 와 봐라, 그런 거지?’
유성원이라도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사실.
침투이지만 이미 성좌 용봉왕은 눈치를 챘고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그가 허락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이미 침투라는 단어가 무색해졌다는 것을 안 유성원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느긋하게 자금성을 거닐면서 용의 궁전으로 향했다.
“으으음~ 환영하는 건… 아니겠지?”
환영할 거였으면 애초부터 하하(下下)급 민초(民草)로 판명을 내리고 쫓아내지도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이건 높은 확률로 함정이라는 것인데, 본래라면 도망쳐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만약 도망친다면… 유청을 비롯한 천검군 기사들을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젠 없으면 섭섭한 놈들이니까…….’
그렇게 화려하지만 고요해진 자금성의 성과 문들을 넘어 행차하듯이 간 유성원은 이윽고 화려한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거대한 문 앞에 섰다.
문도 문이지만 그 뒤에 있는 거대한 궁전을 비롯해서 느껴지는 기운들과 인기척으로 볼 때, 여기가 용의 궁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애초에 상대가 아예 알려 주는 셈 치고, 이곳 외에 다른 곳은 인기척 하나 없는 장소로 해 놓아서 더더욱 확실했다.
“그럼 가 볼까? 끄으응~ 이거 직접 열어야 하니 빡치네.”
끼이이익.
처음 이곳에 올 때는 남이 열어 준 것과 다르게 이젠 직접 열어야 하는 신세가 왠지 서글펐다.
아무튼 거대한 문을 직접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느낀 대로 궁전 앞 야외 홀에는 무장을 한 성좌 용봉왕의 근위대장들과 근위대가 잔뜩 서서 그를 맞이하고 있었고, 궁전 앞에 마련된 단상엔 이전에 보았던 성좌 용봉왕의 그림자가 비치는 장막이 있었다.
“으음… 저기, 전 싸울 생각 하나도 없는데, 환영 인파가 너무 무서운데 말이죠.”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성원으로, 맨손을 보이면서 자신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필했다.
얌전히 기사들만 데리고 돌아가면 충분한데, 이 분위기로 보아 쉽게 내어 줄 것 같진 않다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아무튼 먼저 인사말을 건네자 장막 안에서 성좌 용봉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수에 맞지 않는 걸 가지려고 하는 도둑놈을 맞이하는 건데, 당연히 무기를 들고 기다려야지.]
“도둑놈… 이라니요. 그건 좀 지나친 말씀 같네요.”
[세계가 혼란스러운 것은 바로 너 같은 도둑놈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가지고 휘두르는 자, 자격이 없는데 욕심과 시기, 탐욕을 부리는 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익을 얻으려는 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을 이용하려는 자… 그들이야말로 세계를 어지럽히는 악(惡)이다. 나는 너의 악(惡)의 씨앗을 제거해 줬으니 오히려 감사를 들어야 할 따름이지.]
‘정신 나갔네. 뭐, 성좌란 게 다 그런 거겠지만…….’
성좌와의 대화나 말싸움은 해 봤자 소용없는 것이기에 유성원은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지능이라든가, 통찰력의 차이도 큰 만큼 무슨 말을 해도 그는 족족 자신의 정의대로 반박해 올 거고, 오히려 떠들다가 갑자기 그에게 설득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냥 무시하고 유성원은 받을 거만 받기로 한다.
“하지만 저는 저대로 걔네들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죠. 그것만 마치면 이후에 반납을 하든 어디에 보내 주든 상관없으니 지금은 돌려주십시오. 그 녀석들도 분명 원하는 일이 아닐 텐데요?”
[그럴 순 없네.]
“아, 욕심을 내실 정도로 좋은 녀석들인 건 맞지만, 그래도 떼쓰시면 안 되죠.”
성좌들이 어떤 존재인지 이미 알고 있는 유성원은 억지를 쓸 거라는 예상을 했기에 조심스럽게 인벤토리를 호출해서 티탄의 말뚝을 꺼낼 준비를 했다.
말로 해서 안 되면 결국 천군대장군을 비롯한 사령 군단을 모두 소환해서 여기서 전쟁판을 벌이고, 어딘가에 갇혀 있을 기사들을 찾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을 버리고 기사도에 어긋나는 짓을 할 바에야 그쪽이 나을 것이다.
