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후~ 내가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자네의 임무는 모든 ‘성좌’를 없애는 것. 그러려면 지금 이 세계를 침공한 악 성향 성좌와도 손을 잡을 각오도 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드네.”
“…그런가요?”
“그렇지. 아까도 말했다시피 올림푸스 길드 같은 곳을 남기면 결국 자네는 사냥감을 다 잡은 뒤의 사냥개 취급을 받게 될 테니까.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선 서로 소모전을 벌이게끔 만들고, 균형 있게 성좌들을 철거해서 종국엔 자네 혼자 제압 가능한 수준만 남기는 거지.”
“하아아아… 어렵겠네요.”
“그렇다네. 어쩌면 성좌 도살왕의 부하들과 손을 잡을 각오도 해야 할 걸세.”
결론은 성좌 도살왕의 부하들만 잡을 게 아니라, 성좌 올림푸스 길드의 인간들도 적절히 부숴 가면서 균형 있게 처리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냥 한쪽만 부수면 되는 입장이 아니라서 더더욱 어려운 과업. 심지어 때에 따라선 백가연의 말대로 성좌 도살왕의 인간 사냥꾼과도 손을 잡을 각오까지 해야만 했다.
“제 기사도가 난리 나겠네요.”
“그 이전에 세계 각국의 정부부터 걱정하는 게 어떤가? 나는 그게 더 걱정인데?”
“그것도 그러네요. 하아아~”
외국에 대해 따로 조명하진 않았지만, 현재 성좌의 존재 덕분에 기존 선진국과 그 외 국가 간의 밸런스가 많이 뒤흔들어진 상황.
이미 아프리카 대륙과 남미, 인도는 새로이 대격변을 이루어 낸 지 오래였다.
먼 곳에 대한 이야기를 빼더라도 기존에 패악질을 부리던 중국이 넷으로 갈라져서 세계의 위기 하나가 사라진 것만 해도 다행이었는데, 만약 성좌 용봉왕과 성좌 진황을 없앤다고 하면 세계 인류가 모두 반발하게 될 것이다.
“후우우… 암담하네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려 해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도 없고…….”
“그저 하나의 의견일 뿐이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게. 아직 이 세계에는 정복과 지배를 원하는 성좌들이 더 많고, 그렇기에 위기이니까 말이야.”
“예.”
“늙은이가 시답지 않은 말을 해서 괜히 더 머리 아프게 만들었구먼.”
“아뇨. 좋은 조언이었습니다. 후우우~ 어르신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유성원의 모습에 백가연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지지리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던 유성원이 스스로 상담을 요청해 온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것이다.
대화를 끝낸 유성원은 인사를 한 뒤 그대로 사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볼일은 대강 다 봤으니 이제는 일본에서 데려온 세 아이들을 만나러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본래 일본에서는 번호로 불리던 아이들은 유재영, 유하영, 유수영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는 아영이와 함께 팀을 이루어 아이언 포트리스와 전선 도시를 왕복하며 지내고 있었다.
아이언 포트리스에서 수업을 끝낸 아이들은 현재 지하에 새로 공사해서 마련한 전선 도시 직행열차역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것을 안 유성원도 아이들과 함께 전선 도시에 가기 위해 지하로 내려왔다.
“오! 파파!”
“아빠다!”
“아버지!”
아영이보다 살짝 어린 세 사람은 유성원을 발견하자마자 손을 흔들면서 다가왔다.
셋 다 나이에 맞지 않는 감청색 전투복을 입은 모습이었는데, 몇 번이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어도 된다고 했지만 특무부대에서 오래 지낸 탓인지 다들 이 복장이 편하다며 그대로 고수했다.
그리고 유성원이 코어 던전에 가 있는 동안 3명 다 한국어를 마스터했는지 의사소통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다만 지극히 오해를 살 호칭으로 그를 부르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코어 던전에 간 사이에 이미 모두 합의해 버려서 어쩔 수 없게 되었지.’
“오늘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너희랑 같이 아영이 보러 가려고 했지. 데려와 놓고 제대로 보살펴 주지도 못했는데… ‘코어 던전’에서 나왔고 뒤처리도 끝났으니 이제라도 잘 돌봐 주려고. 아무튼 같이 열차 타고 전선 도시로 가자. 간만에 다 같이 밥이라도 먹게.”
