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으으음…….”
자연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유성원은 기력이 회복되자 서서히 눈을 떴다.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안도감과 그리운 자연의 향기 속에서 의식의 한계로 인해 그대로 잠이 들었고, 몇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
“여기는… 트레일러? 아, 우리 애들이 챙겨 줬나 보구나. 흐아아아암~ 아… 정말 코어 던전, 거기 진짜… 아아…….”
정말 무섭고도 진저리 나는 곳이었다.
똑같은 풍경만 보면서 먹고 자고 싸는 일 빼면 주사위를 굴리고 게임만 하는 곳이었지만, 그 두려움과 패배감,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깎여 가던 정신줄을 생각하면 정말 미치지 않고 잘도 살아 돌아온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아… 머리가 하얗게 되어 버렸네. 무슨 할아버지도 아니고, 에휴~ 다시 날 때까진 염색해야 하나?”
새까맣던 머리가 새하얗게 세어 버리고, 몇 년은 늙은 듯 피부도 거칠어진 상태였다.
당분간 안정을 취하고 영양 섭취를 하면 금방 나아지겠지만, 당장 외모가 변해 버리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물 한 잔을 마신 뒤 좀 더 쉬기 위해 침대로 다시 가려는데, 바깥이 왠지 시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 몬스터가 나오는 곳이었지? 성좌 66천마의 사령들은 그렇다고 쳐도 야생 몬스터 같은 게 있을 테니까… 좀 이동하자고 할까? 아, 애들 있네.”
던전 입구가 어떤 곳이었는지 생각해 낸 유성원은 몬스터의 소리이겠거니 하고 안심하던 중 창밖으로 기사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던전 안에서 ‘장기말’이라는 형태로 그들의 죽음을 목격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슬픔은 실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패배해도… 돌아올 수 있는 게 참 다행이었지. 진짜… 거기서 그냥 죽는 줄 알았네. 아무튼 애들에게 이동 좀 하자고… 뭐야?”
위잉! 두두! 구구구구궁!
트레일러의 문을 열자 무지막지한 소음과 풍압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바람을 맞으며 유성원은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에는 전투용 헬기 수십 대가 떠 있었고, 멀리 장벽 쪽에선 군대와 헌터들이 비상사태인 것처럼 진형을 이루고 있었다.
기사들 또한 트레일러 주변에서 무기를 든 채로 유성원을 지키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아, 폐하! 일어나셨습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내가 벌써 코어 던전 클리어하고 안에서 뭐 좋은 거 얻었나 싶어서 그거 노리고 모인 거야? 얼씨구~”
“그게 아니옵니다, 폐하! 반대편! 반대편을 보시옵소서!”
유성원을 맞이한 진석이 트레일러 반대편을 가리키면서 외쳤고, 그에 유성원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슬쩍 가서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기엔 대지를 가득 메운 성좌 66천마의 사령 군대와 그들의 앞에 거대한 사령말을 탄 채 도열해 있는 각 대장군 몬스터들이 보였다.
“어우… 이건 확실히 비상사태네. 젠장!”
철컥! 쿵!
사태를 파악한 유성원은 곧바로 무장을 한 뒤 대장군들과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유를 짐작해 보았는데, 성좌 66천마가 이 세계에서 손을 떼었으니 이곳에 투입된 사령 부대는 붕 떠 버리게 된 것이리라.
“사령들이야 뭐, 죽으면 자기 ‘별’로 돌아가지만 고용된 너희는 역시 붕 뜰 것 같더라. 안에선 다른 의미로 피똥 싸느라 제대로 못 싸웠지만, 아무튼 간만에 몸이나 한번… 음?”
[나 천군대장군, ‘성좌 66천마’ 님과의 결전을 통해 ‘코어 던전’에서 승리를 쟁취한…….]
“스톱, 스톱! 저기, 나 승리 안 했거든?”
엄연히 던전 안에서는 패배한 채로 나온 것이었기에 유성원은 황급히 정정에 들어갔다.
실제로는 무사히 살아 돌아왔고 목적을 달성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기지 못한 것을 이겼다고 할 만큼 안면이 두껍지 않았기에 정확히 하고자 한 것이다.
[전쟁의 승리란 꼭 적을 쓰러뜨리는 것만은 아닌 법. 이 땅에서 그분을 몰아낸 것만으로도 그대의 승리는 확정된 상황이다. 그리고 우리는 본래 성좌 66천마 님의 명을 따라 원정을 진행하던 몸인데… 그대가 이곳에서 그분을 사라지게 하였다.]
