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일주일 뒤, 전선 도시.
이곳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 일본 정부에 좀 더 늦게 간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일본 정부는 오히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격하게 반응하며 최대한 준비한 뒤 오라는 말을 전해 왔다.
그에 유성원은 계속해서 쌓인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역시 아예 언어가 다른 국가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으니 충돌이 일어날 건 예상했지만… 이건 확실히 심각하네요.”
“일단 거주지 분리를 하고 있지만, 역시 일본인들이라 그런지 안 좋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 셈이지. 그나마 자네가 소환한 ‘성’이 있어서 좀 낫지만 말이야. 그 스킬 참 좋더군. 강 같은 걸 끼지도 않았는데 식수도 나오고 화장실도 있네.”
“뭐, 좋은 게 좋은 거죠. 하아~ 근데 문제가 많이 심각하네요.”
“자네가 막 데려왔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
자업자득. 현 상황에는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렸다.
사람을 막 데려왔는데 이제 그 뒤처리를 하려니 일이 산처럼 쌓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먹고 자고 하는 기본적인 일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그들을 ‘전선 도시’의 사람 아니면 하나의 조직으로 융화시켜야 했는데, 그건 국가도 힘든 일이었다.
“특히나 문제는… 쥐뿔도 없는 인간들 주제에 서로 위아래를 정하려고 한다는 거죠. 기사들에게 교육받은 애들은 그런 거 전혀 없는데, 어르신이 고용한 인간들과 불러온 놈들이…….”
“나도 잘 아네. 그래서 처벌을 강력히 하고 있지. 자네 손에 걸리면 죽을 테니까.”
“일본 양반들 거주 지역에서도 그 낌새가 있더군요. 서로 다른 그룹에 있던 양반들이라 그런지 텃세를 부린다든가, 기를 쓰고 우위를 잡으려고 하는 일 같은 거요. 그래서 그냥 싹 다 거주지 섞어 버리고, 각성자는 아이언 포트리스로 보내고 분쟁을 일으키거나 한국어를 안 익히려는 놈은 저 위에 성좌 도살왕 세력에게 던져 줘 버린다고 했죠.”
“식인귀로 유명한 도살왕이니 그만큼 효과적인 위협도 없겠지. 허허.”
위험을 감수하기 위해 만든 전선 도시의 위치가 다시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진짜로 이상향을 만들 게 아니라, 밖에서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도시를 만들 거라서 유성원은 잔혹한 수단도 가릴 이유가 없었다.
사과 상자에서 썩은 것을 골라내서 버리듯 그냥 없애 버리면 그만이다.
“그나저나 자네, 한국 정부에서 그… 청문회를 열 테니 참여해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 텐가?”
“안 가요.”
“그렇게 전하겠네. 아무튼 일은 힘들지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서 안심이네.”
“다행이네요. 효과도 나는 것 같고…….”
전선 도시와 아이언 포트리스를 성장시키는 데 따른 업무량은 매우 많고 힘들었지만, 그 성과는 착실히 쌓여 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황야엔 유성원이 소환한 성을 제외하고도 어느새 수많은 주택과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유성원이 데려온 사람들도 많았지만 외부에서 온 인원들로 인해 북적이면서 삶의 터전이 된 것이었다.
“일단 사람들에게 식량과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야 해서 외부 업체의 사람들을 오게 한 게 컸지. 이거 보게나.”
<제목:전선 도시에서 일하는 편붕이다.
백수 생활이 너무 길어서, 돈 없어서 전선 도시에 생기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한다고 해서 지원했다. 식인귀 도살왕 세력권에 있는 곳이라서 무섭긴 한데, 합격되니 쌉이득이었다. 유성원 헌터가 돈이 지X같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아직 출퇴근할 철도 노선 없다고 안전 가옥에서 머물라더라. 근데 무슨 가옥이 호텔급임.>
“아, 저도 이거 봤어요. 의도한 거지만요.”
<게다가 전선 도시인 탓에 스캐빈저 위험도가 높아서 그런지 치안도 엄청 좋아서 저 청백 갑옷 입은 병사들이 계속 돌아다니는데, 미친 짓 하는 놈 아무도 없음. 아! 딱 한 번 일본 놈 하나가 깽판을 부리는데 가차 없이 때려잡아 버리더라.>
이어서 스크린샷이 한 장 올라와 있었는데, 천검군 정예 병사들이 범죄자를 가차 없이 제압하는 장면이었다.
당연하지만 일단 군사 거점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만큼 치안에 대해 엄격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서울이었으면 ‘아이고, 외국인님, 제발 잡혀 주세요. 엉엉.’ 하면서 경찰들이 상소 올렸을 텐데……. 그리고 가장 중요한 봉급 말인데, 이거저거 수당이 엄청 붙더니 웬만한 대기업 정사원보다 더 받음. 물론 아르바이트라서 오래 못하고, 여기 다 건설되면 그 프리미엄들은 떨어지겠지만 아무튼 개꿀임. 일자리들도 좋아 보여서 나 그냥 여기서 살까 생각 중임.>
-개부럽네. 아! 나도 전선 도시 갈걸!
