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부서진 도쿄의 어느 폐허에서 유성원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와 무기를 맞댄 채로 본래 그녀가 노렸었고, 현재 자신의 뒤에 쓰러져 있는 아이들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특무부대 복장을 한 아이들의 목에는 구속구 같은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는데, 일전에 작전 회의에서 보았던 바로 그 S급 헌터 아이들이었다.
‘젠장! 내 미친 오지랖!’
떠나려던 순간, 금방이라도 거대한 낫에 죽을 것 같은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유성원은 도저히 무시하지 못한 채 무기를 들고 뛰어내려 그 사이에 끼어든 것이었다.
“괜찮냐? 그… S급 꼬맹이 친구들? 아, 아니! 일본어는 못하지만, 아무튼 뉘앙스는 알아먹겠냐? 그리고 거기… 예쁜 누님? 이 애들은 좀 봐주면 안 될까? 쪽발이들이 개 같은 짓을 한 건 맞지만 책임이라는 건 말이지, 엄연히 어른들이 져야 하는 거라고!”
[…대상 언어 분석 완료.]
“아… 한국말 할 줄 아시나? 그러니까~”
[비키세요. 당신은 ‘처분’ 대상이 아닙니다.]
“애들을 ‘처분’ 대상으로 삼는 건 안 좋다고 보는데요? 일단은… 유청! 가울프! 걔네 데리고 성소로 튀어! ‘포로’로서 허가한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유성원은 자신을 따라 내려온 가울프와 유청에게 곧바로 명령을 내렸고, 그들은 땅에 쓰러진 특무부대 S급 세 아이들을 데리고 각자 ‘성소’의 차원문을 열고서 그대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거대한 낫을 든 눈앞의 여성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면서 유성원을 노려보았다. 유성원 역시 결국 싸울 운명이라 생각하고 기합을 넣었다.
“하아, 아무리 죄가 있는 나라라고 할지라도 그것의 책임 소재는 분명히 해야 하는 법! 아이들에게까지 그 잔혹한 심판의 낫을… 아! 아줌마! 기사의 선언은 다 들어 주세요!”
[명계의 심판을 방해하는 자로 규정. 즉시 처분한다.]
“얼어 죽을! 여기가 명계냐?”
카아아앙!
티탄의 말뚝과 거대한 낫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본래 낫이라는 무기는 이렇게 내구도가 좋을 수 없는데, 티탄의 말뚝과 부딪치고도 그 강도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일단 무력 자체는 유성원 쪽이 더 강한지 그는 굳건히 제자리에 선 채로 무기를 휘둘러서 공격을 받아쳐 내었고, 상대하는 여인은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공격을 퍼부었다.
‘하루살이 같네?’
[…큭!]
‘근데 어디까지 빨라지는 거야?’
쾅!
물론 힘의 차이가 있어서 튕겨 나가긴 했지만,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더 빠른 속도로 낫을 휘둘러 대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낫의 날이 금빛 신수의 갑옷에 스치자 갑옷에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갑옷에 상처가?”
[뭐지? 타나토스의 낫이… 뚫지 못했다고?]
“저 낫… 뭐야?”
유성원은 물론 공격하던 그녀도 놀란 표정으로 자신과 낫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래도 충격을 받은 건 양측 모두인 것 같았다.
서로가 자신하던 무기와 갑주가 예상외의 성능을 내는 것을 보면서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둘은 집중력이 한껏 올라갔다.
‘하긴 애들이지만 S급 셋을 때려눕힌 여자이니까……. 보통은 아니겠지.’
[적의 강함에 맞춰 대응 수준을 올리겠다.]
척.
그렇게 말하며 낫을 들고 자세를 잡는 그녀를 본 유성원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하나, 그 긴장은 몸을 무겁게 누르고 부담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강자와 만나 기뻐하는 기대와 흥분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본래 갑옷 내부의 유성원이라는 인간은 평범한 인간의 감성을 갖고 있지만, 그가 선택한 스킬들로 인해 모든 작용이 바뀌고 있는 것이었다.
