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와, 저게 뭐냐?”
“저, 저게 SS급의 힘?”
거대한 빛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오로지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의 기사 하나가 등을 보인 채 랜스를 들고 고고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한 사람의 인간이지만, 지금 이 전장에선 그가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의 창은 빛을 뿜어내며 아직 기세를 꺾지 않은 사령들을 향해 휘둘러졌다.
“하늘이여! 지고(至高)에… 이른 나의 검을 확인하도록 해라. 이 일격은 내가 이 대지에 선 별이라는 것을 증명할지니……! 패황천검류(覇皇天劍流) 제1장–지성섬(地星閃)!”
빛의 파도가 다시 한 번 몰아쳤다.
구원의 빛 속에 안도하며 남은 사령병들을 처리하던 일본의 헌터들과 방위성 군인들은 자신들을 구한 그 막강한 위력의 스킬이 한 번 더 펼쳐지는 것에 다시금 경악했다.
SS급 헌터의 존재는 흔하지는 않았지만 세계 단위로 따져 봤을 때 몇 군데 더 존재하기에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보는 것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와, 진짜 말이 안 나오네. 그 많던 사령들이 싹 쓸려 나갔어.”
“괜히 S급들을 성장시키려는 게 아니구나…….”
“…그렇게 돈을 많이 받는 이유가 있었네.”
“아무튼 살았다. 하아아~ 근데… 저거 한국인이었지? 그러면 나중에 한국이랑 적대하게 되면 저거랑 싸워야 하는 건가?”
강한 아군의 등장에 안도하긴 했지만, 그가 한국인이라는 점은 또 다른 불안과 공포를 뇌리에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바로 옆 나라, 거기다 역사적인 감정도 좋지 않은 만큼 잠재적인 적이 될 수 있기에 일본 헌터들과 방위군은 떨면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라? 갑자기 멈췄네?”
그리고 한바탕 큰 스킬을 쓴 덕에 마력을 소모한 유성원은 적들이 다시 다가오길 기다렸지만, 사령병들을 제외하고는 사령무사와 사령승병 같은 병종들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도 수만 단위는 넘게 남은 사령병들이었는데, 이대로 시간을 끄는 것도 나쁘지 않았기에 그대로 기다리는 유성원이었다.
[과연 대단하군. 우리 명군(明軍)은 특히나 신성한 힘에 강한 내성을 지닌 군단인데… 그것을 뚫고 소멸시킬 정도의 힘을 가졌을 줄이야.]
그때, 감탄하는 듯한 어조와 함께 수많은 사령병들 사이에서 거대한 언데드 군마를 탄 무사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암군대장군과 유사한 모습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새하얀 빛을 머금고 있었고, 등에 멘 깃발엔 대놓고 명군(明軍)이라고 새겨져 있어서 그가 명군대장군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다 이 무기 덕분이지.”
[…프르제발스키의 랜스군. 놈을 쓰러뜨린 인간이라는 건가?]
“알아?”
[우리는 바다를 못 건너지만 놈들이 이곳에 온 적이 있다. 아마 서로 지향하는 바가 비슷한 만큼 알아보기 위해서였겠지.]
성좌 도살왕은 끝없이 인육(人肉)을 먹기 위해 인간들과 싸워야 했고, 성좌 66천마는 모든 생명과 끝없이 전쟁을 해서 이 행성을 제패하는 게 목표였다.
그런 만큼 어느 선만 합의가 되면 서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성좌 세력끼리의 연합이 그리 쉬웠다면 인류는 진즉에 멸망했으리라.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밀어서 협상은 결렬되었지만, 아무튼… 그래서, 그 말 대가리 놈은 죽은 건가?]
“아니, 나한테 패하고 코어 던전으로 도망갔어. 그래서 한판 붙으려고 온 건가? 명군대장군?”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서로의 지역 간의 거리가 너무 멀었고, 명군대장군도 딱히 무기를 뽑지는 않은 채 그저 언데드 말 위에서 팔짱을 낀 채로 유성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는 명백하게 싸울 의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아니, 우린 ‘전쟁’을 하는 자들이다. 전쟁에서 가치 있는 것은 오직 승리뿐. 패배할 싸움을 일부러 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얼른 돌아갈 것이지, 여기서 뭐 하는 건데?”
