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아… 미치겠네. 진짜~ 이건 또 무슨 일이지? 누가 좀 시원하게 말해 줄 사람이 없나? 나 같은 놈도 이해되게 말이야.”
그렇게 어이없어하는 유성원이었지만,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일단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건 이 허름한 아파트와 어울리는 후줄근한 도시의 광경뿐.
애초에 중국말을 할 줄 모르는 유성원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내가 분명히 말을 전달했을 땐 도움을 주고 중국을 차지시켜 준다고 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일단 전화라도 해야 할까? 뭐가 뭔지 모르겠는…….”
[늦어서 죄송합니다, 쇼군. 라멘을 원하신다고 하셔서 주문해서 가져왔습니다.]
“…음?”
콰직!
순간, 아파트 단칸방의 낡은 바닥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면서 포탈에서 천군대장군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몸 크기에 맞지 않는 작은 철가방 하나를 가지고 왔는데, 비닐에 싸인 일본식 라면이 담긴 그릇과 단무지를 유성원에게 내밀었다.
물론 식사를 원한 것은 맞지만 이렇게 직접 가져올 줄은 몰랐던 유성원은 매우 당황하면서 일단 라멘은 받았다.
“…왜 네가 와? 물론 가져다준 건 고마운데… 그리고 내가 쇼군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지? 하아아~ 대충 장군님 정도로 타협하자. 아무튼 와 줘서 고맙다. 너라도 오니까 정말 안심이 되네. 그나저나 다들 안 오는 거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가울프 경이 와서 배고픈 주군에게 보급을 해야 한다면서 저에게 라면집 주소를 주고 배달해 드리라고 해서 말이죠. 지금 다른 기사들도 ‘성소’는 들어갈 수 있지만 장군님이 계신 곳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음, 상태창이 이상해진 것도 그렇고, 여기가 뭔가 이상한 것 같네. 그런데 너는 어떻게 넘어올 수 있게 된 걸까? 후루룩! 아, 이거 엄청 맛있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역에 와 보니 무언가 묘한 힘이 느껴지긴 합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마치 다른 성좌의 ‘코어 던전’ 내부 같은 느낌이군요.]
“코어 던전… 아아!”
천군대장군의 말에 힌트를 얻은 유성원은 그제야 수수께끼가 풀린 듯 정신을 번뜩 차렸다.
코어 던전. 성좌의 세상이며 그가 정해 놓은 규칙이 절대적인 진리가 되는 장소.
그곳에서 테이블 하나 두고 그걸로 게임을 해서 승부를 정해야 한다면 그것이 법칙이 된다.
모든 것은 성좌의 바람대로. 그리고 이 나라도 마찬가지로 성좌가 만든 규칙대로 사람들은 살아가야 하는 것일 터였다.
“그리고 나도 뭔지는 모르지만 그 규칙에 말려들었고 말이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네. 다른 기사들은 못 오는데, 왜 너만 온 걸까? 네가 온 걸 보면 아마 너네 사령무사팀은 다 올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것까지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장군.]
“뭐, 대충 알 것 같긴 하지만… 보자, 하하(下下)급 민초(民草)라. 딱 봐도 이거… 사람을 돼지고기처럼 등급으로 나누어 놓은 거네. 이제야 뭔가 좀 알 것 같다. 보나 마나…….”
인간의 등급을 상, 중, 하로 나누고, 거기에 또 한 번 상, 중, 하로 갈라놓은 것이리라.
상상(上上), 상중(上中), 상하(上下). 중상(中上), 중중(中中), 중하(中下). 하상(下上), 하중(下中), 하하(下下).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유성원의 등급은 하하(下下). 9개의 등급 중 최하위 등급이었다.
“그러니 이런 시설을 준 거겠지. 기사들을 멈춰 세운 것도 이해가 가는군. 녀석들은 누구든 상상(上上), 아니 그 위 등급이 있다면… 음~ 특급(特級) 같은 걸로 분류하려나?”
[장군께서 하하급이라니, 말이 되질 않습니다만?]
“아마… 나라는 인간 그 자체만 보고 판단한 걸 거야. 그래, 각성해서 받은 시스템이나 능력치, 스킬 다 떼고 순수 인간만 본 거겠지.”
각성자 효과로 받은 스테이터스는 이미 SS급의 최상급에 치달았으며 ‘별의 기록’에서 모든 스킬들도 최고급들만 모아 놓은 만큼 하하(下下)라는 등급이 나오려면 결국 유성원이라는 인간 자체만 평가한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카스트 제도 비슷한 것 같네. 물론 그건 혈통이지만 이건… 음… 성좌가 판단하는 거니까. 으으으음… 아마 그에 따른 사회의 역할과 임무, 교육을 시키나 보네.”
