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3일 뒤, 시코쿠 섬.
“정말 잘못했습니다, 황금 기사님!”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유성원의 제안을 거부했던 15개 그룹에 인도적 차원에서 각종 편의 물품과 의료품, 식량을 보내고 시간이 남는 김에 시설 고장을 해결해 주고 난 뒤, 15개 그룹의 대표 전부가 몰려와서 유성원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음? 아니, 왜 그래? 인도적 지원이 마음에 안 드셨나? 아니면 뭐 다른 문제라도 있으세요? 지원도 저희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드렸는데?”
“너무나 잘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만, 그런데… 가신다는 걸 생각하니 도저히! 도저히 그 이후를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야 그렇지.’
단순히 물자뿐만 아니라 의사인 신소미가 간이 병원까지 열어 그동안 제대로 치료를 못 받았던 사람들까지 치료해 준 것은 물론 부랑자처럼 사느라 수십 년 동안 꿈도 꾸지 못했던 온천욕까지 즐기게 해 줬으니, 그것이 사라진다는 걸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으리라.
“어차피 저희가 가면 본토에서 사람들이 들어올 겁니다. 나고야 서쪽에 있는 전선을 칠 요새라든가 기지를 만들겠죠. 그럼 아마 여기 계셨던 분들도 자연히 본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보, 본토에서 사람이?”
“왜요? 그거 기다리던 거 아니었나요?”
“어째서! 이제 와서!”
“이제 와서가 아니라… 우리가 암군대장군을 치웠으니까 오는 거죠. 우리는 돈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아, 맞다. 그분들이 오면 일자리랑 집 걱정은 안 하셔도 되겠네요.”
유성원의 말엔 전혀 악의가 없었지만, 15개 그룹 사람들은 안색이 파래지면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애초에 유성원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은 이제 더 이상 정부든 뭐든 신경 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이 시코쿠에서 조용히 살아가고자 했던 것인데, 정부가 오면 이렇든 저렇든 그것이 깨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어쩌지?”
“이때까지 실컷 우리를 무시해 놓고 다시 들어온다고?”
“오면 부라쿠민 취급하면서 우릴 강제 노역에 동원할 게 뻔해.”
“그게 아니라면 스캐빈저 취급하고 우리 목을 노리겠지. 이제 와서 잘해 줄 이유가 없으니까…….”
사람들의 동요가 점점 커졌다.
자신들을 무시한 본토에 대한 애국심 같은 건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냥 비참한 야생인 생활이라도 좋으니 자기들끼리 자유롭게 살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도 정리된 시코쿠에 다시 일본 정부가 들어서면 사라져 버릴 위기였기에 선택지는 이제 하나뿐이었다.
“제발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유성원 헌터님.”
“시키는 거 다 하겠습니다.”
“저희는 그렇다 쳐도 아이들까지 노예로 만들 순 없습니다.”
“으음… 갑자기 그렇게 말을 바꾸면 우리도 곤란한데 말이죠……. 잠시만 부하들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오죠.”
여기서 바로 승낙하는 것보다 뭔가 심각하게 토의하는 척해서 압박을 줄 생각이었다.
이미 그 사안에 대해서는 사전에 합의되었기에 신소미 모녀가 심각한 분위기 연출을 위해 준비한 대사를 던지기 시작했다.
“아! 짜장면! 짬뽕! 깍두기! 수제비! 삼선짬뽕! 돈까스! 한 타임 쉬고~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깐쇼새우! 간짜장! 짜장볶이!”
“좋다. 잘하고 계십니다.”
“…근데 이러면 진짜 무서워하는 거 맞아요? 한국어 알면 웃을 텐데요?”
“이미 실험해 봤어. 내가 한국말로 투덜대는 거 아무도 못 알아듣던데, 뭘~ 아무튼 계속~ 누님도 고고.”
일본엔 ㄲ,ㅆ,ㅉ 같은 된소리가 없고 또 이 발음은 강한 어조로 말하면 더욱 발음이 세지기에 분위기가 험악하게 보일 만했다.
낯선 언어+센 발음+소녀의 하이 톤이 겹치니 뜻을 모르고 듣기만 하는 시코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여, 역시 반발이 큰가 봐?”
“그야 그렇겠지. 우리 말고도 거의 수천 명을 마법으로 보냈다고 하니까…….”
“마, 마법? 그거 마정석을 엄청 써야 하지 않나?”
“휴우~ 역시나 반발이 너무 심해서 이게 그냥은 안 될 것 같고, 조건이 하나 더 붙어야 한다고 하네요.”
