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후우… 윽! 더럽게 아프네. 게다가 이거 상처… 뭐야? 살이 시커매? 뭘 한 거야? 그러고 보니 상처 입은 곳이 다 이 모양이네? 젠장! 이거 잘라 낸 다음에 치료해야 하나?”
페르세이아라고 하는 여성의 낫에 당한 곳이 말 그대로 새까맣게 변해서 썩어 가고 있는 것을 본 유성원은 경악해서 소리쳤다.
난감해진 그는 별도로 나이프를 꺼내어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본 히프시스가 답을 말해 주었다.
“아… 타나토스의 낫에 닿으면 원래 그렇습니다. 그리고 치료 방법은 말씀하신 대로 썩은 부위를 잘라서 치료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할게.”
그때, 병 준 장본인인 페르세이아가 갑자기 유성원에게 다가와 상처 부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새까맣게 썩었던 부분이 순식간에 선홍빛으로 변하면서 생명이 돌아왔다.
그런 식으로 다른 썩은 부위도 원래대로 만드는 그녀였다.
“이제 치료하면 돼.”
“치료까지 되는 건 아니었군. 근데 생기가 돌아오니… 더 아파!”
“…타나토스의 낫에 맞고 그 정도인 게 오히려 다행이죠. 아무튼 치료하시면서 들으시지요. 유성원 헌터님, 한국에서 이곳 일본에 오신 이유는 역시 저 일본 놈들이 저지른 개삽질 때문이시죠?”
유성원은 상처에 포션을 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본래 이곳에 온 이유는 망할 일본 놈들이 바다 건너 한국에다 감히 성좌 66천마의 군대를 배달해 놓은 것 때문이었다.
지금 그거 때문에 코어 던전까지 생긴 마당이라서 더욱 빡치는 게 사실이었다.
“어, 맞아. 으따따따! 겁나 쓰리네! 진짜아아!”
“역시 그러셨군요. 뭐, 그렇다면 저희와 적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왜 페르세이아 누님을 방해한 겁니까?”
“그야 책임질 어른 새끼들이 넘쳐 나는 판국인데, 아무런 판단도 못하고 어른들에게 이용만 당한 애들의 목숨을 대가라고 받아 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있겠냐? 애초에 일본의 S급은 16명! 8명을 노린다면 책임과 권한이 큰 순서로 잘라야지!”
“…흐음, 그러면 고작 그걸 위해… ‘명계의 여왕’인 누님과 싸운 겁니까?”
“그래!”
당당하게 말하는 유성원의 태도에 히프시스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자신감 넘치는 SS급 헌터라지만 그래도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의 가호를 받은 페르세이아와 맞설 생각을 하다니. 만용이라고밖에 생각이 안 될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마다 가치관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대화를 진행시켰다.
“뭐, 좋습니다. 그럼 그 애들만 빼면 우리 일을 더 이상 방해 안 한다고 봐도 되겠는지요?”
“기왕이면 민간인들한테도 자비를 베풀었으면 하는 것까지.”
“그건 좀 힘들겠네요. 저희의 목표는 핏값을 확실히 받아 내고 여기에 두려움을 주는 거라서 말이죠.”
“그러면… 후우~ 지금 데리고 가는 애들이나 일본 정부에서 말 없게 해 줘. 알았지? 안 그러면 나는 여기서 뒤처리를 하고 가야 하니까 말이야.”
“좋습니다. 협상 완료군요.”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먼저 잘못한 것은 일본이기도 했고, 일단 상대가 올림푸스라는 초대형 길드인 데다 지금 맞서 본 페르세포네의 가호를 받은 페르세이아라는 헌터조차 완벽하게 이길 수 없었기에 유성원은 타협 가능한 선에서 요구 사항만 주고받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 맞다. 그리고 나중에 성좌 66천마 문제에 관해서는 따로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곧 다시 연락이 갈 겁니다. 그땐 잘해 봅시다.”
“예, 그러죠.”
그렇게 잠시 큰 싸움이 일어나는 듯했지만, 서로 오해를 풀고 합의한 뒤 물러나는 두 사람이었다.
그 뒤, 엘드라엔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며 유성원은 상처는 아물었지만 아직 고통이 약간 남은 손을 바라보았다.
