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알현의 궁.
왼쪽은 봉왕의 그림이 수놓아진 천, 오른쪽은 동양의 용이 그려진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안엔 수백의 전통 관복을 입은 신하와 양복을 입은 관료들이 각자 자리에 앉아서 한창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뭔가 알현하는 장소라기보다는 사무실 혹은 업무를 보는 곳처럼 보이는 모습에 고개를 돌리던 유성원은 알현의 궁 가장 안쪽에 위치한 5미터가량 높은 단상을 발견했다.
그곳엔 하얀 천으로 된 장막이 있었고, 그 뒤에 사람 모습을 한 그림자가 있었다.
그때, 일행을 안내한 오위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위대하신 우리의 성좌 용봉왕 님이시여, 내리신 명을 받들어 유성원 헌터와 일행을 이곳에 데려왔습니다.”
[…수고했다.]
‘저게… 성좌의 화신인가? 하지만 본래 모습이 안 보이니 뭐라 할 수가 없네.’
그림자는 인간의 형상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도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딱딱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아무튼 유성원과 그 일행은 오위가 하던 그대로 단상 쪽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그… 저는 유성원이라고 합니다. 제안을 받아 주시고 초대해 주신 점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할 거 없다. 나도 한번 ‘성좌 66천마’의 ‘코어 던전’을 클리어한 용사를 보고 싶었으니 말이야. 그렇군. 으음… 정말 의외군. 으음… 으으음…….]
“아, 예. 저도 솔직히 의외…….”
[됐다. 더 이상 그대는 말할 필요 없다.]
유성원의 대답을 갑자기 칼같이 끊어 버리는 성좌 용봉왕.
유성원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저 장막 안의 그림자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눈치껏 따르기로 했다.
자신이 뭔가 심기를 거스른 건지 아니면 성좌의 취향에 안 맞는 건지는 모르지만, 성좌라는 존재가 얼마나 제멋대로인지는 이미 코어 던전에서 느꼈기 때문이었다.
[오위 제3근위대장, 저자를 E동에 있는 내실로 안내하고 주의 사항들을 알려 줘라.]
“예? E동 말씀이십니까? 정말이십니까?”
[그래, E동이다. 뭐 문제 있는가?]
“아, 아닙니다. 그럼 유성원 헌터님, 절 따라오십시오.”
오위 근위대장의 반응이 어딘가 묘했지만, 유성원은 얌전히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천검군 기사들도 유성원을 따라 몸을 돌리려 하는데, 장막 안의 그림자인 성좌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잠깐, 거기 기사들은 잠시 남아 있거라. 아직 내 판별이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오위, 저자만 먼저 데리고 가라.]
“저희는 폐하의 기사입니다. 폐하가 가시는 곳 어디든 따르기로 한 자들입니다.”
[맹랑하구나. 하지만 용서하지. ‘별의 기록’에 남은 용사라면 존중할 가치가 있으니까. 아무튼 잠시만 남아 있으면 된다. 너희의 주인에게 뭔가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니 걱정 말거라. 후후훗.]
유청의 반박에 성좌 용봉왕은 오히려 즐겁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뭔가 대우가 다른 것에 심기가 불편해진 건지,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지 슬쩍 유성원을 바라보는 유청이었지만, 유성원은 그냥 손을 흔들면서 남아 있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성좌 양반이 뭔가 생각이 있는 거겠지. 남아, 남아. 무례하게 굴지도 말고~’
“알겠습니다. 하나 곧 따라가겠습니다, 폐하.”
끄덕.
유성원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하고는 제3근위대장 오위를 따라서 먼저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기사들은 유성원의 명을 받았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자리에 남아서 성좌 용봉왕의 화신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위를 따라 그대로 걸어서 궁을 나간 유성원은 올 때와는 달리 난데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가게 되자, 처음과 완전히 달라진 대우에 뭔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 뭔가 잘못했나? 거참, 물어보기도 뭐하네. 뭔가 시험받는 것일 수도 있고. 하여간 성좌들은 다 성격이, 참~’
“…….”
‘뭔가 이야기해 줄 법도 한데, 이 양반도 조용하네.’
잠시 뒤 어느 건물 앞에서 택시는 멈추었고, 오위를 따라 택시에서 내린 유성원은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연식이 오래된 허름한 아파트.