뭔가 엄청 불합리한 것 같으면서도 성좌의 판단이니 이해가 되는 기묘한 시스템이었다.
성좌가 국가 구성원인 인간의 재능과 능력 포텐셜을 등급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그 능력에 따라 일을 주거나 대우를 해 주는 극한의 효율주의였다.
분명 인간 개인의 자유나 또 100퍼센트 재능과 능력의 판단이 게임의 상태창처럼 표시가 정확할 수 없으며 후천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등등 반론할 수 있는 논리는 산처럼 쌓여 있지만, 그것도 역시 성좌라는 절대적 존재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으음, 문제는 역시 지금 천검군 기사 애들이 어쩌고 있느냐, 하는 건데 말이지. 하나하나가 특급 인재들이니… 으으으음…….”
[보나 마나 자신의 아래로 예속시키려고 하겠군요.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이게 그 성좌님의 사고방식이라든가. 계획이라기보다는 원래 그런 양반인 거지. 아마 그쪽에 가까울 거야.”
알아서 자신을 도와준다는 데 굳이 이렇게 먼저 뒤통수칠 필요가 없다.
자신의 부하인 기사들이 갖고 싶었으면 차라리 같이 일하면서 신뢰를 쌓는 작업을 하거나 아니면 좀 더 간교하고 세밀하게 압박해도 충분한 일일 텐데, 오자마자 대장 격인 유성원에게 이런 짓을 벌인 것은 성좌의 규칙이자 이 ‘나라’를 코어 던전처럼 만든 원리일 것이다.
“이무튼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 인데…….”
[장군, 곧바로 기사들에게 가시는 게 아닙니까?]
“아니지. 그래 봐야 서로 감정만 상한 채로 물러나야 하잖아. 기왕 파헤칠 거면 이 코어 던전 같은 나라의 구조를 완벽히 파헤쳐야 뭔가 약점이라도 나올 것 같고 말이지. 또…….”
[또?]
“내 기사들의 충성심이 그렇게 싸지 않을 것 같고 말이야. 그러니 읏챠! 약점 찾으러 가 보자.”
벌떡 일어난 유성원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분명 아무 재능 없고 특출한 능력은 없는 유성원이었지만,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 살던 밑바닥에서 처절히 구르고 견뎌 낸 ‘경험’으로 담금질된 저 저력이야말로 진짜 ‘재능’이었다.
성좌 용봉왕이 사람을 잘못 봤다고 생각하며 천군대장군은 자신을 아래에 둔 장군의 뒤를 따랐다.
***
자금성, 용의 궁전.
유청을 비롯한 기사들은 현재 특(特)급 대우를 받는 자들만이 묵을 수 있는 용의 궁전에 각자 개인실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각각 따르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방 하나하나가 웬만한 건물 한 층보다 더 넓고, 최고급 호텔처럼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건 물론 각종 전자 기기 및 트레이닝실까지 완벽하게 갖추어진 숙소였다.
또한 성좌 용봉왕은 그들에게 어울릴 것이라면서 전설급 무구, 심지어 어디서 찾은 건지 그들이 살던 세계의 것을 가져다주기까지 했다.
“호의가 너무 부담스러울 정도군. 아니면 이미 그분은 우리를 자신의 부하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 아니옵니다, 유청 경. 그저 협력하신다고 했으니 저희 성좌 용봉왕 님께서 순수하게 보내는 성의이옵니다. 특특급의 군단장이시여!”
시종은 마치 맹수를 바라보듯 식은땀을 흘리며 유청의 기백에 쩔쩔매고 있었다.
현재 유청은 다른 기사들과도 떨어져 있는 것도 그랬지만 주군인 유성원의 상태를 알 수 없어서 초조했다.
몰래 기사단의 성소 포탈을 열고 유성원에게 가려고 했지만 포탈은 열리지 않았고, 안에 있는 다른 기사나 천검군 병사를 부르려고 해도 불러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 이상한 호칭은 집어치우고 당장 우리 폐하를 만나게 해 다오.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냐?”
“그, 그건 저희로서는 알 수가 없사옵니다.”
시중드는 이들은 덜덜 떨면서도 유성원의 행방에 대해선 결코 알려 주지 않았다.
거기다 케어해 줄 진석도 없으니 답답한 마음은 더 커질 뿐이었다.
