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하나, 운명이 그를 놔두지 않는 것일까?
평온하기 그지없는 일상 속에서 전선 도시와 아이언 포트리스를 오가는 나날을 보내던 중 바라지 않던 손님이 들어왔다.
바로 한국 주재 올림푸스 길드의 S급 헌터 트리토니아스로, 그냥 무시할 수 없는 손님이었다.
그에 유성원은 어쩔 수 없이 맞이하러 나갔다.
“어라? 올림푸스에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트리토니아스 님. 일본에서의 일 때문인가요?”
“아뇨. 그건 이미 다 끝난 문제라서 더 이상 언급할 것도 없습니다. 그보다 역시 대단하시더군요. 명계 여왕의 옥좌를 착용한 페르세이아 님과의 싸움에서 죽지 않고 끝내다니……. 길드 전체에서도 큰 화제입니다.”
“너 지금 나 약 올리러 온 거냐?”
“아, 아뇨! 워낙 거물급끼리의 전투라서 화제성이 높았을 뿐입니다.”
성좌 하데스의 사도이자, 단순한 영웅의 가호를 능가하는 특수한 신격의 가호까지 얻은 페르세이아와 한국의 떠오르는 신흥 강자 SS급 헌터의 격돌은 단순히 두 조직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각성자 및 헌터들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물론 중재 끝에 물러난 유성원 쪽에 판정패라는 의견이 쏠리긴 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버티면서 싸워 나간 유성원의 투지도 호평을 받고 있었다.
“워낙 상정 외의 상대였어. 명계니 죽음의 영역이니 하는 건 또 뭔지, 식겁했다.”
“그건 저희도 어쩌지 못하는 겁니다. 오히려 그분께서 역으로 칭찬하더군요.”
“…립서비스겠지. 아무튼 그 이야기는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지. 뭐 하러 온 거지? 사후 강평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성좌 66천마에 관한 일입니다. 한국은 빠른 대처로 전선의 확대 없이 깔끔하게 막아 내었지만, 일본 놈들이 여기저기 퍼뜨려 놓은 곳은 피해가 막심합니다.”
성좌 66천마.
끝없는 전쟁의 성좌인 ‘성좌 66천마’의 사령 부대들은 일본 정부와의 거래에 성공하여 한국을 비롯한 각 대륙에 대장군들을 이동시켰고, 그 결과 본래 일본에만 국한되었던 성좌 66천마의 몬스터들이 세계 각지에 나타나게 되었다.
“놈들이 퍼뜨린 곳은 총 네 곳. 미국, 한국, 호주, 그리고 하나는 본래 러시아로 가던 것이었지만 일본 놈들이 우리가 눈치챈 탓에! 그대로 선회해서 중국으로 갔습니다. 깔끔하게 막아 낸 이곳과 다르게 다른 곳은 땅덩어리도 크고, 모든 지역에 그 통제력이 미치지 않으며 포탈 감시 장치도 설치 안 된 곳이 많아서 생각 이상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사령들이 넓은 영토를 차지하면서 군세를 불리고 있습니다.”
“어우, 안타까운 일이네.”
“미국도 상처가 크지만 특히 중국과 호주가 아주 극심한데… 아시다시피 땅이 너무 넓어서 그 통제력이 전역에 미치지 못하는 게 문제라, 아무리 사령 군대를 쳐부숴도 물량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 대장군은 못 잡나? S급 몬스터이긴 하지만 못 잡을 수준은 아니던데…….”
“일반 야생 몬스터와 달리 그 대장군 놈들은 하나하나가 전략가이자 군인인 자들입니다. 위험을 피할 줄 알고, 보급이 필요 없는 무한의 병력을 손에 쥐고 있으니 아무리 잡으려고 노력해도 쉽지 않습니다.”
설명을 들으며 일전에 명군대장군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는 유성원이었다.
확실히 암군대장군은 우연히 가울프와의 악연 때문에 숙명을 걸고 정정당당히 결투를 하게 된 것이었지만, 명군대장군은 아주 냉정하게 판단해서 군대를 물릴 줄 아는 지휘관의 모습이었다.
“여기 몇 가지 기록입니다만, 매우 골치 아픈 상황입니다. 기동전, 야습, 약탈, 파괴 및 살인, 병력이 무한정 나오는 상대인데… 던전은 클리어하는 것보다 더 많은 숫자가 나타나고 있고, 물류가 끊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대체! 그놈들은 왜 기병 같은 걸 운영하는 겁니까?”
“아~ 사령무사였나? 말 타고 다니는 애들이 있긴 했지. 그래서 결론이 뭐야? 어디 지원이라도 나가 달라는 건가?”
“아뇨. 다릅니다. 유성원 헌터님, 저희 올림푸스 길드는… 당신에게 성좌 66천마의 코어 던전 공략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뭐어?”
트리토니아스의 말에 유성원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성좌의 코어 던전.