“그러면 얌전히 돌아가면 되잖아.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방법으로 슝~ 돌아가시면 됩니다.”
[그게… 그대가 성좌 66천마 님을 이곳에서 떠나게 하는 바람에 무리다.]
“아니, 잠깐만… 그분이 안 챙겨 갔어? 뭐라고 하지도 않았고?”
[뒤처리는 그대가 해 줄 거라고 말씀하셨다. 재미있을 거라면서 말이지.]
‘…일부러 나한테 떠넘겼구나! 그 성좌!’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별의 소원으로 자신을 ‘지구’에 입장 불가로 만들었으니 그다지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고, 그 뒤끝으로 유성원에게 지구의 정복을 위해 배치했던 사령과 대장군들을 짬처리시킨 것이리라.
코어 던전의 경험으로 성좌들의 성격이 멀쩡하지 않은 걸 이제 아주 잘 알게 된 그는 곧바로 납득하면서 물었다.
“그… 하나 묻겠는데, 만약 내가 안 거두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음, 그러면 우리는 전멸할 때까지 끝없이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겠지. 지혜와 용기, 무용을 모두 써 가며 말이야.]
“…….”
동시에 천군대장군의 뒤로 다른 대장군들의 투구 속에 있는 안광이 번뜩였다.
이건 거의 뭐, 받지 않으면 가만 안 둔다고 하는 무력시위나 다름없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한국은 둘째 치고 일본, 미국에서 죽기 전까지 싸운다고 할 기세였다. 그렇게 되면 피해가 커지기 때문에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시간을 조금만 줘라. 코어 던전 갔다가 이제 막 나왔는데… 정리할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아. 사람을 나중에 보낼 테니, 일단은… 얌전히 일본에 가 있어. 알았지?”
[알겠다. 그럼 이제부터 그대를 우리의 대장으로 섬기겠다. 호칭은… 그래, 쇼군이 어떤가?]
“절대 부르지 마라.”
[…마음에 안 드나 보군. 그러면 태합님은? 우리가 있던 곳의 높으신 분의 호칭이다만?]
산 넘어 산이라고, 대한민국 사람으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호칭을 줄줄이 내뱉는 천군대장군이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싸워 와서 그런지 거기 문화에 물든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납득할 수 없는 건 사실이었기에 유성원은 자신의 호칭을 분명하게 정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호칭 많은데 왜 이렇게 열 받는 것만 부르냐? 지휘관, 사령관, 닥터(?), 기사군(?), 제독(?) 등등 많잖아!”
[…그럼 사령관으로 부르겠다. 좋다, 사령관. 일단 지금은 물러나겠다. 가능한 한 빨리 우리의 검을 쓰게 해 주길 기다리지.]
결국 적절한 예시들을 나열해 주자 알아서 고르는 천군대장군이었고, 자신들을 빨리 불러 달라는 이야기를 남긴 뒤 물러났다.
사령 군대가 물러난 것을 보자 긴장감이 풀린 유성원은 갑옷을 해제하고 그대로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져 쓰러졌다.
아직 완전히 안정된 상태가 아닌데 무리해서 무장을 하고 긴장감을 높여 버린 탓이었다.
***
유성원의 귀환 소식은 그가 아이언 포트리스에 들어가는 순간 한국 전역은 물론 세계로 퍼져 나갔다.
내부 사정은 모르지만 일단 그가 코어 던전에서 살아서 귀환을 했고, 더 이상 코어 던전 입구가 생기지 않았으며, 동시에 성좌 66천마의 모든 군대와 사령들이 움직임을 멈추거나 한 곳에 모여 있기만 한 것을 알아챈 한국 정부에선 그가 클리어하고 나온 것이라 생각하였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용케 성공했구먼. 몰골이 말이 아니긴 하지만 말이야.”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부터 시작해서 안색도 창백했던 만큼 누가 봐도 고생한 흔적이 짙은 유성원이었다.
SS급에 등극한 이후로는 패배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압도적 강함을 자랑하던 그가 이 정도로 고생한 건 얼마 전 하데스의 사도와 싸울 때 빼곤 전혀 없었다.