“예!”
일본에서 데려온 뒤 코어 던전 공략으로 인해 서로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지만 신소미 모녀가 잘 돌봐 주기도 했고, 자신들과 유사한 처지의 아이들이 아이언 포트리스에 가득했던 점, 그리고 유성원 또한 과거 자신들처럼 인권이라고는 없는 최악의 시설에서 자랐다는 점을 알자 금방 벽을 허물고 가까워질 수 있었다.
덕분에 지금처럼 유성원을 아버지라 칭하며 친근감을 표시하는 거였다.
“그럼 밥 뭐 먹고 싶냐?”
“부대찌게요!”
“나는 낙곱새!”
“저는 뜨끈한 국밥요.”
“…너네 이제 한국인 다 됐구나.”
“애초에 일본 음식은 먹은 적도 없는걸요?”
“먹는 것에서도 차이가 생긴다고, 약이랑 이상한 것만 먹였고…….”
“아, 그나마! 전투식량 먹어 본 적 있어요! 그리고… 새해에 도시락! 그렇지만 역시 여기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그렇게 눈물날 것 같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네 사람은 직행열차를 타고 전선 도시로 향했다.
역시 자본과 인력,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라는 이름 덕분인지 수개월 만에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메가 시티의 모습을 보여 주는 ‘전선(戰線) 도시’였다.
정부 부처만 있었다면 여기가 수도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와, 신강남을 만들던 기술자들도 들여서 그런가? 실력이 대단하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선 도시를 빠르게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엔 신강남을 건설했던 기술자들의 노하우가 있었다는 게 또 의외의 사실이었다.
유성원이 패황천검류로 부숴 버려서 일견 약하게 보였지만, 엄연히 오랫동안 성좌 산거정의 세력을 안전하게 막아 내어 주던 방파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성능을 자랑했다.
“진짜 몇 번을 봐도 놀랍다니까……. 황무지에 덩그러니 막사랑 성만 세워 놨는데, 어느새 이렇게 될 줄이야.”
다시금 봐도 여기가 자신의 도시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근래엔 너무 바빠서 이렇게 도시를 느긋하게 돌아다닐 기회가 없었는데, 번영된 도시, 안정된 질서와 치안, 곳곳에 천검군 병사들과 아이언 포트리스의 인원들이 돌아다니면서 일하는 모습을 보자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전선 도시 중심에 있는 사령부에 도착해 그곳을 올라가는 유성원과 아이들이었다.
***
올림푸스 길드, 한국 주재 천공섬.
한국에 주재 중인 천공섬에서는 현재 세계 각지의 천공섬에 자리한 올림푸스 길드의 간부들이 영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대화의 내용은 역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 ‘별’을 점령하려는 다른 성좌 세력과의 전쟁과 거기에 따른 인원 보충, 그리고 상황 파악 등등 다양했지만, 목적은 오직 단 하나.
이 ‘별’에 대한 모든 위협을 없애고, 올림푸스 길드를 구성하고 있는 열두 ‘성좌’가 이 지구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황금 기사는 아직도 그 상태인가? 트리토니아스?』
“예. 일단은 계속 연락해 보고 있지만, 여전히 요양 중이라고……. 코어 던전이라는 곳이 쉬운 곳이 아니었던 만큼 강요하기가 좀 그렇습니다.”
트리토니아스는 현재 미국에 있는 올림푸스 길드의 본사, ‘진(眞) 천공 도시 올림푸스’에 있는 사도들과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주제는 역시 트리토니아스가 관리 중인 동아시아 정세에 관한 것이었는데, 일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성원을 동원하려 했지만 무리라는 내용이었다.
『흐으음, 그렇다곤 하나 기사들은 보낼 수 있을 터인데?』
“그게… 내부 정돈이 필요하다면서… 애초에 그는 일본을 무상으로 구원하는 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의와 인명에 대해선 전혀 고려가 없는 건가? 대체 그놈에게 그런 힘을 준 ‘성좌’는 무슨 생각인지……. 아무튼 일본의 상황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하는데…….』
“예. 인구도 그렇고 경제 규모도 그렇지만 미국 정부에 우호적인 국가라 동아시아 지정학적 교두보로서 중요하기 때문에 국력을 유지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후우~”
유성원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상황.