그것은 이 세계를 침략한 성좌들의 중심 거점이자 핵심, 존재를 유지하는 곳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리고 그 안은 당연히 ‘성좌의 아바타’를 비롯해서 모든 성좌의 사도들이 지키려 하는 곳이며 여타의 던전과 다른 법칙, 강력한 적이 있을지 모르는 곳, S급 헌터들이 다수가 간다고 해도 공략을 장담할 수 없는 던전이었다.
“…제정신이냐? 나보고 공략하라고? 아니, 나보다 강한 댁들 올림푸스의 헌터들은 뭐 하고?”
“저희가 뭐랑 싸우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그 강한 전력들이 남아돌면 당연히 진작 작전하러 한국에 입국부터 했겠죠. 하지만 세계 전역엔 성좌 66천마나 성좌 도살왕보다 더 무서운 존재들이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성좌 ‘영원한 분노’.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이 성좌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계를 먹고 있습니다.”
“…세계를 먹는다니? 무슨 말이야?”
“물리적으로 먹는다는 겁니다. 거대한 고래 같은 모습의 아바타로 강림해서 바닷물과 지하의 땅을 먹어 치우고 있습니다! 그러곤 자기가 지배하는 차원과 별에 그 소화시킨 것들을 배설해서 다시 새로운 세계로 바꾸는 놈입니다.”
“…아! 알아. 그… 다 먹는 데 한 2천 년쯤 걸리는 놈이라고 해서 그냥 놔뒀었지.”
“말이 다 먹는 데 2천 년이지, 이삼백 년 정도면 자연 생태계가 붕괴되기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북극과 러시아에서 내려오는 성좌 얼어붙은 지배자, 중국엔 성좌 진황, 이어서 킬리만자로! 인도! 유럽! 남미까지!”
전 세계 단위로 일하는 올림푸스 길드의 고충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트리토니아스였다.
12성좌의 사도와 부하들, 수많은 천공섬들이 있지만 이 지구상에 강림해 있는 거악(巨惡)들을 커버하느라 모든 힘을 사용하고도 부족한 게 현실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저희 올림푸스 길드가 없으면 세상은 멸망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3대 길드의 한 축으로 여기선 잘 먹고 잘살더만…….”
“여긴 그나마 할 만했습니다. 서울 길드가 개똥 같은 건 좀 그랬지만, 그래도 청룡 길드는 나름 ‘투쟁’의 성좌 아래에서 잘하고 있었다고요. 그래서 저희도 그와 경쟁하지 않고 그냥 인원만 뽑는 선에서…….”
“뭐, 좋아. 여력이 없는 건 이해했어. 그렇지만 코어 던전이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우리보고 단독으로 하라는 건 너무 막 나가는 소리 아니야?”
“막 나가는 소리라니요? 오히려 이상한 건 당신이죠! 이 작은 도시에 SS급에 S급 헌터 숫자만 몇 명인지 아십니까? 심지어 당신은 S급 헌터의 역량을 가진 기사를 ‘소환’까지 할 수 있잖습니까? 그런 포텐셜을 가지고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게 더 이상한 겁니다. S급 한 명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시는 겁니까?”
기존 S급 헌터의 숫자를 생각해 봐도 일본만 해도 16명, 한국은 10명. 그것도 노인, 어린아이 가리지 않고 포함했을 때의 숫자로 그만큼 S급 헌터는 매우 귀중한 존재였다.
그런 귀한 인력을 만만하게 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무튼 구하기가 너무나 어렵기에 B급 이상부터는 괜히 모아서 따로 관리하는 게 아니었다.
반면 유성원은 어떤가? 하나하나가 S급 몬스터와 겨룰 수 있는 기사들과 함께하는 건 물론, 기존의 S급 인원들도 어디서 주워 오거나 합류시켜서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 아이언 포트리스에 속한 S급 전력만! 당신과 기사들을 합쳐서 8명! 거기에 일반 S급 헌터는 일본에서 데려온 셋과 한국에 있던 셋을 포함해서 6명. 도합 14명! 이 정도면 한 국가 단위 이상으로 S급을 보유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S급을 많이 보유했다고 코어 던전에 가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잖아. 세상이 망할 때까지 어떻게 사느냐는 내 마음이지.”
“정말 이러실 겁니까? 당신에게 그 힘이 주어진 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안 드신단 말입니까?”
결국 유성원의 태도에 화가 난 트리토니아스는 꾹 참고 있던 말을 내뱉었지만,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어떤 원망을 듣는다고 해도 코어 던전에는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영웅적 감성이 없으면 못 가는 곳. 공략에 성공해서 돌아온다고 해도 사람들은 아마 금방 은혜를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거기서 얻은 물건을 가지고 다투는 일밖에 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 안 들어.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법이고, 신님께서 실수했나 보지. 그리고 오히려 오만한 건 너희 올림푸스 길드가 아닐까? 세상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안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든가?”