-시발, 그럼 위치만 X지. 생각보다 안 위험하다는 거잖아? 개꿀이네?
-아! 시X, 우리 점장이 갈래? 했던 거 위험하다고 안 갔는데… 갈걸!
비단 이 글 하나만 영향력이 있는 게 아니었다.
각종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외부 프렌차이즈 회사들도 들어와 있었고, 거기서 일하는 이들에게 위험수당이라며 엄청난 액수를 지원해 놓고 실제로는 굳건한 치안을 과시하니 메리트가 엄청나게 불어난 것이었다.
<진심 유성원 헌터 이 새끼, 진짜 도시 사업에 돈을 얼마나 퍼붓는 건지 장난 아니더라. 근데 웃긴 건 뭔지 앎? 이렇게 뿌려도 이번에 일본에서 5,400억 엔 벌어 와서 재정에 아무 문제 없음.>
<너네 지금 여기서 ‘헌터 전용 병원’ 새로 새우는 거 봤냐? 이제 전선 도시 돼서 헌터들 몰려오면 희생이 많아지는데, 엄청 싸게 치료하려고 힐러랑 의료진 모집하는 데 보수가 장난이 아님. 빨리 ㄲㄲㄱ.>
<근데 여기 모집 조건이 너무 이상함. 기업도 그렇고… 조건이 엄청 빡빡해. 요즘 세상에 스캐빈저랑 인연 없는 기업이 어디 있음? 게다가 사회 공헌자 우대 조건은 또 뭐야?>
‘뭐긴… 기존 적폐 기업들 엿 먹이려고 넣은 조건이지.’
꼭 이런 부동산적 가치가 급상승하는 지역엔 아주 자연스럽게 외부에서 큰손들이 냄새를 맡고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걸 잘 알고 있는 유성원이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반군사 거점 도시라는 것을 이유로 스캐빈저와 알게 모르게 어울리던 신강남의 부호들이 손쓰는 걸 방지하고, 또 거의 독립적인 법안 협상으로 수작을 부리려는 인간들을 가차 없이 처분해서 원천 봉쇄한 것이다.
“사회 공헌자 우대가 아주 제대로 된 한 수였네요.”
“…그걸 실현하려고 내가 얼마나 골머리를 싸맸는지 아나?”
“어차피 안 되면 일본이나 아니면 성좌 용봉왕이랑 거래를 트면 그만인데…….”
사회 공헌자 우대 조항.
언뜻 보면 사회에 공헌한 사람들부터 고용하겠다는 의미 같지만, 이것의 진정한 의미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직장 및 신변을 걸고 부정부패를 신고했던 자들을 우대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 조항의 효과는 엄청났는데, 전선 도시의 각종 업무의 감독 자리에 그들을 배치해 두자 알아서 신강남의 큰손들이 찝쩍대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 것이었다.
“그거 때문에 정부에서 얼마나 난리였는지 아나? 물론 기업들의 사주를 받고 한 항의이지만…….”
말 그대로 돈이 폭포처럼 쏟아질 땅에 못 들어가게 된 대기업들의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각성자 사회 이전에도 구린 부분이 수없이 쌓여 있었는데, 지금은 스캐빈저라는 치트키 덕분에 온갖 부정적인 수단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거기에 사법부까지 장악했고, 길드와 손을 잡고 그들을 조련해서 막대한 이득을 취하던 기업들의 행태가 유성원에 의해 제지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기사도 핑계를 대 줬잖아요. 그리고 먹혔고 말이죠.”
이에 대해 유성원은 늘 자신을 괴롭히던 ‘기사도의 길’식 연설을 변명으로 삼았다.
‘오직 명예가 전부, 기사도가 전부요. 끝없는 정의를 향한 열망과 지킬 가치가 있는 숭고한 정신이 먼저입니다. 그 외의 것은 차후 생각할 일!’
일반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만, 성좌라는 신적 존재가 실재하는 지금은 그런 핑계도 먹힐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외국의 경우 성좌가 밤엔 일하지 말라고 했다면서 야간 업무를 거부하는 길드도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잘 흘러가고 있어요. 사람들도 계속 몰려오고 있구요.”
“살기 좋은 곳엔 누구나 오고 싶어 하기 마련이지. 길드의 혼란은 드디어 끝났지만, 그 여파로 인해 너무 많은 국민들이 상처 입었네. 건물도 부서지고 삶의 터전이 파괴된 곳이 한둘이 아니야. 아마 그래서 정부에선 더더욱 자네에게 기대고 싶은 걸 테고…….”
“돈과 힘 다 가지고 있기도 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건 쉽지만 올라가는 건 몇 배나 어렵거든요.”
