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큭!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지.”
트리토니아스도 멍청이는 아니며 그저 ‘가호’의 힘만으로 S급 헌터의 자격을 따낸 것은 아니었다.
버니버니에게 쫓기면서 일부러 그의 발차기를 맞아 함선 밖으로 날아간 그는 그로테스크한 피와 살점, 뼈가 아닌 진짜 바다의 영역에 닿자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비장의 수를 쓰기로 한다.
“나의 성좌이시여! 아버지이신 대양의 주인이여! 지금 당신의 적이! 이 바다를 모욕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당신의 힘을 빌려 주십시오!”
뿌우우우!
인벤토리에서 뿔피리 같은 것을 꺼낸 트리토니아스는 즉시 그것을 불었다. 그러자 황금 갈기호 주변으로 파도와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본래 이 지구상의 바다에 살지 않는 전설 속에 내려오던 바다의 생물들이 뛰어나와 황금 갈기호 위에 있는 도살왕의 악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스킬라! 자이언트 옥토퍼스! 켈피! 소드 피쉬! 머맨 소드맨! 바다를 모욕하는 자들을 모조리 없애라!”
“으음… 그래, 이래야 성좌의 싸움이지. 흐하하하하핫!”
“곧 있으면 라이스트리곤 군단도 돌아올 거고, 한국 쪽에 있는 천공섬! 일본에 있는 특무부대 헌터들이 지원 올 거다! 너의 여유도 거기까지다! 큭!”
첨벙!
함선 위에서 포탈을 열어 악마들을 지휘하던 이 목사는 트리토니아스의 반격을 보자 예상한 게 온 거라는 듯 피식 웃었다.
하지만 트리토니아스도 지지 않겠다는 듯 다른 바다 생물들과 함께 버니버니의 공격을 막으며 자신에게 유리한 바다로 가서 상대적으로 우월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오만했군! 아무리 그래도 5분 안에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뿅… 바다라. 이건 생각 못했다.]
투웅!
첨벙! 첨벙!
바다 위를 달리면서 공방을 벌이는 트리토니아스와 버니버니.
일방적으로 밀리곤 있었지만 ‘바다’에 온 이상 절대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생긴 트리토니아스는 능숙하게 대처해 나갔다.
특히 바다 위를 달릴 뿐만 아니라 공격을 받을 시 충격을 그대로 흡수하면서 바닷속으로 들어가거나 잠수해서 기습을 하는 등등,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충실히 살리는 그였다.
[뿅. S급 고기는 결국 맛을 못 보겠군.]
“애석한 일이군. 그래서 이제 몇 분 남았지? 돌아갈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음, 얼마 남지 않았지. 하지만 걱정 마라. 뿅. 여전히 멍청한 건 너희 쪽이니까……. 왜 5분만 빌렸을지 아직도 모르는 것 같군.]
함선에서 팔짱을 낀 채로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트리토니아스를 내려다보는 버니버니.
깔보는 말투로 왜 이 목사가 자신을 5분만 고용했는지에 대해 말했지만, 트리토니아스는 그 의미를 아직도 눈치 못 채고 있었다.
“5분? 글쎄? 그따위 거 알게 뭐야.”
[그렇군. 뿅~ 어느새 벌써 4분이나 지났군. 현명한 친구는 못 되나 보군. ‘바다’만 알지, 배의 상태도 모르는 걸 보니 말이야.]
“배?”
버니버니의 말에 순간 황금 갈기호를 바라보는 트리토니아스. 그러자 뭔가 이상한 게 보이기 시작했다.
배가 마치 살점과 피의 바다에 서서히 잠겨 가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놀란 그는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아랫부분을 한 번 더 살펴보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공간이 잘려 나간 듯이 말이다.
그러면 자신의 황금 갈기호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뿅~ 그러게? 하나 확실한 건 저 배 위에 있는 ‘이 목사’는 역시 너보단 훨씬 똑똑하다는 거지. 그럼 남은 시간은 40초. 더 안 싸울 것 같으니 나는 슬슬 퇴근 준비해야겠군. 무력함을 느끼며 수고해라, 바다의 아들.]
“이런 젠장!”
첨벙! 첨벙!
사태가 예상과 너무 다르게 흘러가자 트리토니아스는 급박하게 바다를 달려 배로 다가갔다.
그러곤 창을 휘둘러 아주 잠시나마 고기와 피로 이루어진 이 영역을 갈라내어 그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 아래에 펼쳐진 것은 바닷물이 아니라, 한 번도 보지 못한 또 다른 ‘별’이었다.
“이, 이건……!”