[그야 너를 붙잡아 둬야 하니까 있는 거지. 내가 돌아가면 다른 전선에 가지 않겠는가? 그러니 여기서 서로 대치만 하는 거지.]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하는 명군대장군을 보며 유성원은 이건 또 여타의 적과는 다른 성가신 타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상대한 몬스터들은 대부분 그냥 무식하게 싸우거나 싸우다가 질 것 같으면 물러났는데, 이러는 놈은 또 처음이었다.
“…그럼 우리가 너희를 치려고 하면?”
[그러면 열심히 도망칠 뿐이다. 쫓아오겠는가? 나는 여기서 코어 던전까지 도망칠 자신은 충분히 있다.]
“우와, 교활해.”
[칭찬으로 듣겠다. 우리의 성좌님은 ‘전쟁’의 승리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우린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지혜를 짜내지. 암군대장군 그놈은 숙적과 싸우게 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지만, 이게 우리의 본래 싸움법이다.]
“…뭐, 상관없어. 나도 방법이 있으니까. 가울프, 섬멸, 크록베인, 여기는 나랑 아칼론이 지킬 테니 너희는 나고야 기지 쪽 수비를 지원해 줘라. 그리고 아칼론은 주변에서 수작 부리는 거 없는지 상공에서 감시해.”
유성원은 곧바로 기사단의 성소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을 호출해서 각각의 지역으로 보냈다.
또 그냥 단순히 보내는 것만 아니라 아칼론을 상공에 배치하여 감시를 맡김으로써 혹시나 일어날 경우의 수를 방지했다.
“이러면 이제 저쪽… 그러니까 토군(土軍)이 있는 곳을 딱 막겠지.”
[…저 기사들, 우리와 같은 사도급인가? 그렇지만 너에게서는 딱히 성좌님의 존재감이 느껴지진 않는군.]
“뭐, 그런 각성자도 있는 법이지.”
유성원은 어깨를 으쓱했지만, 사실 자신이 이상한 존재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일부러 자각을 안 할 뿐이었는데, 무언가 특별한 존재라면 반드시 특별한 임무 같은 게 있을 것이며, 그것은 분명 보통 인간이 하기 힘들고 귀찮은 일일 것임에 분명했기 때문이다.
[???]
[1/???]
‘…….’
그렇게 또 눈앞에 뜬 알 수 없는 상태창을 무시한 채 유성원은 명군대장군과의 기묘한 대치를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어차피 이번 싸움의 승패는 결국 구출대가 토벌을 나간 S급 헌터를 얼마나 구해 내느냐였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수풀이 우거진 산과 숲을 열심히 누비며 도망치는 후지와라는 현재 미칠 지경이었다.
같이 움직이던 놈들은 이미 사령병들의 미끼로 던져 준 지 오래라서 이제는 혼자만 남은 상황. 그럼에도 사태는 하나도 나아진 게 없었다.
“헉… 헉…….”
도망치기 위해 열심히 달리곤 있었지만 너무나 힘이 들었다.
애초에 그는 부적과 술법을 다루는 후방직이기도 했고, 귀중한 S급 헌터인 만큼 늘 탄탄한 진형 안에서 보호받거나 상황이 좋지 않으면 가장 먼저 후퇴했기에 직접 도주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만큼 홀로 숲을 누비면서 도망 다니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여, 여기가 어디인 거야? 어디로 가야 바다가… 나고야가 나오는 거지?”
살기 위해서는 바다나 나고야로 가야 하는 상황. 일단 별자리를 보고 북쪽을 알아내서 방향을 잡고 달려가고는 있었지만, 역시 인간의 속도로는 험한 숲을 돌파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젠장! 같은 길드 놈들도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을 가는 바람에……! 사라져라, 악령아! 멸혼부!”
끼에에에에에!
“헉… 헉… 젠장! 이놈의 숲은 왜 이렇게 지나가기 힘든 거야!”
따라오는 사령병을 주술로 처리한 후지와라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험난한 숲길에 대해 한탄했다.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전이술로 어떻게든 빨리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사령병들이 떼거리로 몰려와서 놈들을 태우면서 달려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S급이라 일반인보다는 월등히 빨랐지만 적이 너무나 많은 게 문제였다.