하나 무력을 사용하자니 이 건물 다른 곳에서 느껴지는 강자의 기운들이 너무 많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제일 결정적인 건 유성원의 소재를 몰라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폐하의 상태를 알기 전엔 나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을 것이고 협력, 행동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결국 유청에게 남은 수단은 침묵과 농성뿐. 유청뿐만 아니라 다른 방에 있는 기사들도 각자 거부하면서 단호하게 대처했다.
그리고 이를 별도의 방에서 모두를 바라보던 성좌 용봉왕은 장막의 그림자뿐이었지만 기쁜 건지 몸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특특급의 용사들이라면! 이 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별의 기록’에서도 특별히 우수하고 숭고했던 전설들! 심지어 저 유청 경은 오로지 나라를 위해 스스로 친족과 공신의 처형을 결단할 정도로 대의(大義)와 충성으로 뭉친 기사! 그 유성원이라는 자가 가지기엔 너무 과분한 인물이지.]
“하나 용봉왕 님이시여, 저 기사들은 모두 그 유성원이라는 ‘하하(下下)급 민초(民草)’에게 충성을 바친 자들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그의 지위를 올려 주고 타협하시는 건……? 한 명의 비위만 맞추면 6명의 특특급 기사, 아니 그 이상을 얻을 수 있는데…….”
[타협? 무능한 자에게 자리를 주고 대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나? 그래서 그 무능하고 서로의 꽌시만 중시하던 너희의 자랑스러운 나라는 어떻게 되었지? 오히려 지금은 어떤가? 나의 아래에서 완벽하게 인간의 우열, 가진 재능을 판단하고 그에 맞는 교육을 시켜 알맞은 지위와 대우를 해 주니 중국 공산당 따위와는 상대도 안 되는 나라가 되지 않았는가?]
“그건… 맞습니다.”
옆에서 제안했던 근위대장 중 한 명은 고개를 떨구며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 정부든 뭐든 결국 ‘꽌시’ 아래에서 굴러갔던 중국 사회와 다르게 성좌 용봉왕의 지배와 판별은 정확하고 완벽했다.
누구의 자식, 누구의 친척 이런 것에 상관없이 모두 신의 앞에 그 재능과 능력을 가림받고 그에 맞는 지위와 대우를 받는다.
그 덕분에 수많은 지지자와 백성들이 자신들을 따랐으며, 고작 수십 년 만에 중국 공산당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국가 성장을 완성하고 국제 사회에서 진정한 중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나의 예외는 작은 흠결로 보일지어나 그 균열이 만년의 제국도 무너뜨릴 수 있는 상처임을 무시하지 말라. 아무튼 저 기개는 마음에 들지만 이대로 계속 있을 순 없는 일인데, 무언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마 없을 겁니다. 저 정도의 충절을 가지고 ‘별의 기록’에 남을 정도의 레벨이라면 설사 죽음… 아니, 그보다 더한 것마저도 각오할 수 있는 자들일 겁니다.”
[그러니 더더더더더더더더더욱 갖고 싶구나. 하나 그렇다고 무능한 인간을 등용문에 세우는 건 내 규칙에 어긋나는 일. 뭔가 좋은 방도가 없을까?]
“그게, 제게 하나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만…….”
[어서 고해 보거라.]
“그러면…….”
소곤소곤…….
다른 근위대장이 조심스럽게 성좌 용봉왕의 장막으로 다가가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그것을 들은 장막의 그림자는 술렁이기 시작했고, 근위대장은 자신이 실수했나 싶어서 몸을 움츠렸지만 나오는 반응은 그 반대였다.
웃음소리와 함께 장막이 요동치며 환희에 찬 성좌 용봉왕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하하핫! 옳거니! 아주 훌륭한 충고로다! 역시 근위대장답도다! 바로 시행해야겠군.]
“알겠습니다. 그리고… 유성원 헌터에 대해서는 감시를 따로 안 붙여도 될까요?”
[지혜도, 재능도 없는… 고작해야 육체노동에나 종사할 가축 같은 놈이 뭘 해 봤자일 터. 그리고 이미 ‘하하(下下)급 민초(民草)’로 밝혀낸 이상 더 이상 내 영토에선 제멋대로 설칠 순 없을 것이다. 본인이 싫어도 ‘하중(下中)급 민축(民畜)’ 이상의 백성에게 알아서 고개 숙여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 걱정 마라.]
그렇게 성좌 용봉왕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장막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근위대장이 고한 방안을 실행하려면 그가 직접 나서야 했고,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은 근위대장들은 성좌 용봉왕의 명대로 유성원에 대한 경계나 생각은 모두 그만두고, 각자 자신들이 맡은 일을 하러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