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시간이 급하다면 가는 중에도 계속 브리핑해 주쇼. 위치는 어디로 가면 됩니까? 도쿄 기지?”
(아뇨. 곧장 나고야 기지로 향해 주십시오.)
“나고야인가? 그러면 제가 방어 작전을 맡는 겁니까? 기동성 생각하면 구출하는 게 맞잖아요.”
(물론 그게 더 합리적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안 그래도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시는 길드 소속 헌터들이 한국인에게 구출받는 것을 거절할 가능성도 있을뿐더러 자칫하면 역으로 충돌이 일어날 수 있어서…….)
“아, 대충 알 것 같아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인데도 그놈의 명예니 자존심이니 하는 문제로 뻗대는 인간들을 수도 없이 본지라 유성원은 곧바로 납득했다.
자신이 가서 구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지만, 역시 한국인이라는 것이 문제. 길드 헌터들도 헌터들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일본 정부의 체면이었다.
그래서 결국 비효율적이지만 유성원을 나고야 방어 전선으로 투입시키고, 특무부대 헌터들로 구출대를 구성해서 수송기를 타고 날아가서 구하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었다.
‘나야 편한 일 하는 게 나으니까 상관없지.’
유성원으로서도 귀찮게 날아다니면서 생존자를 찾는 것보다는 방어 전선에 가서 적을 격퇴하는 것이 더 쉬운 만큼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튼 연락을 마친 뒤 계속해서 엘드라엔을 탄 채로 날아가는데, 또다시 연락이 들어왔다.
“뭐야? 또 무슨 일입니까?”
(예? 저기… 전 대한민국 국정원 소속입니다만, 혹시 다른 유사 부서와 연락하셨습니까?)
“아, 그냥 여기저기 연락 온 곳이 많아서요. 그래서, 거기는 무슨 용건입니까?”
(아, 다름이 아니라 지금 일본 쪽으로 날아가시는 것 같던데… 정보를 보아하니 일본 S급 헌터들이 토벌에 실패한 걸 수습하러 가시는 것 같더군요.)
“뭐, 대충 맞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일본으로 날아가는 속도를 좀 늦춰 주셨으면 합니다.)
유성원은 국정원 직원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그가 구원을 늦게 가면 갈수록 일본의 S급 헌터들이 죽을 확률이 높고, 그렇게 해서 숫자가 줄어들면 한국에 이득이 되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라도 늦게 가 달라는 이야기였다.
일본 정부 사람들이 들었으면 기겁할 이야기였지만, 유성원도 만만치 않은 인간이었다.
“으음~ 시간당 얼마 줄 건데요? 일본 애들이 보수가 세서 그런데, 웬만큼 챙겨 주셔야 이게 거래가 될 것 같거든요.”
(아니, 거기서까지 비용을 요구하는 건…….)
“어차피 전 애국심으로 일하는 게 아니라서요. 또 돈 많이 꼬박꼬박 잘 주는 물주한테 밉보이고 싶지도 않고 말이죠. 그러니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액수를 주시면 고려해 볼게요.”
(아니, 매년 엄청난 금액을 받으시고 내년에도 수조 원을 받으실 건데, 이 정도 서비스도 못해 줍니까?)
“서로 합의하에 거래한 건데요? 새로 거래하시려면 새로 계약서를 써야죠. 아무튼 또 헛소리하면 지금 이거 녹음했으니까 일본 정부에 전해 줄 건데… 어쩔까요?”
(…으윽, 알겠습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결국 국가적인 이득 한번 보려다가 핀잔만 잔뜩 듣고 마는 한국 정부였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현재 한국 내 S급 헌터의 숫자는 기존 유성원 세력을 제외하면 10명에서 5명으로 급격히 줄어든 터라, 아직 16명으로 유지되고 있는 일본과의 차이를 어떻게든 좁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번 찔러 본 거겠지만, 이놈이나 저놈이나 정말 미친 소리만 해 대는구만. 으음~ 아마 내가 날고 있는 걸 감지하고 있겠지. 엘드라엔… 속도 올려 줘. 엿 같은 제안엔 엿으로 돌려줘야 하는 법이지.”
펄럭!
유성원의 말에 엘드라엔은 강하게 날갯짓을 하며 그대로 속도를 올렸다.