‘여차해서 상황이 좋아지면 가울프랑 애들도 부르고… 아무튼 저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오면 즉시 무기를 뽑아서 달려…….’
[왜냐하면 그 기사들은 이제 ‘진정한 주인’의 곁으로 돌아갔기 때문일세.]
“…뭐?”
[소개하지. 이번에 새롭게 나의 사도가 된 자이며 그 ‘진정한 주인’일세.]
철그럭…….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장막의 뒤쪽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장신의 남성. 회색 털의 장식이 달린 은백색의 갑옷에 푸른 망토를 걸친 기사는 허리에 검, 등에 방패를 멘 채로 걸어 나와 투구를 벗고 유성원을 노려보았다.
얼굴로 알 수 있는 나이는 20대 중반의 젊은 청년. 진한 흑발, 자색의 눈,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남으로 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눈빛으로 유성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윽!”
그 시선에서 거대한 위엄을 느낀 유성원은 본능적으로 무릎 꿇으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모습은 작은 인간인데, 마치 거대한 괴물이나 자연 경관을 마주했을 때 같은 경외감이 느껴지는 존재였다.
그 대단한 기사들도 그래도 같은 인간이라고 느꼈었는데, 이건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 같은 자였다.
[벌벌 떨고 있군. 그것이 진리지! 이제야 자신의 분수를 깨달았나? 그대는 기껏해야 ‘하하(下下)급의 민초’! 너는 그저 그 갑옷처럼 밖이 한 겹 더 도금된 것뿐! ‘별의 수호자’로서 격에 맞지 않는 힘을 휘둘러 이 자리까지 온 것뿐이다. 알았나? 이제야 주제를 알았느냔 말이다! 너는 그저 빌린 자일 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놈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정말 상상도 못했는데… 설마, 설마 패황 기사… 유천이 나올 줄이야.”
[이름까지 알 줄은 몰랐는데? 그들이 알려 준 건가? 그래, 이자야말로 영웅 중의 영웅! 수많은 영웅호걸과의 경쟁에서 이겨 한 세계를 통일한 군주이며 최강의 무인! 패황천검류라고 하는 자기류의 검술을 완성시켜 전설을 넘어 신화가 된 자이며 천검군의 진짜 주인이지. 그러니~ 얌전히…….]
저벅…….
성좌 용봉왕이 선언하려는 순간, 패황 기사 유천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곤 앞으로 나와 단상에서 내려오는데, 유성원은 그가 가까워질수록 전신에 무형의 압박이 가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정신 차리고 이 악물지 않으면 알아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릴 것 같은 압박.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꿋꿋하게 그 압력에 저항하는 그를 향해 패황 기사 유천이 검을 뽑아 겨누며 입을 열었다.
“무기를 들어라.”
“뭐?”
“나는 신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 다들 내가 이룬 일을 ‘신화’라고 떠들곤 하지만 내 기준에선 그저 나의 일이었기 때문에 했을 뿐이다. 고로 너에 대해선 내가 직접 판단하겠다. 그러니 무기를 들어라. 아니면 그냥 이 자리에서 돌아서 도망쳐라. 보내 주도록 하지.”
“…이성은 도망치라고 하지만 ‘그 녀석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죠.”
쿠우웅!
유성원은 티탄의 말뚝 꺼내 들고 패황 기사 유찬에게 겨누었다.
검과 함께 느껴지는 살기(殺氣)는 이때까지 마주한 그 어떤 것보다도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자신 같은 형편없는 놈을 믿고 따라 준 기사들을 자신이 먼저 배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어리석군. 살아 있으면 더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말이지. 나는 네가 도망치길 바랐다. 그랬다면 쫓지 않았을 텐데… 명예니 수치니 하는 것에 목숨을 걸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군. 살아야 다음이 있는 법인데 말이지.”
“아… 그거 이해가 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사람이라면 은혜를 받았으면 갚아야 하니까요.”
“그런 게 사람 목숨을 많이 빼앗아 가지. 이름을 먼저 대라.”
“유성원! 기사는… 그러니까 클래스명이 아직 빈 걸로 봐선 아직 수행 중인 몸이라고 치죠.”
“…치죠? 무슨 말인지. 클래스인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냥 들은 대로 이해하도록 하지. 황제이자 기사 유천! 너의 가치를 나에게 보여라!”