‘뭔가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것 같은 꺼림칙함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졸아붙어서 덜덜 떠는 것보단 낫지.’
[…….]
그렇게 무기를 겨눈 채로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
언뜻 보면 싸움이 멈춘 듯했지만 낫을 든 그녀는 이미 머릿속으로 싸움을 진행하고 있었고, 유성원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 대치 속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낫을 든 그녀였다.
궤적조차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낫이 휘둘러져 왔지만 무재(武才) 스킬은 오히려 감사하다는 듯 티탄의 말뚝을 잡고 막아 내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유성원의 육체도 가속하기 시작, 평소 전투에서는 힘을 주로 썼지만 민첩 스탯도 낮지 않았기에 둘은 잔상만 남기면서 격돌해 나갔다.
‘주고받을수록 슬슬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적응력… 상상 이상… 무서운 적.]
“칭찬 감사합니다!”
[계속 적응하기 전에 신속하게 명계로 인도해야 함. ‘명계 여왕의 옥좌’를 요청합니다.]
사아아아…….
순간, 허공에 갑자기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의자가 나타났고, 의자에서 나오는 검은 기운이 그곳에 앉은 그녀를 감싸면서 무장시키기 시작했다.
즉, 이때까지는 전력이 아니었다는 의미였다.
검은 연기 속에서 나온 그녀는 이제 수의가 아니라 빛마저 삼킬 듯한 칠흑의 갑주를 입고 있었는데, 더 길고 커진 낫에는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이거 장난 아니겠는데?’
[순살(瞬殺)시켜 드리죠.]
“…그게 쉽게 될까?”
말은 유롭게 했지만, 유성원은 처음 레그혼의 ‘봉황승천’을 봤을 때와 같은 전율을 느끼는 중이었다.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 위가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고, 심지어 올림푸스 길드엔 이런 괴물이 하나만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젠장! 감상도 못하게 하네! 게다가 이거…….’
[…….]
‘뭐야? 사라졌어?’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흔적, 기색, 기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뜻 도망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법했지만, 유성원의 내면에 있는 스킬과 본능이 살의를 느끼고 무기를 들어 겨우겨우 방어해 내었다.
무기가 무기에 닿는 순간 느껴지는 압력 외에는 상대에 대해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싸움. 다른 누군가의 눈에는 아마 유성원 혼자서 쇼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싸움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젠장… 하아~”
보이지 않는 공격 속에서 어떻게든 막으며 잘 버티고 있었지만, 갑옷 이곳저곳에 흠집이 생길 정도로 힘든 건 사실이었다.
거기에 상대는 단순한 은신이나 투명화 같은 개념을 넘어선 ‘존재’ 자체를 지우는 것 같았기에 잔재주로는 밝혀낼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무기 또한 강해졌는지 갑옷의 흠집은 아까보다 깊었고, 어떤 공격은 살을 스쳐서 고통까지 느껴졌다.
‘이렇게 되면…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겠군.’
이대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 유성원은 약간의 고통과 피해를 각오한 채 다음 공격이 오길 기다렸다.
살기를 감지해서 공격을 느끼고, 티탄의 말뚝이 아닌 왼 손바닥으로 낫의 날을 받아 내어 그대로 팔뚝까지 갑옷과 함께 베어졌지만, 장대의 간격을 보고 그대로 파고들어 상대의 머리가 있을 위치에 티탄의 말뚝을 강하게 휘두르는 유성원이었다.
바로 살을 주고 머리를 치는 전략으로, 팔의 부상은 어떻게든 고치면 되기에 고통을 각오하고 내지른 방법이었다.
“자, 잡았다……!”
부우우우웅!
그러나 확신하고 휘두른 티탄의 말뚝은 유성원의 말과 달리 허공을 가르며 공기를 밀어내는 흉흉한 소리만 냈다.
