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그렇게 바깥에서의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코어 던전이 닫힌 채 반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어느덧 계절은 찬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이 되었고, 목포 전선은 할 수 있는 모든 대비를 마친 상태에서 내부 방비에 힘쓰는 추세였다.
그리고 전선 도시는 미리 유성원과 기사들의 부재를 대비한 공간답게 아직까지는 큰 문제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으아… 살았다. 드디어 다 끝냈어.”
“훌륭합니다. 갈수록 일하는 솜씨가 느는군요. 아영 양.”
“유청 님이 없었으면 불가능했겠지만요. 진짜 이곳에 남아 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시간이 지나면서 전선 도시와 아이언 포트리스에선 불안감이 커질 법했지만, 유청이 남아 있어 준 덕분에 그 모든 불안은 해소되었다.
그가 존재하는 한 던전 내의 유성원은 죽지 않았다는 뜻이 되기에 다들 안심하고 실정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다른 도발이나 스캐빈저의 공세와 기업의 진출 모두 순조로이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던전 안에선 대체 어떤 싸움을 벌이고 있기에 이렇게 오래 걸릴까요? 유청 님이 살아 계셔서 무사한 건 알겠는데…….”
“코어 던전이 쉬웠으면 문제 될 리도 없었겠지요. 기록에 의하면 수년이 걸린 것도 있으니 그 정도는 각오하셔야 합니다. 아무튼 저나 마법사 멀블린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폐하의 무사함은 보장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그래도 한결 낫지요.”
“그건 맞아요. 다른 사람들은 안에 들어간 사람 소식을 전혀 모르지만, 우리는 그래도 유청 님 덕분에 무사한 걸 알 수 있으니까요. 물론 코어 던전이 다시 열리게 되면 알게 되겠지만…….”
이 전선 도시와 아이언 포트리스에서 이제 유성원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모인 사람들은 혼란과 불안에 시달리면서 외부와 손잡거나 자신만 살기 위해 내통하려는 짓 등등… 그것을 통제하는 데만 해도 엄청 시간을 썼을 것이다.
“가뜩이나 우리 내부만 해도 혼란스러우니 말이죠. 하아~ 대체 애들은 왜 이렇게 파벌 만들기를 좋아할까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서로 모이고 조직을 만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걸 통제하는 게 결국 왕이 할 일이지요.”
“저 왕 아닌데요?”
“폐하께서 후계자라 하셨으니 왕의 길을 가시는 분 아닙니까? 여왕 폐하?”
“으앗! 소름 돋아. 여왕이고 뭐고, 일단 레벨부터 올려서 S급 진급 심사나 받고 싶어요. 아으으! 던전 1~2개만 가면 될 것 같은데, 여기 일이 더 바쁘니…….”
여기저기서 다 주워 모은 사람들이 서로 융화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언어와 문화가 차이 나는 일본인도 있었고, 제대로 된 사회 교육을 받지 못한 시설 아이들, 전선 도시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되자 그곳에 유입되기 시작하는 일반인들까지. 도저히 섞이기 힘든 사람들이 모여서 매일매일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하아~ 특히 열차 쪽에 들어오는 걸 통제하는 인원의 질이 확 차이가 나는 게 가장 문제 같아요. 천검군 병사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금 느껴지네요.”
“평생을 패황 님과 함께한 정예병들이니 고작 1~2년도 안 된 애송이들과 실력이 다른 건 당연합니다.”
“그래서 내부 문제가 다시… 아으으윽!”
“CCTV 시스템은 잘 구축해서 그래도 잘 잡아내고 있잖습니까?”
“그것도 사상누각이죠. 아저씨가 얼른 돌아와야 할 텐데. 그리고 만약, 만약 정말 실패하면 그때는… 하아아~”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나서 불안감이 커진 상황.
만약 코어 던전 공략에 실패해서 유성원이 사라지고, 유청도 사라지면 전선 도시와 아이언 포트리스의 안전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물론 갈 곳 없는 이는 그대로 후계자인 신아영을 중심으로 모여서 체제를 굳히겠지만, 전선 도시에 들어온 인원들이 전선 도시의 주 운영권을 노리고 암약할지도 모른다.
“하아~ 빨리 좀 돌아와요. 저지른 일은 마지막까지 책임을 져야죠, 아저씨.”
기사들과 천검군이 없으니 이 자리가 너무나 무겁고 힘든 것이 되어 버린 만큼 신아영은 책상 위에 놓인 유성원의 사진을 보며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길 기원했다.