이미 잘 만들어진 조각상을 부수는 일은 매우 쉽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망치로 부수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면 되니까.
반면 그 부서진 조각을 모아서 원래대로 복구하는 일은 당연히 어려울 것이다.
일일이 조각을 맞추고 접착제로 붙인다고 해도 부쉈을 때의 수천 배나 되는 집중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가장 좋은 건 싹 다 버리고 아예 새 조각상을 만드는 거지만, 그러면 새로 만드는 사람만 피 터지죠. 아으~ 여기 있는 거 다 처리했으니 저는 산책 좀 하다 올게요. 머리 좀 식혀야겠어요.”
“그러게나.”
그렇게 유성원은 짐을 놔두고 밖으로 나와 기지를 내려갔다.
언제나 바쁜 곳이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면서 일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상황. 전선 도시라기엔 더없이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
[1/???]
‘근데 이건 왜 자꾸 뜨는 거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며 한숨 돌리는데, 눈앞에 또다시 의미 불명의 상태창이 뜨면서 시야를 어지럽혔다.
청룡 길드를 쓰러뜨렸을 때부터 뜨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상태창.
저번에 S급 암군대장군을 잡았을 때도 떴고, 그 이후 심심하면 깜빡깜빡 나오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는 언뜻 짐작이 가지만, 그 길은 가시밭을 넘어 핵지뢰가 묻힌 영역으로 가라고 하는 표시인 만큼 유성원은 그 상태창을 치워 버리고 커피를 마저 마신 다음 산책길에 나섰다.
***
약 반년 뒤, 일본.
시코쿠 특무부대 군사 기지.
일본은 S급 몬스터 처리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지만 그래도 확실한 승리를 원했기에 탈환한 시코쿠에 전선 기지를 세우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나고야 서부를 언제든 타격할 수 있는 포병 진지와 언제 어디서든 출동할 수 있는 해군 기지, 공군 기지, 그리고 각 길드의 임시 훈련소까지 세우며 완벽한 태세를 갖춘 일본은 드디어 S급 몬스터 대장군 시리즈를 토벌하기 위한 출동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제군들, 정말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다. 나는 이번 토벌대 대장을 맡게 된 야스다 길드의 장 후지와라라고 한다. 성좌 66천마의 군세가 우리 일본 땅을 전쟁터로 만든 지 어언 수십 년.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는가! 하나 드디어 일본 본토 탈환이라는 대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뜻으로 하나 된 우리 길드 연합은 이제…….”
“참 좋을 대로 떠드네요. 솔직히 진작 할 수 있었으면서 자기들 이익이랑 정치적 문제 때문에 등한시하다가 한국인한테 진 게 자존심 상해서 들이대는 거면서…….”
“진정하게나. 아무튼 좋은 날 아닌가?”
“아, 모리바야시 대위님!”
“이제야 겨우 우리 땅을 스스로 되찾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렇게 표정 구기면 안 되지. 이 기지를 반년 만에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한지 아나? 어우~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어.”
예전 유성원을 맞이했던 모리바야시 대위는 반년 만에 얼굴이 반쪽이 되었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도 짙었다.
길드의 화합이 언제 끝날지 몰라 다급했던 일본 정부가 특무부대는 물론 모든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이 기지를 빨리 지으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한 3년 정도는 돼야 제대로 된 기지가 나오는데… 외국에서 건설, 장인 계열 성좌의 가호를 받은 장인까지 데려와서 난리였지. 그… 뭐더라? 헤파… 헤파스토이?”
“성좌 헤파이스토스예요, 대위님. 확실히 근 반년간 죽어라 고생했죠. 와,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계속 현장 돌리니까 사람도 막 죽어 나가고, 심지어 원래 전선에서 나왔을 때는 휴양해야 하는 특무부대원들까지 여기 현장에 넣어 버리니. 어우~”
반년 만에 찬란하게 완성된 시코쿠 기지에는 이런 암울한 현실이 숨어 있었다.
그 귀중하게 여기는 특무부대원들도 이런 취급을 당했는데, 일반 인부들에겐 얼마나 더 지옥 같은 상황이었을까?
하루에 과로사로 수십, 수백 명씩 죽어 나갔지만 정부와 길드의 본토 회복 욕심에 매몰되어 조명되지도 않았다.
“대일본 만세에에! 대일본 만세에에! 대일본 만세에에에에에에에!”
짝… 짝… 짝… 짝!
결국 밝은 미래를 여는 출정식인데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이는 오직 총리 및 특무부대와 길드 관련자들뿐. 그저 쉬고 싶을 뿐인 일반 인부와 기업 관련 사람들의 얼굴엔 기쁨이 한 조각도 없었다.
그리고 그 어두운 표정들 사이에서 사냥감을 노리듯 날카롭게 눈을 빛내는 자들도 몇 명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