금빛 신수의 갑옷을 그냥 뚫어 버리는 기묘한 낫과 일반적인 법칙을 넘어선 스킬. 어쩌면 오늘이 진짜로 자신의 제삿날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페르세포네의 가호라고 했던가? 그… 하데스의 마누라였지?”
[명계의 여왕이며 신급 가호이지. 물론 인간의 몸으로 그 가호의 모든 힘을 끌어낼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계약자여,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나도 알아. 정말이지 이런 경우도 있구나 싶네. 확실히 이길 수 있었으면 이 정도에서 안 물러났지.”
콰르르릉!
유성원이 떠난 이후에도 도쿄의 불길과 전쟁의 소음은 아직도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상대측 세력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젠 자신의 목숨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기에 물러나야만 했다.
“그나저나 가호들 중에서 ‘신(神)격’은 너무한 거 아니야? 대놓고 치트잖아? 명계니 죽음의 영역이니 하는 거 뭐야? 대체?”
[말 그대로… 그녀는 명계로 몸을 숨길 수 있는 것이겠지. 이차원으로 넘어간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다, 계약자.]
“그래서 올림푸스 길드가 강한 거죠. 참고로 그녀는 성좌 하데스의 직속 사도일 거고… 아마 제우스나 포세이돈의 직속 사도이면 그보다 월등히 강할 겁니다. 다만 그들이 내리는 ‘가호’를 받을 적합자를 찾는 게 언제나 문제라서 말이죠.”
저렇게 강한 헌터를 ‘가호’를 내리는 것만으로 쉽게 만들어 내는 올림푸스 길드의 단점은 오직 ‘가호’를 받을 적합한 자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합한 자만 있으면 그 힘은 충분히 보장되었다.
“아무튼 일본은… 이걸로 끝장나겠군.”
“인류를 배반한 대가를 제대로 보여 줘야 하니 저들도 철저히 할 겁니다.”
“그러겠지.”
쿠르르르릉!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그 어떤 나라도 자국의 이익보다는 인류의 수호와 존속을 위한 선택을 해 왔었는데, 일본은 그 역사를 배신하고 자국의 이익과 국력을 보존하기 위해 여러 대륙에 사라지지 않는 전쟁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그래도 올림푸스 길드가 이럴 땐 제대로 나서 준다는 인식을 보여 주니… 그거 하나는 다행이네.”
“그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인류’라는 결속이 무너지고 말 테니까요.”
자국의 이익만을 좇아 국가 단위로 ‘인류’를 배신한 대가가 어떤 건지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올림푸스 길드는 지금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리라.
이미 미국 서부가 큰 피해를 입은 만큼 미국 정부도 원한을 갚아야 했고, 앞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악(惡) 성향 성좌와 손을 잡는 국가가 나와선 안 되기 때문에라도 가차 없이 처벌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
“으음, 방해물은 치웠으니 이제 다시 일을 할 수 있겠네요. 그건 그렇고, 역시 SS급이라는 소문, 허세가 많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스테이터스만 장비발로 SS급에 도달했다고 막 이리저리 포장한 것 같은데, S급인 누님의 적수가 못 되더군요.”
근 1년 만에 갑작스럽게 부상한 거대 루키. 성좌 도살왕의 사도들을 줄줄이 잡으면서 한국의 안전을 되찾은 영웅인 동시에 정부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야생마 같은 인간이라 골치를 썩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었다.
게다가 심지어 헌터 등급은 SS등급이라는 말에 자신들의 S급 헌터인 페르세이아를 잃을 것 같아서 부리나케 나왔지만, 전투는 사실상 그녀의 승리나 다름없었기에 생각보다 별로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건 아냐.”
“예?”
“내 팔… 뒤틀려 버렸어.”
말과 함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팔을 보여 주었다. 팔꿈치 쪽의 뼈가 튀어 나왔고 팔뚝 중앙 부분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는데, 그걸 본 히프시스가 깜짝 놀랐다.
“무기끼리… 좀 더 부딪쳐서 힘이 전해졌다면 아마… 내 팔은 물론 몸이 부서지고… 전투 불능이 되었을 거야.”
갑옷을 뚫고 피부에 닿아서 살을 썩게 하는 타나토스의 낫의 효과나 명계로 전이하는 능력과 별개로 무기를 잡고 휘두르는 물리적인 움직임은 결국 육체가 하는 것이었고, 유성원은 무재의 힘으로 공방을 계속했던 것이었다.