쾅!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천은 방패를 팔에 매면서 발을 굴러 유성원에게 돌진했다.
유성원 또한 그에 반응하듯 금빛 신수의 갑옷이 자동으로 입혀지면서 티탄의 말뚝을 휘둘렀다.
투아아아앙!
공기를 가르고 금빛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지는 티탄의 말뚝을 유천은 방패로 흘려서 받아 냈지만 완전히 흘리지는 못한 건지 금속과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바닥의 돌이 깨지면서 발이 땅으로 파고들었고, 거센 충격파가 바람처럼 불어 주변에 서 있는 근위대장들의 옷과 장막을 흔들었다.
“흠!”
하지만 그는 전혀 위축되거나 충격받은 눈빛이 아니었다. 그대로 파고들면서 유성원에게 검을 휘둘러 갑옷에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 계속해서 파고들며 유성원을 무시무시하게 몰아쳤지만, 천만다행하게도 무재(武才) 스킬과 스테이터스가 그 공격을 잘 받아 내면서 굳건히 버티게 해 주고 있었다.
“성격과는 전혀 다른 갑옷을 입고 다니는군. 날 속인 건가? 게다가 솜씨도 꽤 좋군.”
“그게… 다 받은 거라서 말이죠. 갑옷은 증정품… 이고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정도라면 하하(下下)급의 민초(民草)라는 건 말이 안 되는데 말이지.”
유천은 방패로 유성원을 밀치고 살짝 물러나며 성좌 용봉왕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불러서 자기가 운영하는 나라의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이 시대와 이 낯선 별에서 자신의 기사들을 거느린 자가 그 격에 맞지 않고 월등히 떨어지는 하하(下下)급이라고 수없이 말을 했었던 것이다.
한데 실상은 지금 자신의 맹공에 수세로 일관 중이긴 해도 잘 맞서고 있으니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건 그저! ‘별의 힘’을 빌려서 ‘별의 기록’에서 꺼내어 얻은 것뿐이다.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본래 힘과 지혜란 누군가에게서 배우는 것이기에 모든 건 자신의 것이 없다만?”
[말을 해도 못 알아먹는군. 그럼 직접 보여 주지. 저 ‘하하(下下)급 민초(民草)’의 진짜 모습을…….]
딱!
유천과의 이야기 끝에 장막 뒤의 그림자가 손을 튕겼다.
순간 전에 청룡 길드의 장인 고천수가 했던 것과 같은 짓을 하려는 건가 생각한 유성원은 급하게 티탄의 말뚝을 인벤토리에 도로 넣으려고 했지만, 갑자기 몸이 휘청거리면서 유천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땅에 쓰러져 버렸다.
“…큭! 뭐야, 이건?”
“뭘 한 거지? 용봉왕? 지금 내 일을 방해하는 건가?”
[별거 한 거 없다. 그저 순서를 바꿔 놨을 뿐이다. 스킬의 적용과 그의 재능이 적용되는 순서를 말이야.]
성좌 용봉왕이 한 것은 유성원의 육체에게 각성자의 힘이 적용되는 순서를 바꿔 놓은 것뿐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현재 각성자의 힘이 유성원의 위를 덮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스킬과 능력을 쓰고 스테이터스도 오른 것인데, 그 순서 중 일부를 반대로 바꿔 놓은 것이다.
유성원이 얻고, 스스로 선택한 각성자의 힘으로 구성된 스킬과 힘 위에다 유성원의 ‘재능’을 덮어씌운 것이다.
“…무재(武才)가……!”
SS급 헌터의 스테이터스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스킬은 그대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순서를 바꿔 놓은 ‘(유니크)만검(萬劍)의 기사 그란델의 무재(武才)’가 성좌 용봉왕의 농간으로 인해 그 위에 범인(凡人)이었던 유성원의 재능이 씌어 버린 것이었다.
“젠장……!”
그렇게 되자 유성원에겐 SS급 스테이터스와 각종 스킬들은 역으로 독과 같은 것이 되어서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어졌다.
마치 슈퍼컴퓨터에 그 스펙을 전혀 못 쓰는 운영 체제를 적용한 것 같은 경우.
방금 전 당당하게 싸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병든 닭처럼 덜덜 떨며 일어서는 것도 힘들어하는 유성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