***
코어 던전, ‘성좌 66천마’.
“이걸로 마지막 천검군 병사 다운이군. 후후, 드디어 기사들과 저 ‘용’만 남았나?”
“제길!”
유성원의 앞엔 이제 6명의 기사와 엘드라엔이 모두 올려져 있었고, 천검군 병사들은 모두 다운된 상태였다.
몇 개월간 계속 게임을 하면서 치유 능력이 있는 섬멸을 투입하고 기사들로 전력을 올려서 쓸어버리는 식으로 게임 스타일을 바꾸었지만, 그렇게 하니 성좌 66천마의 화신도 갑자기 강한 병력을 집어넣으면서 계속해서 상대해 오는 중이었다.
“아무튼 이걸로 턴 종료. 자네 턴일세.”
“내 턴… 내 턴… 후우… 잠시만요.”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계속 먹고 자고 하며 테이블 게임만 해 온 유성원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얼굴이 마르고, 머리카락은 반쯤 하얗게 세어 있었다.
각성을 제외하면 여전히 일반인 감성에 가까운 그가 ‘기사’들을 살리기 위해 머리를 쓰고 주사위를 굴릴 때마다 조마조마해하고, 이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을까? 없을까? 를 고뇌하니 심신이 가혹하게 소모된 것이었다.
“꿀꺽꿀꺽, 하아! 내 턴… 일단 내 턴이지. 그래, 그래… 하아아~”
정신에 한계가 온다.
이미 오랫동안 이곳에만 있었기에 정신이 계속 마모되고 있었다. 앞에서 계속해서 신경을 긁는 말을 하는 성좌 66천마도 유성원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탁자 위에 펼쳐진 ‘전장’에서 패배의 윤곽이 짙어지고, 자신의 앞에 놓였던 예비 천검군 병사의 말들이 모두 사라지자 이제는 진짜 눈앞이 캄캄했다.
‘마음 같아선 이 무의미한 싸움, 놓고 싶어. 하지만…….’
‘기사’들과 엘드라엔의 말을 보니 그럴 수 없었다.
크록베인, 아칼론, 가울프, 섬멸, 진석, 중한, 엘드라엔… 포기하면 그들은 그대로 끝이었다.
그러니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별의 기록에서 수많은 전장을 살아가는 그들의 ‘명예와 기사도’를 위해서라도 그는 스스로 포기하지 못했다.
“주사위… 먼저… 섬멸의 회복의 찬가. 다만 그녀는 전투계이기 때문에 페널티 주사위 수치 –4를 받고 회복시켜. 주사위는… 4… 그러니까 0회복. 그러면 엘드라엔으로 다시 치유 마법 시도. 드래곤이기에 보너스를 받으니까 이번엔… 주사위 8. 좋아, 성공이다. 전원 12회복. 후우…후우…….”
“음, 정말 잘 버티는군. 그렇게까지 허무한 싸움에 목매는 이유가 뭐지?”
“명예… 그리고 기사도…….”
“의외군. 자네같이 평범하고 실리적인 영혼이… 그런 고지식하고 꽉 막힌 개념을 주장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입니다. 하지만 얘들은 다르지. 찬란하게 빛나는… 별의 기록에 남은… ‘전설’, ‘희망’… 영원히 인간의 마음에서 빛나야 하는 것들… 그건… 내가 더럽혀도 되는 게 아니야.”
옛날의 유성원이었다면 내 알 바 아니라고, 남의 것이라 상관없다고 했겠지만 이 ‘기사’들은 다르다.
맨날 정의와 명예, 기사도를 떠들면서 자신의 머리를 아프게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말에 맞는 모습만 보여 주었고, 보통 사람에 가까운 심성을 지닌 유성원을 항상 존중해 주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명예를 져 버리는 일은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죽더라도 지켜 줘야 편히 눈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게 있으니 싸움이 멈추지 않는 거지.”
“…그래도 죽을 때 평안하려면 어쩔 수 없죠… 내 목숨은… 덧없지만…….”
유성원은 반쯤 풀린 눈빛과 지친 기색에도 결코 굴하지 않은 채 계속 주사위를 굴리고 스킬을 고민하며 플레이해 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앞에는 이제 여섯 기사와 용만 남은 상황이었고, 성좌 66천마의 말은 아직도 수없이 많았으며 주변에 있는 영체의 숫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사위 눈… 8… 데미지 입히는 데 성공했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
쿵.
