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허허, 이거 손님맞이가 너무 거칠군.”
“질문에나 대답해! 네놈은 분명 한국에 있어야 할 텐데! 대체 어느새 여기에?”
“내가 못 올 곳에 온 것도 아닌데… 아, 역시 성좌 포세이돈의 휘하들이라 바다 위에선 자존심이 강하다는 건가? 허허허.”
“대답해!”
트리토니아스는 놀라움의 연속이었기에 평소의 냉정함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다른 건 몰라도 바다 위에서 성좌 포세이돈의 사도인 자신의 감각과 시선, 권능을 피해 이 황금 갈기호에 올라온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
물론 하늘로 온다면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올림푸스 길드에선 이미 그 사실에 대비해서 다양한 장비와 시설을 갖춘 채 지켜보고 있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있나? 바다가 꼭 성좌 포세이돈만의 것이란 법은 없지 않은가? 저기 태평양에 자리 잡은 성좌 영원한 분노도 그렇지만, 지중해에 있는 성좌 딥 오브 블루씨, 성좌 바루나 같은 다른 해신(海神)을 칭하는 ‘성좌’도 존재하는데 너무 오만한 소리 같군.”
“그래, 차라리 그들의 권속이었다면 나도 이해했을 거다! 하나 너는 그렇지 않은 자가 아닌가! ‘이 목사’, 성좌 도살왕의 인간 요리사! 인간 요리로 식인귀들을 매혹시킨 자! 인간을 가축으로 전락시킨 자! 인간을 초월해 식인의 악마가 된 자! 오직 피와 살을 갈망하는 신의 사도가 된 네놈이 어떻게 이 바다에서 나를 속이고 올 수 있는 거지?”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건 자네들이 ‘바다’ 외에선 무능한 친구들이라는 소리이군.”
날카롭게 받아치는 이 목사의 말이었지만 트리토니아스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이런 유의 싸구려 도발은 이미 수없이 받아 봤고, 그에 따라 해 줄 수 있는 말은 당당히 준비되어 있었다.
“닥쳐라. 바다, 강물은 이 세계의 생명과 같은 존재! 이 지구 표면의 약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니 바다 외를 논하는 것은 언어도단! 잔재주로 나를 속였을지 몰라도 결국 너는 내 창과 이 바다에 무릎 꿇게 될 것이다.”
“‘이 바다’라? 지금 떠 있는 곳을 과연 ‘바다’라고 할 수 있나?”
“……?”
이 목사의 여유 있는 말에 트리토니아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이 목사의 웃음에서 느껴지는 두려움, 그리고 머나먼 함선 바깥 부분부터 시작되는 바다의 풍경이 갑자기 진하게 붉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몰려오는 피비린내와 썩은 고기 냄새. 함선 외곽으로 간 트리토니아스는 바다의 풍경을 바라보자마자 깜짝 놀라 안색이 파래졌다.
“이, 이건… 우, 우우웁!”
웬만한 전장과 던전을 오가면서 볼 꼴, 못 볼 꼴 다 본 그였지만, 함선 아래에 펼쳐진 그 광경엔 토악질이 올라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아래에 펼쳐진 것은 ‘바다’가 아니었다.
피, 내장, 살점, 뼈와 같은 것들이 흐르고 부풀어 오르면서 점점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모습. 바닷물이 오염되는 건 둘째 치고 이대로 있다가는 이 요새 함선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건 ‘바다’가 아니지? 허허허, 그야 그렇겠지. 그것은 위대하신 우리 성좌 도살왕 님의 ‘별’에 흐르는… ‘피의 강’이나 ‘피의 바다’ 같은 건 시시하지만 대충 그렇게 알아 두게나.”
“말도 안 돼. 이런 걸로 바다를 오염시켜서 왔다고 해도 우리 애들이 못 찾을 리가…….”
“아니, 올 때는 그냥 옥션에서 바다의 성좌에 관한 성물을 사서 썼을 뿐이라네. 허허허.”
‘이 목사’의 말재간에 완벽히 농락당하는 트리토니아스. 그래, 이곳까지 온 방법은 딱히 별거 없었다.
말로는 일단 ‘옥션’이라고 했지만 그 또한 ‘성좌 도살왕’의 상점을 이용해서 적절한 물건을 사서 썼을 뿐이다.
[컁컁! 어머나! 최근에 승천하신 이 목사님이시네요? 컁컁! 찾으시는 거요? 바다? 아! 물론 있죠. 그분의 사도들이 정복한 수많은 ‘별’들의 ‘바다’에서 얻은 각종 성물이 말이죠. 컁컁!]