아마 위성이든 드론이든 레이더든,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한국 정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속도를 늦추지 않는 것도 모자라서 가속하는 걸 알게 된 그들의 표정이 보고 싶어지는 유성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국방부 및 협회에서는 날아가는 속도가 2배로 오른 레이더상의 유성원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중이었다.
“…내가 그러니까 그냥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 새끼, 사이코라니까. 우리가 싫어할 짓을 알면 더 할 새끼라고…….”
“나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기어이 저쪽이 하자고 해서…….”
“에휴~ 제발 학습이라는 걸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우리 아군이 아니에요. 국적만 한국일 뿐 자기 이익을 챙기는 용병 같은 입장입니다. 저 전선 도시랍시고 자기 아성을 쌓는 것만 봐도… 하아아~”
아주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는 머리 아픈 존재이긴 허나 이젠 없으면 대한민국 안보에 큰 위기가 생기기 때문에 허용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유성원이라는 존재였다.
아무튼 일본의 S급 헌터들을 줄이는 일은 이제 물 건너갔다는 것을 안 그들은 다시 각자 하던 일로 돌아갔다.
***
1시간 뒤, 나고야 전선 기지.
“도! 착!”
쿠우우웅!
약 1시간 만에 나고야 전선 기지에 도착한 유성원은 엘드라엔을 소환 해제시키고 땅에 내려섰다.
나고야 기지 측 일본 사람들은 다들 놀란 모습이었다.
2~3시간 정도 걸릴 거라고 예상해서 아직 제대로 준비하지도 않았는데, 유성원이 생각보다 빨리 온 것이다.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일찍 온 유성원을 보며 난감해하는데, 아마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던 것이리라.
‘나도 일본어 못하는데. 괜히 빨리 왔나?’
“아! 유성원 헌터님, 이렇게 빨리 와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다급해 보여서 빨리 왔어.”
“예. 아무튼 따라와 주십시오. 곧바로 상황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다행히 잠시 기다리자 연락을 받은 일본 측에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보내 줬고, 유성원을 안내해서 브리핑 룸으로 향했다.
브리핑 룸 화면에는 나고야 전선의 지도와 함께 두 방향에서 몰려오는 적들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명군(明軍)과 토군(土軍)이라 적힌 글자로 보아서 대략 어떤 놈들이 오는지 확인이 가능했다.
‘으음… 두 놈인가?’
“유성원 헌터님 오셨습니다. 아, 자리는 저쪽 맨 앞에 앉으시면 됩니다.”
“あれが噂の(저게 소문의)…….”
“へ… 本物の金(헤… 진짜 금이네)?”
“…….”
맨 앞으로 가자, 같은 군복과 전투복 차림으로 통일된 사람들과는 어딘가 다른 남녀 셋이 보였다.
군복이나 전투복보다는 교복이 어울릴 것 같은 10대 소년, 소녀들과 시선을 마주한 유성원은 백가연 같은 사람 하나 없는 일본에 대해 나름 충격을 받았다.
한국도 여차할 땐 학생들을 동원하지만, 그래도 최후의 최후까지는 가능한 한 아카데미아에서 떠나지 않게 하거나 동원을 해도 비전투 및 보조 업무를 위주로 짜는데 말이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얘네가 그… 특무부대 S급인가? 자리로 보나 기색으로 보나 그런 것 같아서 말이지.”
“예, 맞습니다. 구출대로 참여한 인원 빼고 셋으로…….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도 지구 반대편이든 어디에서든 일어나던 일이다.
그렇게 말하며 태연히 자리에 앉는데… 계속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시선이었지만 무슨 동물도 아니고, 목에 매어 놓은 기묘한 기계식 목걸이가 더 신경이 쓰이는 유성원이었다.
아무튼 유성원의 등장으로 잠시 중지되었던 작전 회의는 이내 재개되었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현재 나고야 전선 서북쪽으로 명군대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오고 있으며 지금 이쪽으론 토군대장군이 사령 군대를 이끌고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디가 더 빡세?”
“예? 빠쿠세?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국어를 알긴 하지만 역시 진짜 한국인은 아니어서인지 ‘빡세다.’라는 속어를 모르는 특무부대원은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어 왔다.
그에 아차 싶었던 유성원은 바로 정정해 주었다.