메마른 황무지, 붉게 타오르는 태양 아래 흐르는 피와 살점의 강, 수없이 쌓인 시체와 고기들을 먹는 악마와 짐승으로 가득한 세계.
그것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성좌 도살왕의 코어 던전으로, 그제야 이 목사의 의도를 눈치챈 트리토니아스였다.
이런저런 행동으로 간을 보고 마치 기습 작전으로 이 배를 먼저 없애려고 한 것 같았지만, 그건 모두 지금 이 배를 납치하려는 것을 숨기기 위한 블러핑들이었다.
“이런 미친……! 이 목사아아아!”
“허허, 버니버니 님, 적어도 계약에 대해선 시간 준수는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뿅! 어차피 다 끝난 일이고, 저 인간에게 절망을 줬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다급히 함선 위로 올라가 이 목사를 노려보는 트리토니아스였지만 그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모든 게 그의 술수대로였다. 자신들은 그걸 예측하고 넘겨짚다가 그만 모든 시간과 기회를 낭비해 버린 것이었다.
이대로 가면 이 황금 갈기호는 피 웅덩이에 빠져서 ‘성좌’의 코어 던전으로 넘어갈 판이었다. 완벽히 당해 버린 것이다.
‘이런 젠장… 어쩌지?’
[여기는 라이스트리곤 군단! 현재 신속히 귀환하고 있으나 적 스캐빈저의 방해로 지연되는 중… 반복한다.]
[트리토니아스 님! 배 안으로 계속해서 악마들이! 무, 물론 배 위에서 싸우고 계신 건 압니다만 빠르게 지원을!]
[여기는 올림푸스 길드 한국 주재팀, 아아! 앞으로 약 10분이면 도착한다.]
“허허허, 아무튼 시간이 다 되었군. 이 배랑 인간이랑 각종 물건은… 아주아주~ 잘 쓰겠다고 포세이돈 님에게 전해 주시게. 그리고~ 내리실 문은 왼쪽이라네.”
이 목사의 비아냥거림이 들려왔다. 이제 몇 초도 남지 않은 상황. 자신을 비롯해 파견된 올림푸스 길드원은 모두 그의 손바닥 위에서 춤춘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붕괴가 되듯이 빠르게 잠겨 가는 배의 주변이 서서히 핏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아마 전체가 다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주술이나 마법 같은 것이리라.
“이런 젠장!”
분함과 혼란, 자신이 좀 더 신중하기만 했어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자괴감, 그리고 같은 성좌 포세이돈을 섬기는 동료들을 두고 가야 하는 갈등 속에서 트리토니아스는 이를 악문 채 삼지창을 잡고서 이 목사와 그 옆에 있는 버니버니를 노려보았다.
이 배가 통째로 사라지려면 이제 수 초도 남지 않은 상황.
지금이라도 빠져나가면 자신은 살 수 있지만, 배 안에 있는 수많은 동료와 헌터들이 죽게 놔둘 수 없었다.
“후우우… 포세이돈 님에게 승리를! 이곳에 다시 강림한 판테온의 주신들이시여! 저희를 돌보소서! 황금 갈기호의 스태프들은 들어라! 나 트리토니아스가 반드시 너희를 모두 구할 것이다!”
분명 이건 최악의 선택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혼자서 도망친다는 선택을 절대 할 수 없었다.
자신마저 없다면 이 배 안에 남아 있는 동료와 헌터들은 지원 하나 받을 수 없는 코어 던전 안에서 자신을 원망하며 죽거나 저 미친 ‘이 목사’의 인체 실험 재료가 되리라.
트리토니아스로서는 그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확률이 매우 낮은 도박이라고 할지라도 싸우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올림푸스에 영광을!”
그 외침과 동시에 핏빛 기운이 황금 갈기호를 둘러쌌고, 그들을 비롯해서 피와 살점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망망대해만이 남았다.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강습정과 수송기의 인원들은 황금 갈기호의 행방을 찾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어 절규할 뿐이었다.
그것은 ‘이 목사’를 비롯한 성좌 도살왕의 부하들이 제대로 한몫 잡은 대승리였다.
***
요새 함선, 황금 갈기호. 헌터 및 전투 인원을 제외하고도 탑승 인원만 1만 5천에 달하는 이 함선을 통째로 탈취당한 일은 보통 사태가 아니었다.
물자적인 측면에서도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금액이 날아간 일이며, 그보다 더 큰일은 성좌 포세이돈이 열심히 키우고 육성한 전문 인원들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점과 올림푸스 길드의 명성에 큰 금이 갔다는 것이었다.
이번 사건이 일본과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알려지면서 그동안 부진과 함께 멸망하던 성좌 도살왕의 이름이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사도 이 목사’의 존재까지도 알려지게 되었다.