“내 말하지 않았나? ‘바다의 성좌’는 ‘포세이돈’ 하나뿐이 아니라고 말일세.”
트리토니아스는 이런 방법을 쓰는 스캐빈저가 있다는 것이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보통 스캐빈저들이라면 기본적으로 자본력이 달리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이런 거창한 방법을 사용해서 싸우는 도박을 하지 않고 도망치는 게 주 전법이었다.
그리고 전선에서 싸우는 다른 성좌들은 다른 성좌의 힘이나 유물을 빌리는 방법을 싫어하고 말이다.
“성좌 도살왕은 부하들이 다른 신성의 힘을 빌리는 것도 좋아하시나?”
“아니, 내가 좀 특수한 계약을 맺어서 말일세. 허허허, 혹시 베드로라고 아나? 예수를 세 번 부정한 그자 말일세. 결국 성인(聖人)의 경지에 올랐지.”
“…대강 알겠군.”
저 신앙심으로 가득 찬 광인(狂人)은 신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자다.
그저 섬길 수 있는 걸로 감사해할 뿐. 열심히 일할수록 보상을 주는 것이 ‘성좌’인데, 그는 계속 섬기기기만을 바랐고, 결국 받길 원하지 않는 이 목사가 받은 것은 바로 자신의 ‘성좌’를 세 번 거역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한 번은 저번에 S급 헌터를 잡을 때 썼었고, 이번에 다른 바다의 성좌의 유물을 사용하면서 쓴 것이다.
“아, 하지만 이 배 밑의 바다를 바꾼 건 오로지 그분의 권능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허허허.”
“이 역겨운 짓을 할 수 있는 성좌가 달리 있을까? 관제실! 들리나? 지금 당장 배를 움직여라! 이대로 있다간 고기와 장기에 걸려서 배가……!”
배 밑에 쌓이는 저 역겨운 침전물들이 점점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고, 그렇게 되면 이 배는 섬이 되어 갇히고 말 것이다.
‘바다’의 힘과 권능을 못 받는 것도 문제였기에 트리토니아스는 곧바로 이동 명령을 내렸지만, 이 목사는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그 순간, 통신으로 폭발음과 함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콰아아아앙!
[으아아악! 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안에! 기관실과 엔진실에! 적들이! 크아악!]
“라이스트리곤 군단을 빨리 호출해!”
[이미 강하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시 수송기에 타고 돌아오려면 집합 포인트를… 으악!]
“…이 중요한 기회에 나 혼자 왔을 거라고 생각했나?”
“젠장!”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트리토니아스는 무기를 들고 이 목사를 노려보았다.
역시 자신의 우려가 정확했다.
저 성좌 도살왕의 부하 놈들은 보통이 아니었다. 역시 자신의 예상을 넘어선 방법으로 의표를 완벽히 찌른 것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해결법은 저 ‘이 목사’를 없애고, 지금 출동한 이들을 다시 불러서 없애는 길뿐이다.
“가만두지 않겠다!”
“으음… 당연히 덤벼 오겠지. 하지만 자네의 상대는 내가 아닐세. 버니버니 님, 이제 당신의 차례입니다.”
[뿅. 알았다.]
달려오는 트리토니아스의 앞에 붉은 차원문이 열리더니 거기에서 토끼의 형태를 한 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10마리 중 대부분이 죽어 이제 셋. 이 목사까지 합쳐서 넷이 남은 아크데몬 비스트 중 하나, 토끼 수인인 버니버니였다.
밖에 잘 나서지 않는 타입이며 성좌 도살왕의 코어 던전 가장 깊은 곳을 지키는 아크데몬 비스트들의 정점이었다.
“…토끼? 큭!”
쿠우우웅!
처음엔 붉은 눈에 새하얀 털을 지닌 아름다운 토끼 수인인 것을 보고 순간 놀랐지만, 날아온 그녀의 발차기 한 번을 막자마자 그런 생각은 싹 사라졌다.
포세이돈의 가호와 헤파이스토스의 사도들이 만든 갑주를 입고도 전해지는 묵직한 위력. 배의 합판이 우그러지면서 자신의 발목까지 아래로 내려갔다.
[뿅. 또 외양만 보고 날 우습게 보는 놈인 건가? 이래서 나오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튼 약속한 시간이 5분이니까 그 안에 전력으로 처리하겠다. 뿅. 약속 잊지 마라.]
“감사할 따름입니다. 토류 님을 부르고 싶었는데 그분은 바다와 상성이 안 좋으셔서 말이죠. 아무튼 저 S급을 잡으시면 제가 잘 조리해서 만들어 드릴 거고, 이 ‘사냥터’에서 사냥한 모든 시체를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면 되었다. 그럼… 무영승천(無影昇天)!]