“어디가 더 힘드냐고. 내가 그거 맡을게. 아, 물론 잔존 사령병들 처리할 병력은 남겨 놔야겠지만…….”
“그, 그러면 명군대장군 쪽을 부탁드립니다. 그렇지만 작전 정도는…….”
“나랑 우리 애들이 싸우는 거 부스러기 새는 거나 치워. 적도 어차피 정공인데… 우리도 특기가 정공법이야. 이미 전투 시작했을지도 모르니 바로 간다. 거기 사람들에게 알려 놔.”
그렇게 말하곤 유성원은 바로 일어서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특무부대원들은 황당해하면서도 이미 암군대장군을 때려잡고 시코쿠를 정벌한 유성원의 무용을 알기에 그러려니 하면서 다들 다시 회의에 돌입했다.
곧바로 브리핑 룸을 나온 유성원은 서북쪽 전선으로 향하려는데,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하여간 이놈의 세상은 뭐 하나 멀쩡한 구석이 없냐? 그 S급 애들… 딱 봐도 제대로 된 대우 못 받겠지?”
‘…….’
‘…….’
‘…….’
맨 앞자리에 앉은 채로 썩은 동태 같은 눈을 하고 있던 아이들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래서 그 불편한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전을 대충 짜 버리고 나온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분명 특무부대에서 S급 헌터랍시고 애들을 강제로 입대시키고는 제대로 된 대가도 주지 않고 부려 먹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 상황이었다.
만약 자유롭게 두는 거였다면 애초에 그런 이상한 기계 목걸이 같은 것을 똑같이 채워 둘 리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 그렇지. 어디든 그렇지.”
그러나 S급 헌터가 가지는 가치를 생각하면 저렇게 통제하면 별다른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부려 먹을 수 있고,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건 자명했다.
또한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나고야 전선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자위할 수도 있었다. 저기가 뚫리면 일본 전역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필요한 희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것보다 더한 곳도 수도 없이 많지만, 역시 남 일 같지가 않네.”
하지만 지금은 뭔가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선 급한 불부터 끄는 게 먼저였기에 유성원은 곧바로 프르제발스키의 랜스를 꺼내 들고 지상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령병들과 사령무사, 사령승병들이 파도를 이루며 장벽으로 끝없이 몰려가는 상황.
북서부 기지는 마정석 탄환과 각종 화기, 각성자들과 헌터들의 분투로 열심히 막아 내고 있었지만 위태위태해 보였다.
“으아아아아악!”
“지원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위생병! 위생벼엉! 나 좀 살려 줘어!”
“휴우~ 벌써 난장판이네. 하지만 이렇게 예쁘게 뭉쳐 있으면 ‘그거’ 하기 딱 좋지. 엘드라엔, 들어가서 쉬어도 돼.”
[알았다.]
“인류를 위협하는 사악한 영혼들이여! 하늘을 보라! 생명을 구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내가 지금! 이곳에 왔노라!”
쿠우우웅!
전장을 한번 슥 훑어보며 선전포고를 마친 유성원은 성기사 프르제발스키의 랜스를 들고 그간 제대로 사용할 기회가 없던 비기를 사용할 준비를 시작했다.
패황천검류. 천검군의 지배자인 패황의 스킬.
광역 섬멸에 특화된 스킬이긴 했지만 피아를 구분하지 않기에 조심해야 했고, 일기토에 쓰기엔 준비라든가 틈이 커서 사용이 불가능했다.
“하늘이여! 지고(至高)에… 이른 나의 검을 확인하도록 해라. 이 일격은 내가 이 대지에 선 별이라는 것을 증명할지니!”
[패황천검류(覇皇天劍流) 제1장-지성섬(地星閃)!]
창으로 쓰는 검술이라니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스킬’이라는 개념은 결국 상황만 충족되면 나가는 그런 것이었다.
성기사 프르제발스키의 랜스에 깃든 성스러운 힘이 합쳐져 순백의 빛이 별처럼 빛나며 사령병과 사령무사가 있는 진형을 파도처럼 가르며 퍼져 나갔다.
마치 태양이 어둠을 비추는 것처럼 단 한 번에 수만 단위의 사령병과 무사들이 찬란한 빛과 함께 모조리 갈려 나가자, 그들을 지휘하는 명군대장군은 물론 장벽에서 치열한 분전을 벌이던 일본 방위대와 특무헌터부대들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