유성원은 그대로 머리를 탁자에 박은 채 잠들어 버렸다.
딱히 수면과 휴식을 제약한 건 아니지만 스트레스와 압박이 심한 상황.
이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먹구름에 둘러싸인 채로 식사를 해 봤자 제대로 먹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잠을 자려 해도 불안함 때문에 쉽사리 잠들지 못하며 악몽을 꾸는 게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결국 할 수 있는 이 ‘전쟁’을 할 만큼 하다가 그대로 엎어져서 자고, 깨고 하는 식이 된 것이었다.
“쿠울… 쿠울…….”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군. 범용한 자라서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이 공간과 이 불합리한 게임을 맞이해서 보통은 이렇게까지 버티지 못한다.
대부분의 영웅이나 헌터들은 이 불합리한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고 먼저 무기를 들고 화신인 자신을 죽이려 들든가, 아니면 이길 수 없는 상황에 절망해서 빠르게 목숨을 끊든가, 또는 게임이 끝나기 전에 식량과 식수를 모두 소모해서 말라 비틀어져서 죽든가, 스스로 포기 선언을 해서 굴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과연 끝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군.”
마치 재미있는 물건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성좌 66천마는 잠든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어떻게 압박할지 계속해서 고민했다.
그리고 잠시 후, 지쳐 잠들었던 유성원이 일어나면서 게임은 계속되었다.
혼미한 정신과 피로, 그리고 한계에 달한 순간 그토록 보고 싶지 않았던 기사들 중 첫 희생자가 나왔다.
“주사위 10, 크리티컬이군. 데미지 2배. 12이다. 그리고… 이걸로 그 용맹한 용인 기사는 드디어 다운이군.”
“…아…아아…….”
파사삭!
성좌 66천마의 말과 동시에 크록베인의 말이 그대로 부서졌다.
라이프 0이 된 순간, 여지없이 바스러져서 가루가 되더니 금방 흩날려 사라진 것이다.
그 순간, 유성원은 생애 처음 심장이 잘려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크록베인. 겉모습은 무섭지만 우직하고 든든해서 언제나 자신의 등 뒤를 지켜 주었고, 그 어떤 전선에서도 물러서지 않던 용인 기사.
각오했던 순간이 온 것이지만,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끄읍… 으으윽! 으으으!”
“여기까지 올 정도의 용사이면서 동료를 잃은 게 처음인가? 정말 운이 좋은 친구로군.”
“오히려… 내가 죽을 걸 걱정해야 했거든… 이 녀석들은 나보다 강했고, 나를 이끌어 준 녀석들인데… 이렇게… 이렇게…….”
“그랬군. 하지만 아직 우리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내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남은 친구들을 걱정하게.”
그리고 주사위는 다시 굴러갔다.
그 말대로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슬퍼할 일은 아직도 많이 있었다.
금방 다섯으로 줄어든 기사들과 엘드라엔도 머지않아 크록베인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운명은 생각보다 금방 다가오게 되었다.
병사들이 사라지는 건 그저 건물에 난 흠집이었지만 크록베인이 사라진 것은 건물의 기둥이 사라진 것과 같았고, 전세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져 갔다.
“…이걸로 저기 네모난 얼굴 친구는 끝이군.”
“아칼론…….”
본래의 전쟁이었다면 이렇게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후퇴해야만 했지만, 이 탁자 위의 전쟁터는 후퇴가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모두가 한 턴에 한 번의 행동을 하는 이 게임판에서 특히 말 하나가 사라지면 더더욱 치명적이었다.
그렇게 크록베인이 죽고 난 뒤로 반나절이 조금 지난 순간 모든 말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 아…….”
“게임은 끝났다. 그래, 이게 네가 바라던 명예와 기사도에 맞는 최후였나?”
“처음부터… 이길 거라는 생각은 안 했잖아… 이 던전 방식 속에서… 최선을 다해 싸웠으니… 명예롭게… 간 거겠지. 그래서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예정대로 결국 패배했다.
역시 코어 던전은 아무나 오는 것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법칙과 변형된 규칙을 강요하는 곳인 만큼 철저한 대비도 아무 소용없었다.
애초에 필멸자의 몸으로 무한에 가까운 저 사령들을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 유성원은 올림푸스 놈들의 농간에 여기 들어온 게 후회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무튼 우직하게 최선을 다한 그는 눈을 감고, 성좌 66천마의 화신이 무엇을 할지 얌전히 기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