벽면의 칠이 다 벗겨지고, ‘E’로 보이는 알파벳도 색이 거의 다 바래서 흔적만 남아 간신히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후줄근한 상태였다.
유성원의 당혹스러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위가 한숨을 한 번 푹 쉬더니 다시 묵묵히 그를 안내한 것이다.
“이곳에 머무시길 바랍니다. 시내는 어딜 가셔도 좋지만 도시를 벗어나진 마십시오. 밤 10시까진 꼭 이곳에 계시고 아침 8시부터 외출이 가능합니다. 그 외엔 제가 별도의 전달을 하러 오기 전까지 대기해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네. 게다가 이거, 와… 원룸이네? 내 회사 기숙사랑 많이 닮았는데? 좀 낡은 냄새가 나지만…….’
단칸방으로 된 아파트에 들어간 유성원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일단은 머물기로 했다.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 건지는 아직도 감이 오지 않았지만, 아무튼 기사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으로 갑옷을 벗고 드러누웠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유청이랑 애들이 교섭을 하든가 정보를 얻어 올 테니 얌전히 있자. 하아암~”
복잡하게 머리 굴려 봤자 성좌의 생각을 따라갈 수 있을 리도 만무했기에 체력을 온존하기 위해 눈을 감고 그대로 수면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잠이 들었을 때, 그의 눈앞에 한 번도 보지 못한 색깔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당신은 ‘하하(下下)급의 민초(民草)’로 판명되었습니다. 아무 재능도 없는 당신은 얌전히 국가를 위한 노동력을 충실히 제공하며 살다 가시길 바랍니다.]
***
자금성, 신 봉왕궁.
유성원이 아파트에서 자고 있을 무렵, 기사들은 성좌 용봉왕과 짧은 대화를 마친 뒤, 다른 근위대장들에게 인도되어 알현의 궁에 맞먹는 또 다른 거대한 궁전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연회장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 거대한 연회용 궁전 안에는 단 6명의 기사들을 맞이하기 위해 수많은 테이블에 호화로운 산해진미와 술들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천 명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준비 중이었다.
“음… 이건?”
[‘별의 기록’에 남은 전설들을 맞이하기엔 너무 소박하지만 그래도 마련할 수 있는 건 모두 마련했네. 그리고 ‘기록’을 확인해서 그대들의 ‘별’에 있던 식사까지도 재현하도록 우리 조리사들에게 알려 주었고 말이야. 다만 술은 숙성 기간 때문에 마련할 수 없었지만. 아무쪼록 사양하지 말고 마음껏 먹고 마셔 주게.]
성좌 용봉왕은 장막으로 가린 작은 가마에 탄 채 기사들을 따라와 연회장을 직접 소개했다.
성좌의 안내부터 시작해서 이 연회장에 차려진 음식들은 고작 6명이 먹기엔 터무니없이 과했다.
“…….”
“이걸 뭐라고 생각해야 하지?”
“으음… 대장?”
기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건지 해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냥 온전히 주어진 대접이었다면 기탄없이 우호의 상징으로 여기고 받았겠지만, 지금 그들의 대장인 ‘유성원’이 없기에 다들 어쩔 줄을 몰랐던 것이다.
모두의 시선은 일단 자신들 가운데 제일 상급자인 진석과 참모인 유청에게 몰렸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 유청이 먼저 성좌 용봉왕에게 물었다.
“폐하는 어디 계십니까?”
[아~ 그는 내가 별도로 마련된 곳에 보내 놓았네. 그리고 잘 대접하고 있지. 그러니 걱정 말고 연회를 즐기게나. 더없이 드높은 전설을 무려 여섯이나 맞이하다니! 정말 즐거운 일이군! 하하핫!]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저희는 폐… 읍!”
“자자! 한잔하자고! 반갑게 맞이해 주는데 뭘 그러나? 하하핫!”
인상을 찌푸리며 반발하려는 유청의 입을 막으면서 슬쩍 끼어든 진석이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술잔을 그에게 건네주는 척하며 귓속말을 전했다.