전 세계의 주요 전선을 커버하는 올림푸스 길드로서는 그 같은 강함을 지니고 있으면서 속물적이고 제멋대로인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코어 던전을 다녀와서 그 후유증에 시달린다는데, 강압적으로 끌어내면 올림푸스 길드의 대의에 손상이 가는 것이다.
심지어 전선 도시 위엔 성좌 66천마의 남은 군세들까지 자리 잡고 있어서 못 갈 이유로는 충분했다.
“…역시 코어 던전 공략을 한 게 너무……. 사실 저희도 코어 던전 공략 후에는 반년 이상의 휴식을 보장하는 게 기본이잖습니까?”
『흐음… 그렇긴 하지. 하나 상황이 날로 급박해지고 있네. 일본은 그야말로 부모 없는 어린 양처럼 뜯어먹히고 있지. 이런 사태가 길어지면 절대 안 되네.』
“예. 어쩔 수 없이 제가 파견을 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병 주고 약 주는 격이지만, 어쩌겠습니까? 일본이 무너지면 상황이 심각해지니… 쩝. 여기는 디오메디아에게 맡기고… 아, 유럽 쪽에서 용병 부대도 고용할 생각입니다.”
결국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올림푸스 길드는 한국과 동아시아 쪽을 맡은 S급 헌터인 트리토니아스를 일본에 파견하기로 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인 일본은 포세이돈이 내린 ‘트리톤의 가호’를 지닌 그에게 아주 유리한 곳으로, 바다를 통해 기습 및 정보 탐사 등을 할 수 있었다.
『그러도록 하게. 그리고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본진에서도 일본 쪽으로 가는 척 움직여 주겠네.』
“그러면 더욱 감사합니다.”
『제스처뿐이고, 사실상 보급이지만 도움이 되긴 할 게야. 지금 여유가 너무 없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곧바로 준비를…….”
『아, 하나 더 전할 게 있네.』
용건을 마친 트리토니아스는 그대로 통신을 끄려 했지만, 갑자기 들려온 말에 행동을 멈추고 화면을 응시했다.
『조만간 그쪽으로 ‘뤼카이온’이 갈 걸세.』
“…예?”
뤼카이온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트리토니아스의 표정이 마치 벌레를 씹은 듯 굳어졌다.
그리고 떠올리기만 해도 불쾌한지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화면을 향해 다시금 물었다.
“…그 망나니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또 이곳에 온답니까? 황인종 원숭이는 질렸다고 말하던 인종차별주의자 놈이…….”
『말조심하게. 비록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타입이긴 하나 엄연히 ‘제우스’ 님의 사도 중 한 명이며 그분의 ‘가호’ 중 하나를 직접 받은 자일세.』
다른 가호도 아니고, 성좌의 ‘가호’를 일부라지만 직접 받은 자라는 것에서 무게감은 남달랐다.
성좌 제우스의 힘과 능력을 일부 가졌으니 그야말로 일반적인 헌터와 궤를 달리하지만, 그래도 트리토니아스의 혐오감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예. 그건 압니다만, 솔직히 그놈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체 왜 제우스 님의 가호를 받은 건지도 이해 못할 정도구요.”
『하나 그에게는 ‘성좌 제우스’ 님이 내리신 사명이 있네. 아무튼 가면 잘 좀 돌봐 주게. 그리고… 사고 치는 거 뒤처리도 해 주고.』
“어차피 호위대로 유피테르 가드 놈들이 버티고 있는데… 걱정할 게 뭐 있겠습니까? 아, 잠깐만! 혹시나 싶지만 한국엔 가지 말라고나 전해 두십시오. 페르세이아 님과 맞선 놈이 거기 있으니까요.”
『…일단 말은 해 두겠네. 우리 말을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아아~”
성좌 본인의 ‘가호’를 받은 자라서 오만함이 하늘을 꿰뚫기에 자신들의 말을 들을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들은 트리토니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자신은 이제부터 일본에 가서 매우 바빠질 몸인지라 한편으론 걱정이 되면서도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 아니기에 디오메디아에게 조언만 해 주자 마음먹고는 통신을 종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