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
그렇게 가만히 있는데,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고 조용했다.
유성원은 이미 자신이 이 주변에 있는 영체들에게 합세했나 싶어 다시 눈을 떴지만,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눈앞에서는 성좌 66천마의 화신이 상태창을 띄워 둔 채 뭔가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뭐 하세요?”
“자네 점수 매기지.”
“무슨 점수요?”
“자네가 이번 ‘전쟁’에서 얻은 득점. 음~ 역시 오랫동안 질기게 버틴 만큼 득점이 높군. 시간 좀 걸리니 내버려 두게. 헷갈리니까~”
“…예?”
유성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성좌 66천마를 바라보았다.
점수니 득점이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대로 죽느니 사느니 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기에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예상한 결과와 다른 게 찾아올지 모르니 말이다.
“…끝까지 주요 유닛들을 살리며 다른 유닛들을 버리는 소모전 솜씨, 챙겨 온 식량과 식수도 충분했고, 각종 스트레스와 온갖 괴로움, 이변과 슬픔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의지가 가장 훌륭하더군. 수많은 영웅과 성녀들도 도저히 못 버텼는데… 동료들의 명예를 위해 버티는 케이스가 나올 줄이야.”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자네 점수는! 짜잔! 75,833점! 나와 ‘전쟁’을 한 ‘인간’들 중 최고 점수 갱신이군. 보자. 여기 상품표…….”
“…잠깐만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데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구요.”
성좌 66천마의 행동에 자신의 사고가 따라가지 못하자, 유성원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바로잡고는 자신의 눈앞에 표기된 점수와 그를 번갈아 보며 보충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성좌 66천마의 화신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눈치챈 듯 설명해 주었다.
“무슨 일이긴. 자네는 패배했고, ‘전쟁’은 끝났네. 이제 결산하는 거지.”
“그 상품이라는 건 뭔데요?”
“자네가 얻은 점수만큼 혜택이 주어지는 거지. 애초부터 인간이 ‘성좌’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본래 이 ‘전쟁’ 방식은 말이지. 보통 나의 ‘별’들을 침략하는 ‘성좌’와 겨루기 위해 쓰는 방식이라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애초부터 이 게임은 유성원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조건이었다.
필멸자의 한계, 싸우는 말 숫자의 한계 등등 여럿이 있어서 무조건 질 수밖에 없는 전쟁.
하지만 성좌끼리 싸우기 위한 방법의 ‘전쟁’이었다면 확실히 자웅을 겨룰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나를 이기면 이 ‘별’을 가지게 되지. 물론 상대하는 ‘성좌’도 ‘별’ 하나 이상의 영체는 못 가져오게 되어 있네.”
“애초에 성좌끼리 할 때만 공평한 게임이었군요. 그러면 왜 처음부터 그런 말을…….”
“당연히 이쪽이 더 재미있으니 그렇지. 모든 걸 다 알려 주면 인간 놈들, 점수 계산만 바짝 하는 ‘게임’으로 생각하고 임했겠지? 반대로 알려 주지 않으니 자네처럼 재미있게 하는 놈들 천지였고, 또~ 다양한 반응이 나오지 않았는가?”
철컥! 철컥!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관절과 몸을 움직이며 쇳소리를 내는 성좌 66천마의 화신이었다.
결국 성좌란 이렇게 제멋대로 인간을 갖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놈들이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참~ 즐거웠지. 처음부터 패배를 인정하던 자, 게임을 하다가 멘탈이 나가서 자결한 자, 또 게임을 열심히 했고 진행이 계속되었지만 식량과 식수가 다 떨어져서 굶어 죽은 자. 아주 많은 자들이 있었고, 놈들은 운명에 희롱되어 죽은 셈이지. 뛰어난 자, 지혜로운 자, 어리석은 자 모두 그렇게 이곳에서 죽었다네.”
“…악취미군요.”
“내 ‘별’에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취미를 누리든 무슨 상관이지?”
“아, 예. 그러면 저희 별에 왔을 때, 그… 사령들이랑 그건?”
“그건 그쪽 세계의 ‘룰’이니 내가 따른 거지. 그래, 여기선 내 방식대로 ‘전쟁’을 해야 하지만 그 ‘별’에서는 그 ‘별’이 지시하는 ‘방식’대로 전쟁을 하는 거다. 그것 때문에 ‘별의 기록’에서 적합한 인재를 찾아야 해서 골치가 아팠지. 그리고 강한 군대를 보내는 대신 제약도 따랐고 말이야.”
