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그렇게 올림푸스 길드를 속여 각종 괴수와 괴물의 뼈와 고기를 듬뿍 받은 유성원은 아이언 포트리스 지하에 그것들을 모아 둔 다음 도살왕의 가호가 깃든 반지를 이용해서 상인인 폭시를 불러내었다.
[컁컁! 꽤 오랜만이네요? 고객님. 폭시를 오랫동안 안 불러 주셔서 너무 서글펐어요.]
“그게… 일이 그렇게 됐어. 혹시 나, 거래 정지 먹거나 한 건 아니지?”
성좌 도살왕의 사도는 물론이고 북한 쪽에 있던 그들 세력을 박살 내 놓은 유성원은 내심 찔리는지 약간 머뭇거리면서 폭시에게 물었다.
그냥 조져 놓은 것도 아니고, 사도 대부분을 쳐 죽이는 건 물론 남은 사도들이 코어 던전으로 후퇴할 정도로 개박살을 내놓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컁컁! 걱정 마세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 ‘성좌 도살왕’ 님께선 수많은 별을 가지신 분이라서 이 별 하나에서 입은 손해는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컁!]
“…뭐, 그렇다면 상관없지만. 일단 이것들 전부 팔려고 하는데 말이지.”
[어머어나~! 컁컁! 그동안 많이 사냥해서 모으셨나 봐요? 컁컁!]
“뭐, 그렇게 됐어.”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거 엄청난 양이라서 포인트로 환산하려면… 컁!]
폭시는 계산기를 허공에서 꺼내더니 열심히 두들기며 유성원이 가져온 괴수의 시체와 뼈, 고기, 피 등등 각종 재료들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한 시간이나 지났고, 계산을 마친 폭시는 유성원에게 계산기를 내밀며 말했다.
[도합 2천만 포인트입니다. 컁! 와! 이 정도 숫자는 저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대체 어디서 이만큼 모으신 거예요?]
“뭐, 이리저리 하다 보니…….”
[컁컁! 이 정도면 사도분도 강림시킬 수 있을 정도인데요? 혹시 필요하신가요?]
“아니, 됐어. 그것보다는 무장이 필요해서 말이야. 신성하거나 성스러운 힘이 담긴 것들로 가능한 많이 보여 줘.”
[오늘 정말 좋은 거래가 될 것 같네요. 컁컁! 그럼 필요하신 분들을 모두 불러 주시겠어요? 제가 이런 접객의 재주가 있어서 말이죠. 컁컁컁!]
말과 함께 손으로 무언가 수인을 맺자 폭시의 숫자가 순식간에 5명으로 불어났다.
이런 재주도 있구나 하며 신기하게 여기던 유성원은 곧바로 기사들을 불러 폭시와 상담을 하면서 각자 무구를 고르게 했다.
주로 사령과 싸우는 데 특화된 장비들이다 보니 대부분 순백색이거나 황금색으로 빛나는 무장들이 번쩍번쩍하면서 수없이 나타났다.
[고객님께서는 무엇이 필요하신지요? 컁!]
[도끼… 나 대검… 그리고 성스러운 기름이나 물… 크르르… 많이 주면 된다.]
[캬아앙~ 도끼나 대검 말씀이시군요. 혹시 둔기는 불가능한가요?]
[크록베인… 베는 맛… 좋아한다.]
워낙 덩치가 큰 탓에 특정한 방어구를 구하는 게 힘든 크록베인은 자신의 피부와 비늘에 바를 성수와 성유를 잔뜩 구매했다.
그리고 유령까지 벨 수 있는 성스러운 힘이 깃든 도끼를 개별로 구매했다.
옆에 있던 섬멸은 관심 없다는 듯 혼자 하늘에 뜬 채 물러나 있었다.
“섬멸, 너는 뭐 안 골라? 아! 맞다. 너는 원래부터가 부정한 자들을 상대하는 기사였지?”
“예, 단장님. 잊고 계셨을지 모르지만, 저는 자랑스러운 성천 기사단의 일원이죠.”
[캬앙! 성천 기사단! 그렇다면 혹시 오래전 전쟁으로 유실되었던 성천 기사단의 성물은 어떠신지요? 마침 한 자루 있는데…….]
“단장님! 저도 하나 사야겠습니다.”