“하긴 티탄의 말뚝을 들고 휘두르는 인간이니… 오죽할까요? 아무튼 그런 게 있었으면 빨리 말씀하시라고요.”
“그래도 참은 덕분에… 승리한 거잖아.”
“…아, 그야 그렇죠.”
페르세이아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무게감을 유지한 덕분에 유성원은 자신의 요구를 꺾고 물러섰고, 그런 모습을 보인 시점에서 그들은 확실히 판정승을 얻은 셈이었다.
아무튼 페르세이아는 포션을 꺼내 마시면서 자신의 뒤틀리고 부어오른 양팔을 억지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분명 고통스러울 텐데도 그녀는 가면 아래로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한 채 치료를 완료했다.
“그럼 마저 일하러 갈게.”
“예, 누님. 아무튼~ 한심하게 몬스터에게 잡히는 멍청이들이니까 걱정 없겠지만, 혹시라도 궁지에 몰린 개들이 발악한다고 물 수 있으니 그거만 조심해 주세요.”
“응.”
그렇게 치료를 마친 페르세이아는 낫을 들고 다시 어디론가 향했다.
그곳은 다른 일본 길드의 S급 헌터가 있는 곳이리라.
3명을 한 번에 잡을 기회를 놓쳤으니 다른 3명을 일일이 찾아서 가야 하는 만큼 시간이 낭비되는 건 아까웠지만, 이미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히프시스였다.
***
야스다 길드.
화려한 건물들 사이에 있는 일본의 전통식 건물.
간신히 해방된 후지와라 길드장은 그 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고 있었다.
일본 정부가 자신을 버리지 않으리라는 건 알았고, 무사히 돌아온 것까진 좋았지만 설마 올림푸스 길드의 하데스 세력이 자신들을 심판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에서 어떻게든 처리하겠다고 했지만, 협상하려는 태도가 오히려 그들의 심기를 거스른 건지 지금 도쿄는 초토화가 되고 있었다.
자신들의 길드부터 시작해서 여러 길드가 ‘성좌 하데스’의 헌터들과 전투 중이었다.
“젠장… 이럴 순 없어. 아니, 당연히 S급 헌터가 귀하기에 구한 것뿐인데 왜 우리가 인류를 배신한 게 된 거야?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길드장님, 이미 2차 방어선까지 뚫렸고 기지 2개가 점령당했습니다. 이대론 버티지 못합니다.”
“큭!”
“상대는 ‘아킬레우스의 가호’를 받은 자부터 시작해서 S급 3명이 쳐들어와서… 도저히 못 막습니다. 길드장님!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든가, 뭔가 대책을…….”
부하가 채근해 왔지만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올림푸스 길드의 성좌 하데스의 부하들은 말 그대로 사신. 그것에 대항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신격과 반신의 가호가 가득한 그들의 힘에 저항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끄으으으응!”
결국 남은 길은 하나뿐.
하데스의 손에 죽을 바엔 스스로의 손으로 옥쇄하여 야스쿠니 신사에 영원히 남는 것뿐이었지만, 그 정도로 명예롭게 죽을 마음이 있는 자였다면 진작 수송기에서 대장군들을 밀어내고 자신을 희생했을 것이다.
“젠장… 젠장…….”
“길드장님, 이젠 시간이…….”
“나는… 나, 나나… 나는… 나는!”
하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S급 헌터로 길드에서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아온 후지와라는 스스로 옥쇄할 만큼 국수주의나 광기에 물든 게 아니라서 그런 결정이 최선이라는 걸 안다고 해도 쉽사리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죽기 싫었다.
돈, 권력, 모든 걸 손에 넣은 이 자리에서 계속 군림하면서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살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목표… 발견.]
그렇게 시간을 끌다 보니, 결국 자신의 목숨을 거두러 사신이 등장하였다.
검은 수의에 하얀 가면과 거대한 낫. 페르세포네의 가호를 받은 헌터, 페르세이아였다.
“으아아!”
하지만 그 소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 몰릴 때까지 몰리고서야 부적을 꺼내 마구잡이로 스킬을 쓰며 대항하는 후지와라 길드장이었지만, 그것도 고작 10초 남짓한 덧없는 저항일 뿐이었다.
결국 낫을 든 페르세이아에게 순식간에 목이 잘린 그의 영혼은 명계로 끌려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