성좌 66천마의 화신은 마치 무척 힘든 작업이었다고 말하려는 듯 손 쪽의 총구와 칼날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주저리주저리 설명했다.
그 설명 덕분에 이 코어 던전과 ‘성좌’에 관한 의문이 대략 풀리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상태창에 나온 보상의 혜택을 이것저것 살펴보기 시작했다.
[‘전쟁’의 보상]
자격:5만점 이상 획득한 ‘필멸자’만 구매 가능
당신의 점수:75,833점
별의 귀환-자신의 별로 귀환합니다. 5,000점 사용
별의 은혜-이곳에서 죽은 자를 부활시킵니다. 인당 2,500점 사용
별의 포상–랜덤으로 각종 재보와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최대 신조 병장이나 카오스 아티팩트까지도 받을 수 있습니다. 10,000점 사용
별의 소원-‘성좌 66천마’ 님에게 소원을 하나 요구합니다. 여러 제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50,000점 사용
[잔여 점수는 자동으로 각성자의 경험치로 이완됩니다.]
“이건… 아! 아, 아무튼! 일단… 애들부터! 우리 애들 다 되살려야지! 이, 이거! 별의 은혜로 우리 애들! 기사들! 다 살려 주세요! 아! 엘드라엔도!”
다른 건 몰라도 별의 은혜를 보자마자 유성원은 곧바로 기사들부터 살리기 위해 소리쳤다.
기사들 여섯과 엘드라엔까지 합쳐서 일곱을 살리자, 그의 손 위로 아까 전 ‘전쟁’에서 쓰던 말들이 그대로 돌아왔다.
그것을 본 유성원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다시 살아난 기사들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보통 살아남은 자는 욕심 때문에 다른 것을 택하기 마련이던데~ 아무튼 빨리 다른 것도 이야기하게.”
기사들을 주저 없이 되살린 유성원을 보며 다시금 재촉하는 성좌 66천마의 화신이었다.
‘전쟁’이 끝났고, 자격을 입증했으니 빨리 보상을 주고 내보내고 싶은 것이리라.
이미 볼 것은 다 봤으니 말이다.
“아, 그럼 그… ‘별의 소원’ 말입니다만…….”
“크게 나오는군. 이 ‘별’을 준다거나 성좌로 만들어 달라는… 그런 건 안 된다네.”
“그럼 저희 ‘별’에 성좌님과 성좌님의 세력이 영원히 오지 말아 달라는 건요?”
“그건… 음, 가능은 하지. 하지만 어차피 자네에게 코어 던전의 비밀이 밝혀진 이상 적어도 몇백 년은 그쪽 ‘별’에서 영업을 못해서 조용할 텐데?”
이곳 코어 던전의 룰은 알려지면 재미가 없는 만큼 성좌 66천마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수백 년은 문을 닫고, 아는 이가 다 사라지거나 이 이야기가 희석될 때까진 조용히 있을 생각이었다.
안 그러면 유성원 같은 놈이 또다시 들어와서 점수만 벌어 가게 되고, 그러면 ‘별’을 빼앗기지 않아도 재미가 하나도 없어질 테니 말이다.
“아무튼 그걸 ‘별의 소원’으로 할게요.”
[???]
[2/???]
[???]
[??????!!!!!]
그렇게 확정한 순간, 상태창의 내용이 늘어나면서 눈앞에 떠올랐다.
1에서 2. 성좌 청룡에 이어 성좌 66천마를 ‘지구’에서 쫓아낸 것으로 카운트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또 무언가가 추가되었지만 ????로 되어 있었기에 해석할 수 없었다.
“흠, 재미있는 별이라 나가고 싶지는 않은데… 생각을 달리하면 안 되겠나? 이쪽의 보상을 생각해 보면 카오스 아티팩트나 신조 병장도 나올 수 있고, 꼭 거기까진 아니어도 내가 가진 별에서 거둔 전설급 무구와 각종 아이템들이…….”
“이게 제 일이라서요.”
거창하게 ‘사명’이라곤 말하지 못했지만 유성원이 물러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자, 성좌 66천마의 얼굴 부분에 있던 총구가 아래로 숙여졌다.
