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으으으음…….”
“총리님.”
“후우우우~ 생각할 시간을 주게. 이건… 이건 정말 선택이 힘든 사안이니 말이야.”
“예.”
이곳에 참여한 누구라도 이 사안이 결정짓기 어려운 것이라는 걸 한 번에 이해했다.
S급 헌터 4명의 가치는 더 말하면 입만 아플 정도였다. 그렇다고 저들의 요구대로 바닷길을 내주면 헌터 협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S급 헌터 4명은 절대 버릴 수 없었다.
“총리님! 지금 혹시 우리 S급 헌터들을 버릴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놈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면 국제 사회의 엄청난 비난이 따를 겁니다. 성좌 66천마가 어떤 놈들입니까? 사령병들을 무한히 보내면서 끝없는 전쟁을 하는 놈들입니다.”
“그러면 귀중한 우리 일본의 S급 헌터들을 버리겠단 말이오? S급 헌터가 있어야 나라가 삽니다! 또 코어 던전을 클리어하면 성좌 66천마의 군세는 사라집니다. 그러니 가능성이 더 큰 쪽을 택하는 게 당연합니다.”
“맞습니다. 선택이 어렵다면 그중 우리 조국에 득이 되는 쪽을 선택하는 게 맞습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어차피 그것도 일본이 유지되어야 들을 수 있는 겁니다! 총리님! 게다가 성좌에 대한 맹세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나고야 전선 이상은 들어오지 않는다고요!”
“게다가 이번엔 그 잘난 한국인 용병도 부를 수 없는 처지인 만큼 다른 방안이 없습니다.”
이리저리 고민할 만큼 무거운 사안이었지만 답은 하나로 좁혀졌다.
이래도 난감하고 저래도 난감하다면 결국 ‘일본’ 측에 이익이 되는 방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바로 성좌 66천마의 군대와 대장군들을 다른 대륙으로 이송시켜 주고 S급 헌터 넷을 구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 선택은 비밀로……. 그리고 다른 국가에 알려지면 매우 곤란하니 길드 여러분과 특무대장님도… 돌아오지 않은 4명의 S급 헌터가 복귀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 주시오. 아시겠습니까? 다들 성좌에 대한 맹세로 대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저희 성좌 토키사다 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마찬가지로…….”
결국 일을 저지르게 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그 불이익의 여파를 줄이기 위해 정보를 통제하고, 사령병들과 대장군들이 넘어간 것에 대해 발뺌하기로 입을 맞췄다.
그것을 위해 모두에게 함구시키는 건 물론 성좌가 있는 헌터들은 그 성좌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으며 그 외 관료들 및 기타 직원들은 약속에 약속을 거듭 받았다.
“방위대신은 곧장 해군에 연락해서 배를 준비해 주십시오. 한시라도 빨리, 그리고 조용히 구하려면 역시 한국일 거고… 그들이 가장 늦게 눈치챌 만한 장소에다 대장군 하나를 슬쩍 놓고 오는 게 중요합니다.”
“알겠습니다.”
“…가슴 아픈 결정이지만, 우리 일본을 살릴 방법이 이것뿐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한국이나 그… 유성원 헌터에게 알리는 건 어떨까요?”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대장군을 한국에 상륙시킨 다음에 슬쩍 알립시다. 알려 주지 않으면 다시는 우리 의뢰를 받지 않을 테니… 감정이 상하지 않게 조치해야 합니다.”
유성원의 힘은 이미 톡톡히 확인한 만큼 그를 자극해선 안 되지만, 그래도 우려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성좌 66천마의 군대가 상륙하면 무한의 사령병들이 몰아치게 될 거고, 그것을 막아 낼 전선 유지에 쓰이는 비용이 만만치 않은 만큼 엄청난 항의가 있을 게 분명했지만 일본의 미래를 파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일본 정부였다.
그렇게 일본 정부는 화군대장군에게 보낼 답장을 특무부대장에게 주었고, 방위대신은 곧장 해군에 연락해 화군대장군을 운송할 배를 수배하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든 간에 S급 헌터 4명을 버릴 리는 없다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
일주일 뒤, 전선 도시.
본래 한국에서 활동하던 S급 헌터였지만 유성원의 아래에 들어온 이후 전투와는 멀어진 채 내부 업무에 주력하게 된 최충선은 오늘도 평온하고 즐거운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전선 도시에 새로 만들어진 고급 아파트의 최상층도 받았고, 짜증 나는 정치질이나 시달림 없이 풍족한 돈을 받으며 일하니 더할 나위 없이 잘 풀린 인생이었다.