성물이라는 말에 금방 태세 전환을 한 섬멸도 구매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칼론은 은탄과 축성 탄환을 잔뜩 사들였고, 진석과 중한도 자신에게 맞는 무기와 갑주를 새로이 마련하면서 동시에 천검군 병사들에게 입힐 무장들도 한꺼번에 구입했다.
[흠, 계약자여. 나는 성스러우니 신성이니 하는 물건을 들지 못하는 몸이라서 아쉽지만 다른 물건을 사도록 하지.]
“어~ 마음대로 해.”
심연의 존재인 가울프에겐 신성 속성 무구는 치명적이기에 알아서 다른 종류의 무장으로 구매하였다.
한편, 유성원의 경우 방어구는 뛰어난 것을 가지고 있었고, 무기 역시 프르제발스키의 랜스가 있었기에 딱히 필요는 없었지만 혹시나 싶어서 폭시에게 물었다.
“혹시 말이야. 그… 명계를 베는 검 같은 거 있어?”
[컁? 신기한 것을 찾으시네요? 컁? 명계를 베다니. 죽음이라는 개념을 없애시려고 하는 건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일전에 난감한 적을 상대했거든… 그러니까…….”
성좌 하데스의 사도 페르세이아를 상대한 경험을 폭시에게 상세히 설명하는 유성원이었다.
그냥 몸을 숨기는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차원, ‘명계’라는 곳으로 들어가 버리니 어떻게 공격할 방도가 없었다는 점을 언급한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폭시가 유성원이 요구하는 게 뭔지 알아채고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박수를 쳤다.
[컁! 그런 거라면 ‘신조 병기’, ‘신살 무구’ 같은 걸 쓰시면 됩니다. 컁! 그 페르세이아라는 분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명계’라는 곳으로 몸을 감추는 ‘절대 법칙’을 구현해서 싸우는 것 같네요. 그 ‘법칙’을 깨려면 결국 같은 식으로 룰을 깨 버리는 ‘신조 병기’나 ‘신살 무구’ 같은 걸 쓰셔야 합니다.]
“…갑자기 스케일 확 커지네.”
[아니면 2차원이나 혼돈, 공허, 허수 속에서 나온 ‘카오스 아티팩트’ 같은 게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있나?”
[몇 개 있어요! 컁! 근데… 겁나게 비싸답니다! 컁컁! 애초에 ‘신조 병기’나 ‘신살 무구’ 같은 건 거의 ‘성좌’님의 육신이나 권능을 떼어다 만드시는 거고, ‘카오스 아티팩트’는 말 그대로 미지(未知)의 물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지도 모르고, 아무 때나 구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아~”
[컁! 또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카오스 아티팩트’는 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 불안정하고 무서운 물건이랍니다. 컁컁! 보통 사람은 그걸 보기만 해도 미쳐 버릴 거고, 쓰다가 갑자기 어느 날 쓩~ 사라지거나 그 물건에 배반당해도 할 말이 없는 물건이에요. 캬르르릉! 물론 비싸기도 하구요!]
비싸다는 이야기를 두 번 반복하는 폭시였다.
아무튼 ‘신조 병기’나 ‘신살 무구’, ‘카오스 아티팩트’ 같은 무기들이 앞으로 싸워 나갈 때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직 폭시의 설명은 끝나지 않았다.
[그나마 ‘카오스 아티팩트’가 좀 더 싸긴 하지만 역시 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컁컁! 어쩌면 죽는 게 나은 대가를 치를 수도 있으니까요. 컁! 아무튼 지금 가지고 계신 포인트로는 ‘카오스 아티팩트’ 정도면 모를까? ‘신조 병기’ 같은 건 절대 무리이세요.]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유성원은 곧바로 체념해 버렸다.
그래도 폭시의 설명 덕분에 페르세이아의 ‘명계 여왕의 옥좌’의 경우가 ‘신조 병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결국 최상위 헌터 간의 대전은 성좌의 가호와 아이템발이 전부인가? 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부분이었지만, 자신도 금빛 신수의 갑옷으로 그동안 많은 이익을 누린 만큼 할 말이 없었다.
“얻을 수 없는 것에 크게 욕심을 부리면 다치니……. 그래도 코어 던전을 공략하러 가는 거니 하나쯤 가졌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컁? 코어 던전? 설마 도살왕 님에게 가시는 건가요?]
“아니, 설마. 사람이 염치가 있지. 여기서 물건 사서 도살왕 님 코어 던전에 가는 것도 참 웃긴 일이잖아? ‘성좌 66천마’ 쪽으로 가는 거야.”