“그… 엄밀히 말하면 성공한 게 아니긴 한데, 조건부 승리라고 해 둘게요. 목적은 이뤘으니까요. 하지만 정말… 끔찍했어요.”
“자네가 끔찍할 정도면 어지간했겠구먼.”
유성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누워 있는 그에게 백가연은 그동안의 소식과 앞날의 일정에 대해 천천히 말해 주기 시작했다.
“우선은 근 반년 넘게 자네가 없는 동안 아이언 포트리스와 전선 도시는 현상 유지를 목표로 힘써 왔고, 어찌어찌 잘 끌고 오긴 했네. 하지만 역시 자네랑 천검군 병사들이 없으니 여기저기 균열이 생기더군.”
“그랬나요?”
“그렇다네. 일단 자네가 시설에서 구해 온 아이들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 친구들이기에 문제가 없었네만, 문제는 시코쿠에서 구해 온 일본인들일세. 타국에 와서 믿을 수 있는 자네가 없어지자 동요가 시작되었고, 또… 천검군 친구들이 관리해 주던 입장 시스템이 우리가 하니 그들처럼 완벽하지 못해서 전선 도시에 몰래 들어온 외부 인원들이 많네.”
“그랬군요. 그럼 바로 지시해서 족쳐야겠네요.”
“뭐, 유청 경이 남아 준 덕분에 그리 큰 사고는 치지 않았네. 아무튼 자네가 돌아왔으니 모두 해결될 일이지. 좋은 경험이기도 했네.”
유성원의 존재가 이곳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다시금 알 수 있던 기간이었다.
그렇게 어르신과 이야기하고 난 뒤엔 소미 모녀가 유성원의 좌우에 앉았다.
오랫동안 그의 안부를 걱정한 건지 둘 다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유성원을 바라보았다.
“고생 많이 한 것 같네요. 머리가 이렇게 하얗게 셀 정도라니…….”
“허세 부리고 싶지만 그게 안 되네요. 하아~”
“염색약 곧바로 알아볼게요.”
하얗게 되어 버린 머리도 머리이지만, 피폐해진 모습에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신소미와 달리 신아영은 드디어 고난에서 해방되었다는 듯한 미소와 함께 유성원에게 달라붙으며 소리쳤다.
“살아서 돌아왔으면 된 거죠! 아무튼 나는 이걸로 드디어 해방이다! 이제 저 그 서류 지옥이랑 사람들 눈치 안 봐도 되는 거죠?”
“아니, 나 잠시 요양하고 싶은데… 그동안만 부탁하자. 이번엔 기사들도 다 있어서 괜찮을 거야.”
“우에에엥! 싫어요. 그 자리가 얼마나 부담스러운데요.”
“…나 같은 무능력자도 했는데, 뭘 그래?”
“아저씨는 기사분들이 잘 봐주니까 그런 거죠! 저한텐 얼마나 자비 없는데요.”
“아마 기대치가 달라서 그런 거겠지. 아무튼 당분간만 부탁할게.”
유성원이 간절히 부탁하자, 신아영은 하는 수 없이 일단 유성원의 대리 임무를 계속하기로 했다.
기사들과 천검군 병사들이 모두 돌아왔기에 문제없기도 했고, 또 굳이 이러는 이유는 외부의 반응과 올림푸스 길드에 대한 대처이기도 했다.
“내가 코어 던전 잡고 멀쩡히 돌아왔다고 해 봐라. 여기저기에서 가만히 있을까? 또 이 기회에 내부의 불안 요소 좀 키워서 싹 잡아 버릴 생각이라. 혹시 지금 내 상태, 밖에는 어디까지 알려졌나?”
“그러니까… 일단 코어 던전에서 나와서 몰려온 몬스터랑 대치했다가 놈들이 물러난 다음에 쓰러져서 여기에 온 것까지만 알려졌어요.”
“쓰러진 게 알려졌으면 나쁘지 않군. 아, 혹시 내가 그 천군대장군이라고 한 놈과 대화한 건 노출 안 됐나?”
“다들 전선에서 대기하는 중이었고, 공중에서 촬영을 해서 아마 음성까진 안 나갔을 거예요. 기사분들이 주변 통제를 잘해 놔서요.”
신아영의 설명을 들은 유성원은 천군대장군이 투항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아직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상황 파악을 모두 마친 그는 이제 이것을 어떻게 하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코어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온 게 모든 것의 끝이 아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