어지간히 이 ‘지구’라는 별이 재미있던 것 같았다.
사실 지금 온 손님인 유성원만 해도 근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찬란하게 고뇌하고 괴로움에 발버둥 치면서도 이겨 내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즐거웠던가?
“쳇! 이런 재미있는 ‘별’에 출입 금지라니… 어쩔 수 없지. ‘규칙’은 지켜야 하는 법이니 말이야. 다른 재미있을 법한 ‘별’을 찾아봐야겠군.”
“아… 감사합니다. 그, 그리고 마지막은 별의 귀환으로! 할게요! 이걸로 72,500점! 이러면 점수 거의 다 썼어요.”
“그래그래, 금방 돌려보내 주지. 그리고… 이건 서비스로 하는 조언이다. 코어 던전에 도전한 놈이니 분명 다른 ‘성좌’의 코어 던전도 도전하려 들 게 분명하겠지? 그러니 잊지 마라. ‘성좌’라는 존재는 모두 제멋대로이며 성향과 행동도 가지각색이다. 나처럼 약간(?)의 즐거움만 취하고 지킬 건 다 지키는 쪽은 오히려 희귀한 경우이지.”
그쪽 역시 충분히 맛이 간 사이코패스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일이 잘 해결된 찰나에 조금이라도 기분 나쁘게 만들면 상황이 안 좋아질 수 있기에 유성원은 최대한 참으면서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무튼 그렇게 모든 것이 정리가 되었고, 유성원의 뒤에 이곳에 들어올 때와 비슷한 포탈이 열렸다.
바깥의 풍경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극도의 안도감이 몰려오면서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다.
“아아아… 드디어…….”
“그럼 잘 가도록 하게. 그리고 합당한 ‘별의 소원’에 따라 나는 더 이상 너희 ‘별’에 손대지도, 출입하지도 않겠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도 손을 떼지.”
“아, 예. 감사합니다.”
“대신 거기 남은 것들의 뒤처리를 부탁하겠네.”
마지막 말이 신경 쓰일 만한 것이긴 했지만, 반년 넘게 황무지 생활을 하다가 푸르른 녹음을 본 유성원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그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뛰어서 던전 밖으로 나갔기에 이야기를 들었는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아아… 아아아아아!”
화창한 햇살, 푸른 녹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향기, 깨끗하게 흐르는 물의 냄새. 반년 넘게 황무지 속 코어 던전에서 피폐해진 유성원은 이 그리운 생명력 앞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어져서 던전에서 나온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흡하아아아! 흡… 하아아아! 도, 돌아왔어. 돌아왔어. 으아… 으아아아아아아아! 흐읍! 하아! 흡! 하아아아아!”
땅에 달라붙은 채로 풀과 흙의 내음을 통해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유성원.
그렇게 하자 ‘지구’라는 별이 자신의 고향임을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나, 긴장이 풀려서 생긴 안도감 때문인지 그는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성좌 66천마와의 ‘게임’은 결과적으로 보았을 땐 잘 해결되었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 가혹했고 거기서 오는 정신적 데미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게임을 버텨 내고 나온 것이 기적적인 일이라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었다.
“…….”
그리고 유성원이 쓰러짐과 동시에 기사단의 성소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바로 크록베인을 비롯한 코어 던전에 들어갔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쓰러진 유성원을 챙기면서 다들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비록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전쟁’의 장기말이 된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유성원의 행동을 모두 보고, 듣고 있었다.
“으음…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말 좀 해 보지 않겠나? 난 이런 분위기는 너무 어색해서 말이야.”
먼저 입을 연 것은 진석으로, 머리를 긁적이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고 쑥스러워서 좀 바꿔 보려고 한 것이지만,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인 듯 다들 조용히 유성원의 신변만 챙기고 그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호위할 생각으로 주변 정리만 할 뿐이었다.
“참 나~ 다들 별의 기록에 남을 정도로 ‘전설’이 된 ‘기사’들인데 이러는 건… 뭔가 온다!”
[…여기… 아직… 적진이었지.]
그들이 나온 곳은 이전 코어 던전이 있던 곳인 만큼 성좌 66천마의 부하들과 사령들이 쫘악 깔려 있었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아무튼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지자 기사들은 각자 무기를 뽑아 든 채 진형을 갖추고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자를 경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