“침착해라, 유청. 여기는 적지다. 폐하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저 성좌의 비위를 맞추고 지금 이 자리는 그냥 넘어가도록 해라. 언제든 성소에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오오, 이거 좋은 술이군요. 역시 성좌님이 열어 주신 연회답지만, 저는 이런 고급진 술보다는 이렇게 통에 담겨 있는 맥주를 한 번에 마시는 걸 더 좋아합니다. 하하하하핫!”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술잔을 비운 뒤 직원들이 나르는 술통을 들고 들이켜는 진석이었다.
진석의 말을 듣고 납득한 유청은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술잔을 들었고, 다른 기사들도 유청의 행동을 보고 진석의 뜻을 읽었는지 일단은 연회를 즐기는 척 각자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오… 이, 이! 고, 고향의 맛은 베르카식 소스! 어, 어떻게 여기에?”
[지금 이건 화신의 육체이지만 결국 저 천문 위에 있는 나 자신을 비롯해서 다른 화신과도 모두 통하고 있으니 시간과 코스트 정도만 갖춰지면 가져오는 게 충분히 가능하지. 아무튼 마음껏 즐겨 주게나. 남은 것은 일하는 친구들을 비롯해 다른 백성들에게 대접할 테니 말이야.]
경계하면서도 살아생전에 먹던 익숙한 맛을 다시 찾자 참을 수 없는 건지 흥분하는 이도 있었다.
성좌 용봉왕은 일단 연회를 즐기기 시작한 그들을 보고 신이 났는지 계속해서 다른 대접을 지시해 나갔다.
그렇게 기사들이 한참 화려한 연회를 즐길 무렵, 유성원은 아직 그 낡은 아파트 단칸방에 있었다.
『췐궈 쭈이 따더 메이뉘 루오리아오 찌에…….』
“…아, 맞다. 여기 중국이었지. 하아~ TV도 볼 게 없네. 후루룩… 으으! 이거 그냥 매운 맛인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맛이야? 윽! 켁켁!”
중국어를 전혀 모르기에 휴대폰 어플과 손짓, 발짓을 이용하여 근처 상점에서 사 온 컵라면을 먹는 신세.
요즘 세상에 역으로 찾기 더 힘든 브라운관 TV를 틀어도 전혀 알아먹지 못할 중국어만 나와서 어처구니가 없었고, 그것도 모자라 더 짜증 나는 건 겨우겨우 산 컵라면이 한국인인 그의 입맛이랑 완전 동떨어진 거라는 거였다.
“아… 짜증 나. 이상한 짓 하지 말라곤 했지만 먹을 건 선 넘었잖아. 애들 불러서 우리나라 컵라면 갖다 달라고 해야겠다. 보자… 가울프~! 가울프? 으음?”
결국 입에 맞지 않는 컵라면을 버린 유성원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기사들을 부르는데, 뭔가 묘했다.
본래라면 자신이 부르지 않아도 항상 지켜보고 있다가 부를 즈음이면 이미 성소의 포탈을 통해서 라면을 내미는 녀석들이었는데, 직접 불러도 답하지 않자 이상했던 것이다.
“으음… 뭔가 이상한데? 아칼론, 섬멸, 크록베인~ 멀블린~ 누가 대답 좀 해 봐……!”
다른 기사들은 물론 자신에게 굴복한 고블린 마법사의 이름까지 불렀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자, 유성원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상태창을 열었는데, 앞에 나타난 메시지가 뭔가 이상했다.
“뭐야? 이거?”
[유성원-하하(下下)급의 민초(民草)]
L-.--
--^---^-단의--
#%#-이—스
본래라면 레벨부터 시작해서 화려한 스테이터스들이 가득했을 유성원의 상태창이 지금은 마치 이상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컴퓨터인 양 내용에 노이즈가 잔뜩 끼어서 계속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뭐지? 이거?”
띵동!
[*당신은 하하(下下)급의 민초(民草)입니다. 아무 재능도 없는 당신은 얌전히 국가를 위한 노동력을 충실히 제공하며 살다 가시길 바랍니다. 노동할 장소는 곧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뜬 새로운 상태창에 유성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의미를 해석해 보려고 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아무튼 이 난감한 사태를 어찌해야 할지, 그리고 성좌 용봉왕이 대체 무엇을 노리는지 모르기에 혼란이 가득해진 유성원은 점점 초조해져 갔다.
뭐라도 대책을 세워야 했지만, 만리타국에서 기사들과 연락도 되지 않는 이 시점에서는 별다른 방안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