올림푸스 길드에게서 엄청난 도둑질을 한 그의 소재는 현재 불명이었으며, 아마 코어 던전 내부에서 무언가 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배를 잃은 라이스트리곤 군단은 그대로 일본에 상륙, 배의 소재를 찾고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에 있는 스캐빈저들을 쥐 잡듯이 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이 목사’의 언질을 받은 건지 성좌 도살왕 계열 스캐빈저들은 그 사건 이후 모두 숨어 버린 지 오래였고, 결국 피해를 보는 건 남아 있는 다른 스캐빈저들뿐이었다.
“와… 이게 무슨 일이래?”
그리고 이 소식은 한국에서 평온히 나날을 보내고 있던 유성원에게도 전해졌다.
얼마나 충격적이면 백가연 어르신이 곧장 소집을 걸어서 회의를 열 정도였는데, 그만큼 심각하고 중요한 사건이었다.
“아, 이제 왔구먼. 앉게나. 아주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네.”
“…얼마나 큰 사고이기에 이래요? 뉴스고 뭐고 다 난리던데…….”
“천공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성좌 포세이돈 세력의 보물, 바다에서 움직이는 요새 함선, 황금 갈기호가 그 인간 손에 통째로 털려 버렸네. 자네도 그건 알지?”
“…알 리가요. 우리나라 근처에도 안 오던 거잖아요. 일단 지금 위키로 검색해서 보는데… 히이이이익! 이게 뭐예요? 세상에, 항공모함보다 더 크네? 그냥 바다 위를 떠다니는 섬인데요? 이게 어떻게 통째로 털려요?”
인터넷에서 황금 갈기호에 대해 확인한 유성원은 눈을 크게 뜨고 뉴스 내용을 다시금 의심했다.
인류 최대의 요새 함선, 성좌 포세이돈의 사도들의 보물이며 탑승자만 1만 5천 명이나 되는 이런 거대한 함선을 어떻게 털었다는 말인가? 그것도 통째로! 이해가 안 갈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내막은 아직 수사 중일세. 증언을 해 줄 사람들이나 그 내용의 정보가 너무 적다고 하더군. 출동했던 강습정이라든가, 라이스트리곤 군단의 대원들이 통신 내역을 보면서 이유를 알아보고 있지만… 교전 기록밖에 없었다더군.”
코어 던전으로 사라진 황금 갈기호였지만 그 사실을 알려 줄 내용은 얼마 없었다.
트리토니아스는 코어 던전에 이동한다는 걸 거의 직전에 알았기에 외부에 알리지 않았고, 내부에서는 한참 엔진실과 중앙통제실을 노리고 달려오는 S급 헌터들과 갑판에 강림해서 깽판을 치는 성좌 도살왕 계열 악마들을 막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아무튼 확실한 건 ‘이 목사’가 무언가 수작을 부려서 바다에 떠 있던 황금 갈기호를 뿅! 하고 어딘가에 옮겼다는 것일세.”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도 하면서 진짜… 엄청난 사건이네요. 하, 이걸 도둑 맞냐?”
“단순한 도둑질의 문제가 아니라네. 우리에게도 불똥이 튀겠지. 알다시피 그 인간들, 우리 쪽과 가깝지 않은가?”
“아… 그렇죠.”
요새는 기세가 수그러들기도 했고, 또 천군대장군을 비롯한 사령 군단으로 장벽을 깔아 놔서 얌전했지만 성좌 도살왕 계열은 본래 북한 지역과 만주 쪽에서 활동하던 성좌 세력이다.
그런 만큼 한국과 연관이 깊었기에 현재 한국 최강의 헌터인 유성원 쪽에 어떤 의미로든 이야기를 걸어올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아… 머리 아프네요. 또 쪼아댈 걸 생각하면 더 짜증 나고요.”
“이미 그 디오메디아라는 헌터 아가씨가 조만간 호출이 있을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전해 주었네. 설마 이걸 안 가진 않겠지?”
“제가 아무리 제멋대로 행동한다곤 하지만 그 정도 눈치가 없진 않습니다. 휴우~ 이 목사랑 성좌 도살왕 애들 자료를 준비해서 갖다 바쳐야겠네요. 그리고 최고급 의료용 휠체어도 필요할 것 같고 말이죠.”
“아직도 요양 콘셉트를 유지하려고 그러나?”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말이죠.”
유성원이 말하는 불길한 예감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서 혹시라도 자신에게 떠넘겨서 해결하라고 할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그렇기에 곧바로 스태프들과 기사들에게 연락을 해서 올림푸스 길드의 호출에 응할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유성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