“무례한 발언의 연속이군요.”
“그야… 너네도 단숨에 일본을 때려잡을 역량이 있으면서 세계를 방치했고, 정작 코어 던전도 안 가잖아. 만약 갈 생각이 있었으면 우리에게 너희 전선 비는 곳을 막아 달라고 하고 너네 헌터들을 보내는 방법도 있는데… 굳이 날 콕 집어? 이상하지?”
“하아아~ 그 부분에 대해서도 왜 안 되는지 설명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올림푸스 길드는 12성좌가 함께 다스리는 구조이며 또 그 아래 사도들에게 각종 신화의 ‘가호’가 내려지는 형태입니다. 아시지요? 저에게는 ‘트리톤의 가호’가 내려져 있죠.”
“어, 잘 알지.”
“그러자 많은 이들이 상상했습니다. 그리스 신화 올스타 영웅들을 모아서 코어 던전을 클리어하면 되겠네? 같은 상상 말이죠.”
뭇사람들에겐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일이었으리라.
현시대에 신화의 ‘가호’를 가진 영웅들이 모두 모이면 엄청난 힘과 역량을 발휘할 거라는 생각. 마치 헤라클레스와 그의 등을 맡아 주는 아킬레우스라든가?
케이론의 아래에서 교육받는 각종 병사들과 함께 나아가는 모습 말이다.
하지만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다들 개개인의 자존심도 강하지만 같은 ‘성좌’ 아래에 있는 이들이 아니면 혼선이 크고, 서로 협력이라는 게 잘 안 됩니다. 또 ‘가호’의 특성엔 모티브가 된 신화나 전설의 단점도 포함되는 경향이 있고…….”
“있고?”
“이미 몇 차례 실패했습니다. 침략해 온 악(惡) 성향 성좌들도 바보는 아니니까요. ‘신화, 전설의 가호’를 받은 이들이 너무도 유명한 탓에 그 약점도 명확합니다. 자기 영역으로 들어오면 여지없이 그걸 공략해 버리죠.”
“…아!”
그것은 올림푸스 길드 자체의 약점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적합한 자에게 ‘가호’만 내리면 곧바로 전력이 될 수 있는 신뢰성 높고 강력한 헌터가 나오지만, 그 ‘가호’가 어떤 것이냐에 따른 약점도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킬레우스의 가호’를 가진 자는… 뻔하디뻔할 정도로 다들 발뒤꿈치를 노리게 되겠지요. 이게 또 밖에서 싸우는 전투라면 다른 헌터나 병사 및 장비와 각종 보조로 지켜 내기 쉽지만, 코어 던전은 상대 ‘성좌’의 영역. 그걸 지켜 주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건 문제네.”
“반면 유성원 헌터님의 세력은 단일 인물 아래 모두가 충성을 다해 뭉쳐 있는 관계이며, 다양한 종족과 인물들의 구성, 첨단 기술에 대한 거부감도 없고, 기사도라는 목적 하나로 결단력도 높습니다. 또한 뚜렷한 약점도 보이지 않구요. 공략에 딱 어울리는 팀입니다.”
“으음…….”
올림푸스 길드의 단점을 듣고 보니 트리토니아스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밖을 지키는 것엔 유리하지만 코어 던전 공략엔 불리한 특성 때문에 자신에게 이번 일을 맡기려 하는 건 알겠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승낙하기엔 어려운 문제였다.
“내 목숨도 걸어야 하지만, 문제는 내가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야. 알다시피 나를 포함해서 8명은 모두 내가 죽으면 같이 사라지는 기사들이야. 지휘부가 사라지면 곤란하지.”
“그 부분은 저희가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일본에서 한 일을 보면 그렇겠지. 하지만 역시 상의를 좀 해 봐야 할 문제야. 그 정도 선택의 여지는 주겠지?”
“예. 그러지요.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렇게 트리토니아스를 보낸 뒤, 유성원은 잠시 사람들을 들이지 않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또다시 눈앞에 드러난 ???로 가득한 상태창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든 것이다.
애초부터 이상하긴 했다.
자기 같은 놈을 그냥 각성시킬 리도 없고, 지금 몸에 입고 있는 이 갑옷부터 해서 기사 소환 스킬까지. 너무 이례적일 정도로 좋은 특전들을 주루루룩 준 것부터 시작해서 쉽고 빠르게 강력해지는 것에 비해 특성 제약은 ‘기사도’ 하나뿐이다.
[???]
[1/???]
“그래, 이걸로 잘 먹고 잘살았으면 이제 일 좀 해라, 이거지?”
청룡 길드를 쓰러뜨리고 성좌 청룡을 이 지구에서 사라지게 했을 때, 어렴풋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의 사명, 자신이 해야 할 일.
잠시 눈을 감고 어찌해야 할지 고뇌하던 유성원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