“어우, 이거 너무 잘나가서 부담스러울 정도네. 내가 이런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게 될 줄이야.”
S급 헌터가 되면 이런 인생이다~ 싶은 모습을 이제야 이룬 그는 만족하면서 웃고 있었다.
전선 도시는 겉으로는 성좌 도살왕의 군세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 도시였지만, 실제로는 여느 대도시 못지않은 번영을 이루었다.
치안 유지는 물론 폭포수처럼 흐르는 투자 덕분에 각종 편의 시설도 충분했고, 일터는 많고 보수는 넉넉하면서 워라벨까지 맞춰져 있었다.
거기에 전선 도시라는 이유로 주택, 상가 건물의 매물을 강력히 통제하기 때문에 투기 세력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여 서민들도 저렴하게 세를 들어올 수 있는 장점까지. 인터넷과 뉴스의 댓글들을 보면 전선 도시에 들어와 살고 싶다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오죽하면 나한테까지 들어오는 방법을 문의할 정도이니……. 후우~”
‘대충 좋게 보이면 그만이야. 요점은 한국 정부로 하여금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거지.’
유성원은 늘 이렇게 말하면서 전선 도시를 만든 의도에 대해 둘러대었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너무나 달랐다.
전선 도시의 환경이 좋다는 소문이 나고, 도시가 커질수록 그저 다들 이곳에 들어오려고만 애쓰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낫게 할 자극 같은 건 받지 않았다.
“그런 것치곤 이건 너무 잘해서 문제 같은데 말이지.”
그래서 최충선의 업무는 아이언 포트리스 내부를 돌보는 것에서 전선 도시에 들어오기 위해 억지 부리는 이들이나 몰래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붙잡는 일로 바뀐 것이었다.
물론 벌레들을 다룰 수 있고 변이할 수 있는 드루이드인 그만큼 이 일에 적격인 사람은 없었다.
아무튼 일은 문제가 없었지만, 걱정인 것은 바로 한국 정부의 불만이었다.
“…기업도 못 들어오게 하고, 투기 세력도 못 들어오게 하니까 정부를 압박해서 별소리를 다 하는데 대장님은 무시하고 있으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발도 못 들이게 하니 화가 난 이들은 각종 수단을 동원해서 전선 도시 진출의 제약을 풀어 달라고 난리였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전선 도시. 말 그대로 전선(戰線)을 끼고 있고 성좌 도살왕과 맞서기 위해 만든 곳이기에 대부분의 재량권을 유성원에게 몰아줬던 것이다.
“이러다 뭔가 탈 나는 거 아닌가? 흐음~ 아직은 문제없지만…….”
이제 남은 수단은 전선 도시에 각종 물품, 원료, 재료 판매 금지 및 금융 쪽으로 압박하는 방법뿐이었지만, 그것을 꺼내 든다는 것은 끝을 보자는 의미였기에 유성원이 스캐빈저화될까 봐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으으음, 아무튼 이런 건 이미 삼장군님들도 아시니까 알아서 하겠지.”
진석, 유청, 중한. 삼장군으로 불리는 세 사람도 전선 도시에 대한 외부의 생각을 알기에 대책을 세울 거라고 생각하며 최충선은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그런데 그때, 휴대폰으로 연락이 들어왔다.
“음? 광주 쪽… 인가? 에휴~ 또 돌아와 달라느니 뭐니 하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겠지. 네~ 최충선입니다?”
(최충선 헌터님! 큰일 났습니다. 전남 아래 ‘네오 신안 언더시티’가 있는 곳에 갑자기…….)
“무슨 일이죠? 좀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한데, 예상과 달리 다급한 어조가 들려오자 최충선은 집중해서 그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통화의 주요 내용은 범죄 도시화 되어 있는 네오 신안 언더시티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 확인하기 위해 드론과 길드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저 일상적인 세력 다툼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무언가’와 대규모로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좀 더 확인해 본 결과 놈들은… 일본에서 주로 나오던 ‘사령’ 몬스터와 격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사령? 그게 왜 한국에?”
최충선도 엄연히 S급 헌터. 주변국에 분포한 성좌와 몬스터에 대한 정보는 빠삭했다.