콰아아아! 탕!
무시무시한 투기를 뿜어내며 달려오는 버니버니였다.
발 구르기 한 번에 함선 바닥이 우그러지고, 잔상과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속도의 공격에 트리토니아스는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크악! 이런 젠장!”
정말 놀랄 일의 연속에 트리토니아스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본래 성좌의 사도 몬스터들인 S급 몬스터들은 다들 오만하기에 인간에게 명령을 내릴지언정 인간의 명령을 듣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으로 사도로 승천했다곤 들었지만, 그래 봐야 결국 몬스터 아래라고 생각했는데…….’
“명령한 게 아니다. 그저 ‘부탁’을 드렸고 ‘거래’를 했을 뿐이지. 아무튼 수고해 줄 친구들도 불러야겠군.”
S급 헌터인 트리토니아스를 버니버니에게 맡긴 이 목사는 다른 게이트를 열어 도살왕 휘하의 일반 악마들을 불러내어 이 황금 갈기호를 점령하기 위한 작업을 개시했다.
내부에 잠입해 있는 박숙자와 곽원호를 슬슬 지원해 주기도 해야 하고, 빨리 내부와 무기 시스템을 장악하지 않으면 출격했던 자들이 돌아오기 때문에 신속하게 해내야만 했다.
“B-37 블록 폐쇄! 하지만 부서졌습니다!”
“보안 시스템 가동! 자동 포탑과 드론, 가스! 모두 살포했지만 무용지물입니다!”
“알파 진압팀 전멸! 잠입해 온 자의 스테이터스와 마력 반응을 측정해 본 결과, 못해도 S급 헌터입니다!”
“계속 봉쇄해!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함선 위에서 트리토니아스 님이 교전 시작! 상대는 S급 몬스터로 추정되는 마력을 발산 중! 혼자선 무리입니다!”
“이런 젠장! S급 헌터 둘에 S급 몬스터라고? 말도 안 돼! 그걸 아무 감시 시스템에 걸리지 않고 잠입시키다니!”
그리고 배의 중앙 통제실에선 약 15분 전의 여유가 어디로 갔는지 매우 급박하고 바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내부에 잠입한 것은 S급 헌터 둘. 하나는 엔진실로 향하고 있었고, 하나는 이곳 통제실을 향해서 오는데 각각 개인 전투력이 스캐빈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막강했다.
이 황금 갈기호는 적의 탈취를 방지하기 위해 상시 거주하는 헌터들을 비롯해서 보안 시설이 모두 잘되어 있었는데, 적들은 그걸 모두 돌파한 것이었다.
“아! 이 목사, 개XX야! 뭐가 쉬운데? 이게 어디가 쉬운 거냐고? 야! 원호, 거기는 편하냐?”
[전혀 아닙니다. 젠장! 블록 하나 넘어가기가 빡세요. 원래라면 잘 부르지도 않는 ‘데몬 하운드’를 부르게 하다니! 이 녀석 한 번 부르면 무조건 적자인데! 이거 이 목사님이 커버해 주겠죠?]
“몰라! 썅! 으랏챠아아아!”
쿵! 우그그그극!
박숙자가 악마화된 팔을 휘둘러 문의 격벽을 부수고 넘어가자, 다음 방에서는 진압팀이 사격 준비를 한 채로 이미 대기 중이었다.
역시 올림푸스 길드라는 건지, 구역 하나 건널 때마다 이렇게 철저히 준비를 해 두어서 엄청 짜증 나는 상대였다.
박숙자 인생에 이렇게 격전을 치른 건 생전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주력이 돌아오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는 건데… 후우~ 원호! 너는 어디까지 갔냐?”
[엔진실 거의 다 왔습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중앙 통제실 아닙니까? 얼른 가시죠.]
“아! 가고 있다고! 근데 이 자식들, 저항이 장난 아니란 말이야! 젠장!”
일부러 상대할 전력을 줄이기 위해 나눠서 갔는데도 상대의 저항은 엄청 거셌다.
출동한 적의 부하들이 돌아오기 전에 각자 목표인 중앙 통제실과 엔진실을 장악하는 게 임무였지만, 역대급으로 힘든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이 황금 갈기호뿐만 아니라 이 안에 타고 있는 올림푸스 길드의 헌터를 비롯해서 수많은 재보를 얻을 찬스였기에 그녀는 대기 중인 진압팀을 돌파하기 위해서 이 악물고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