그걸 본 유성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무재(武才) 스킬이 잰 완벽한 간격, 그리고 자신의 팔을 내어 준 타이밍에 맞춘 완벽한 공격이었는데 빗나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뭐야? 젠장!”
[…….]
카앙!
하지만 현실을 부정해 봤자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다.
다시 날아오는 낫의 공격을 티탄의 말뚝으로 막아 내고 뒤로 구른 유성원은 스스로 수복되어 가는 갑주와 함께 손을 고치기 위해 티탄의 말뚝을 땅에 꽂고는 포션을 꺼내 들이부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젠장!’
[계약자여, 지금 저 여자는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다. 죽음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의문을 품은 순간, 성소 안에서 보고 있던 가울프가 어느새 튀어나와서는 유성원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하지만 유성원은 그 말을 이해 못하고 의아해할 뿐이었다.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니? 죽음의 영역이라니? 온통 알지 못할 소리만 들려오자 난감했다.
“뭐? 으악! 제길!”
[…….]
카앙!
생각할 새도 없이 상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낫을 휘두르며 결정타를 먹이고자 하였다.
방금 한 손을 희생하고 얻은 공격 기회를 놓친 탓에 유성원은 남은 오른손으로 티탄의 말뚝을 다루면서 날아오는 그 빠른 공격을 막아 내야만 했다.
하나 아무리 공격이 오는 것을 알아차린다고 해도 한 손만으로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다른 승부수를 고민하게 되는 유성원이었다.
‘죽음의 영역이 뭔지는 몰라도… 대충 다른 공간에 숨었다는 거지?’
[끈질기군요. 순순히 명계로 가면 될 것을…….]
‘그러면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그게 너무 범위가 큰 게 문제이지만…….’
자신의 스킬인 패황천검류의 검 중에서 유용한 것이 떠오르긴 했지만, 워낙 큰 기술이라서 과연 맞힐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게다가 한 번도 제대로 써 보지 않은 것이라서 이 도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기에 살짝 고민이 들었지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이것저것 가릴 수는 없었다.
‘일단은 살고 봐야 하니 말이지. 애초에 시전하기도 힘들지만…….’
[꿍꿍이가 있나 보군요.]
“나 보이지 않는 혼돈을 가르기 위해서…….”
딱 봐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하려는 걸로 보이는 유성원의 모습에 상대의 낫질은 더욱 거세지고 빨라졌다.
하지만 그렇게 하자 오히려 공격을 느끼기가 더 쉬웠기에 방어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리하여 손발이 오그라드는 영창을 마치고, 공간을 가르기 위해 유성원은 티탄의 말뚝에 힘을 모아 이제 위치를 잘 보고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 찰나였다.
그 순간, 갑자기 머리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자! 둘 다 그만! 페르세이아 누님! 스톱! 거기 황금 기사 유성원 님도 스톱! 이제 제가 누님 대신 협의하겠습니다. 누님도 얼른 ‘명계 여왕의 옥좌’를 해제하고 물러나세요. 역시 소문대로 대단한 솜씨군요. ‘명계 여왕의 옥좌’를 끼고 ‘페르세포네의 가호’를 가진 페르세이아 누님과 이렇게 오래 맞서고도 살아 계실 줄이야.”
“그래서? 네가 상대할 건가?”
“그럴 리가요. 저는 엄연히 전투 담당이 아니라서요. 자, 제 소개부터 하죠. 올림푸스 길드, 성좌 하데스 님의 아래에서 일하는 히프노스의 가호를 받은 히프시스라고 합니다. 싸울 생각 전혀 없으니 무기를 내려놓고 마음 놓고 치료하시죠.”
“…좋아. 그러도록 하지.”
저 페르세이아라는 여자의 역량이 예상외로 강하기도 했고, 꼭 이긴다는 승산이 없는 만큼 물러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티탄의 말뚝을 집어넣은 유성원은 낫을 막아 냈던 팔 부분의 갑주를 해제하고 본격적으로 치료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