성좌가 개입하지 않은 야생 던전의 몬스터 중에서 언데드 타입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것들이 생성되려면 환경의 영향이 있어야 했는데 한국에서 그런 유령, 언데드 타입이 메인 몬스터로 나타나는 곳은 학교, 군부대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대규모로 나타났고, 또 목포 부근에는 기묘한 일본식 성(城)이 나타났다고…….)
“일본식 서, 성? 그렇다면 성좌 66천마의 군대가? 아, 알겠습니다. 곧바로 자료를 보내 주십시오.”
(예! 물론입니다.)
난데없이 나타난 일본식 성과 사령 이야기에서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 성좌 66천마의 부하들이 한국에 상륙한 것이다. 이건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였다.
대한민국에 큰 위기가 되는 사항이었기에 최충선은 곧바로 유성원에게 알리고자 했다.
“이거 한국 정부엔 알렸습니까?”
(물론이죠. 저희가 정부 채널인데… 이미 비상 회의에 들어갔습니다. 다만 유성원 헌터님이 워낙 대답을 안 하셔서…….)
“알겠습니다. 제가 바로 전하겠습니다.”
(꼭 부탁합니다.)
심각한 사태인 만큼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최충선은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그대로 창문을 열어서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유성원이 업무를 보는 서양식 성으로 향했는데, 그곳엔 이미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유청, 진석, 중한의 모습이 보였다.
“아! 삼장군님들! 뭐 하고 계십니까? 지금 대장님에게 중요한 용건이…….”
“쉬잇~ 폐하께서는 현재 중요한 시간을 보내시는 중입니다.”
“예? 무슨?”
셋의 제지에 일단 진정한 최충선은 조심스럽게 유성원의 방 안을 살펴보았다. 안에는 신소미와 함께 나란히 앉은 유성원이 아주 고요하게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헤드셋을 쓴 상태로 늘 보던 예능을 보고 있었으며, 신소미 또한 조용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어딜 봐도 바쁘기보다는 휴식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었기에 어이가 없어진 최충선이 장군 셋에게 따지고 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안 하는데요?”
“저게 중요한 겁니다. 싸움, 정치, 돈 계산, 운영만큼이나 휴식과 정신적 교감도 중요하죠. 큰 힘을 휘두를 수 있는 분인 만큼 정서적 안정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아, 그렇죠. 그나저나 무슨 절간도 아니고, 뭐 하는 건지……?”
“저런 형태의 교류도 있는 겁니다. 저도 중한과 한때… 컥!”
쓸데없이 입을 놀리려는 유청을 중한이 바로 제지했다.
아무튼 유성원과 신소미는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슬쩍 보기도 하고, 가끔 관심사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분한 교류를 이어 가고 있었다.
“연애라기엔 뭔가 미적지근한 거 아닙니까?”
“서로 싫으면 애초에 같이 있질 않았을 겁니다. 뭐, 두 분 다 30대이니 열정적이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아니, 아무튼 지금 심각한 사태가 있는데 말이죠.”
“그래, 자꾸 시끄럽게 떠드니까 궁금해졌네요. 에휴~ 충선 아재, 들어와서 말해 봐요. 대체 급한 용무가 뭔데 그래요?”
결국 유성원이 먼저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왔고, 곧이어 최충선을 비롯해서 진석, 유청, 중한 모두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성원은 다급한 업무라고 말한 충선에게 제일 먼저 발언권을 주었다.
그러자 충선은 가져온 자료를 보여 주면서 한국에 성좌 66천마의 군대가 상륙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당연하지만 유성원도 그렇고 다들 충격 받은 표정으로 그것을 보았는데, 성좌 66천마의 군대는 바다를 넘어오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야? 걔네가 어떻게 바다를 건너?”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제 한국은 북쪽의 성좌 도살왕에 이어서 성좌 66천마의 군세 사이에 끼게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각 섬을 다리로 이어서 하나로 만든 네오 신안 언더시티는 지금 사령을 이끌고 나타난 대장군과 전투 중입니다.”
“이런 개 같은 일이……. 하아~ 어쩐지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리더라. 일단 갈 채비를 하자. 그… 목포랬나? 성이 나온 곳이? 거기부터 직접 봐야 할 것 같아. 트레일러 준비시켜 줘.”
그렇게 한숨을 푹 쉰 유성원은 곧바로 준비를 명했고, 부하들 모두 이동할 채비를 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