“젠장! 젠장! 젠장! 하아… 하아… 꿀꺽꿀꺽… 하아아! 젠장!”
지금까지 온 거리를 만약 직선으로 달렸다면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나 문제는 좋은 길에는 꼭 사령무사, 사령장군 같은 혼자서 잡으려면 시간이 걸리는 몬스터들이 존재한다는 거였다.
놈들을 피해서 다른 길로 계속 돌아가다 보니 시간만 무한히 소비되고 있었다.
“하다못해 같이 온 놈들이라도 있었으면… 제기랄! 아니, 수송기에서 한 놈이 희생했었다면! 젠장!”
쨍그랑!
마시던 포션 병을 집어 던진 후지와라 길드장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계속해서 움직여야 살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엄연히 S급 헌터인 자신을 이대로 죽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기에 희망을 갖고 도주와 전투를 계속하는 그였다.
“허억… 허억! 오오……!”
드디어 희망의 빛이 찾아온 것인가?
저 멀리 하늘 위에 익숙한 비행체가 슥 하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일본 정부에서 사용하는 수송기였다.
그래! 역시 S급 헌터를 버리는 국가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후지와라는 곧장 부적을 뽑아서 위쪽에 신호를 쏘아 올렸다.
“제발! 제발! 봐라! 이 멍청한 자식들아!”
피유웅! 펑!
불꽃놀이처럼 화려한 불꽃이 하늘 위에서 터졌다. 웬만한 마력 탐지 및 수색 중인 상황이라면 안 보일 리가 없는 장면이었다.
하나 그것이 무색하게 수송기는 그 신호를 무시한 채 날아갔다.
후지와라는 혹시 자신을 못 봤나 싶어 한 번 더 신호를 날려 보았다. 그래도 수송기는 아무 반응 없이 그대로 떠나갈 뿐이었다.
“뭐야? 뭐냐고! 뭐냐고! 나 여기 있다고! 나 후지와라가! 여기에 있다고! 이 망할 놈들아아아아아아! 가지 마! 가지 마아아아아아!”
털썩…….
마침내 수송기는 아예 모습을 감춰 버렸다.
분명 자신의 신호를 보았을 텐데, 그것도 두 번이나 쏘아 올렸는데 무시한 것을 보면 고의로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수송기 안에선 몇몇 인원들이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정말 이대로 가도 괜찮을까요? 신호를 두 번이나 봤는데…….”
“저 자식 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알아? 특무부대원들을 무슨 도구 취급하는 놈을……. 저놈이 살아서 돌아가 봐야 그 애들이랑 부대원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 한 푼 없을 건데! 기껏해야 유감이라고 말하고 말겠지.”
“하, 하지만 그래도 S급…….”
“S급도 S급다워야지. 저 쓰레기 같은 놈은 안 돼. 무명(無名) 씨나 다른 온건한 사람이면 모를까. 가와사키 길드의 그놈들이나 야스다 길드의 놈들이나 아주 그냥……! 우리가 전선에서 피똥 싸는데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이야. 무시하고 가. 그리고 너희 다 저 신호, 못 본 거다?”
“예, 물론입니다. 다른 쪽이나 살펴보죠.”
그렇게 특무부대 헌터들은 후지와라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지운 채 다른 곳에 있는 S급 헌터를 구출하기 위해 움직였다.
일본 정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길드와 특무부대 간의 감정의 골은 깊었는데, 그것이 마침내 이런 상황에서 터진 것이었다.
결국 특무부대 헌터들은 그나마 온건한 축에 속하는 길드 관련 헌터 5명과 다른 헌터와 특무부대원들을 구출한 뒤, 나머지 S급 헌터 4명은 그대로 버려둔 채 기지로 귀환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요? 혹시라도 그들이 살아 돌아오면 어쩌죠?”
“그럼 까짓것 내가 책임지고 감방 가지, 뭐. 나도 S급인데… 훗,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숫자 늘린다고 애새끼들까지 헌터로 써먹는 나라인데 말이야. 그냥 내가 조직적인 이유로 너희를 협박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특무부대 수색대를 맡은 대장은 그렇게 말하며 부하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수색 작전은 종료되었고, 숲에 남은 4명의 S급 헌터들은 결국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고 그 소식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