[캬응~ 그렇군요. 아무튼 그분의 화신과 만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 조심하셔야 해요. 컁!]
‘음?’
“단장님! 아칼론 경이 이상한 미사일을 사려고 합니다! 좀 말려 주세요! 이 풍선 같은 구름 모양 마크는? 아칼론 경! 그건 전장에서 쓰면 안 되는 겁니다!”
순간, 유성원은 폭시의 말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보려던 찰나 아칼론이 핵미사일을 사려고 한다는 섬멸의 외침에 번뜩 정신이 들어 그대로 그를 말리기 위해 뛰어갔다.
그렇게 포인트를 깡그리 써서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전쟁 훈련 및 호흡을 맞추면서 유성원 부재 시의 시스템 구성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음, 역시 여기저기 많이 삐걱거리는군요. 아영이가 유청 경이 무섭다고 맨날 난리예요.”
“아, 걔는 저 말고는 다른 사람에겐 가차 없으니까요.”
그가 ‘폐하’라고 칭하면서 살갑게 대하는 건 오직 유성원뿐. 다른 인간들이나 부하들에겐 냉정하고 무서운 행정가의 면모를 그대로 내비치는 게 유청이었다.
게다가 후계자 교육이라는 명분까지 들어가니, 정말 무섭게 몰아치는 유청의 교육에 신아영만 개고생하고 있었다.
“뭐, 그래도 유청이 하는 이야기 들어 보면 아영이에겐 재능이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자기가 몰아치는 거 잘 따라온다고, 가르칠 맛이 난다나요? 원래 농사도 싹이 나는 곳에다 짓는다고…….”
“그러면 좀 살살 하라고 말이나 전해 주세요.”
“예, 다음에 하죠.”
“아무튼 기사분들이 맡아 주시던 걸 이제 저희랑 애들이 해야 하니… 시간이 좀 지났어도 다들 경험이 부족하고, 낯선 분야가 너무 많아서… 그나마 그분들이 일하던 데이터가 남아 있어서 그걸로 짬짬이 메우는 수준이에요.”
“너무 유능해도 탈이군요.”
“특히 도시 치안 유지는…어휴~”
기사들과 천검군 병사들의 유능함이 빠진 전선 도시와 아이언 포트리스의 시스템은 그야말로 사상누각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들이 계속 뒤에서 봐주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지만, 진짜로 유성원 측이 빠져 버린다면 심각한 혼란을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전문성 부족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매뉴얼은 있어서 다행인 수준이에요. 최충선 헌터님이 정말정말 도움이 많이 되고 있어요.”
“그렇군요.”
“아, 그리고 어디서 새어 나갔는지 몰라도 협회랑 정부에서 우리가 코어 던전 준비하는 걸 눈치챈 것 같아요.”
“…네? 어떻게요? 아니다. 정황 증거로 판단한 건가?”
올림푸스 길드와의 접촉과 각종 물자의 전달, 거기에 겉으로는 전문성 강화 및 인력 교육이라고 속여도 결국 유성원 부재 시의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실험하는 모습이라든가? 여기저기서 물건을 사들이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딱 봐도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 양반들이 뭔가 하려는 건 아니죠? 누님. 요새 잠잠한가 했더니…….”
정부와 협회는 한창 유성원을 제외한 한국 헌터계를 재구축하는 중이라서 그동안 조용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더불어 끊임없이 전선 도시로 이탈하거나 여론에 뭇매를 휘두르는 국민들의 분노를 막기 위해 바쁘게 일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코어 던전을 간다는 말에 또 눈치를 살살 보고 있으니 불안해지는 유성원이었다.
“일단 눈치만 보는 정도예요. 하지만 역시 코어 던전 공략에 실패할 경우 어떻게 할지 생각이 너무 쉽게 드러나서 문제예요.”
“그건 저희도 눈치챘으니까 미리 대비하고 가는 거죠. 또 올림푸스 놈들에게 공증도 받았고요. 물론 100퍼센트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성좌에 대한 맹세가 아닌 이상에야 믿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다.
그렇게 훈련과 추가적인 구성원의 레벨 업, 그리고 전선 도시 인원의 체제가 어느 정도 잡히는 것을 기다렸을 땐 이미 3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그제야 유성원과 기사들은 전라도 목포에 있는 성좌 66천마의 코어 던전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