“어떤 조건입니까?”
“그냥 계약 조건이랑 감시 같은 게 좀 더 빡세진다는 거? 이게 먼저 승낙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신뢰를 줬지만 당신들은 이익 계산을 마치고 난 뒤니까 우리도 믿지 못하는 거지. 스캐빈저들도 이익에 따라 배신각을 잘 잡잖아? 싫으면 거절해도 돼.”
속으론 부당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당장 제 코가 석 자인 만큼 이들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어차피 아쉬운 것은 그들이었기에 결국 유성원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승낙의 의미로 계약서도 쓰고, 유성원의 아래에 들어간다는 내용을 확인한 뒤에 버려진 기사단의 성소를 통해 그들도 한국으로 몰래 옮겨 갔다.
“이제 시코쿠에 사람은 한 명도 안 남게 되었군. 흔적은 뭐~ 우리가 치워야겠지. 시간이 있으니 편하군.”
“한국에서 뭐라고 안 하던가요? 어르신이라든가, 유청이라든가.”
“유청 녀석은 힘들든 말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라고 하는 예스맨이고, 어르신은 ‘허허허, 이런 활동이라면 얼마든지 도와주겠네.’ 하면서 눈을 빛내더라고요. 거주지 문제는 제가 가서 성 소환으로 해결해 줬으니 나머지는 그냥 물류만 관리하면 되는 거라서요.”
이제 시코쿠에서의 볼일은 완전히 끝. 남은 4일 동안 야생 몬스터랑 적당히 지내다 나가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원치도 않게 시간을 죽이게 된 유성원은 뉴스로 각종 소식을 찾아보았다.
특히 일본 측 반응을 주시했는데, 혹시나 다른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움? 뭐지?”
『…야스다 길드의 후지와라 길드장은 현재 유성원 헌터의 헌신과 노력을 빛내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에서 축도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가려 하지 않은 험지에 단독으로 가서 지금도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그의 승리도 기원하고, 이번 전쟁을 시작으로…….』
“…뭐 하자는 거야. 축도식이라니, 그것도 야스쿠니에서?”
아직 싸움 중이라는 건 합의된 사실이지만, 대체 왜 갑자기 자신을 위해 ‘야스쿠니 신사’에서 축도식을 가지려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 유성원이었다.
한국인에게 있어 결코 좋은 인연이 있는 장소가 아닌데, 거기서 축도식을 해 준다는 건 오히려 응원이 아니라 등 뒤에다 빅똥을 던지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간책인가? 그런데 나한텐 그다지 소용없는데…….”
“이미 여기 온 시점에서 반쯤 매국노 취급이니까요. 한국 뉴스 봤어요?”
“아니. 내가 왜 봐? 봐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좋은 소리라곤 하나도 없겠지. 한국에도 이미 암군대장군 잡은 거 알려졌을까?”
“아마 들어갔을 거예요. 미국에 요청해서 위성사진으로 촬영하는 방법이 있으니까요.”
아무리 돈이 좋다곤 하지만 혼란스러운 조국을 내버려 두고 원한 많은 일본으로 원정 간 사실은 대한민국의 심기를 매우 뒤틀리게 했고, 뭐라도 흠집 잡을 걸 찾기 위해 모든 수단을 써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흠잡을 거라……. 딱 그럼 저 후지와라라고 하는 길드장이 떡밥을 제대로 던졌네.”
“네, 아마 그 기사도 나겠죠.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내버려 둔다.”
“괜찮겠어요? 여러 곳에서 미움받을 텐데요?”
“미움받는 만큼 새끼들, 똥꼬에 힘주고 열심히 일하겠지.”
애초부터 이것을 노리고 일본에 온 이상 멈출 이유가 없었다. 고로 그는 곧장 채널을 돌려 다른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제 남은 건 4일 동안 적당히 놀다가 도쿄로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야스쿠니니 뭐니 하는 걸 그냥 무시한 채로 4일이 지나고, 유성원 일행은 예정대로 시코쿠에서 철수하여 도쿄에 도착했다.
정부에서 준비시킨 건지 아니면 오랫동안 무수한 희생만 쌓아 왔던 대 성좌 66천마 전선에서 승리를 가져와 준 것이 반가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수한 인파가 그를 맞이했고 정부에선 퍼레이드도 열어 준다고 난리였다.
“내가 이런 거 하기 싫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승리의 소식은 제대로 전해야 해서요. 대신 퍼레이드 비용, 연회 참여 비용도 책정해서 지불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지.”
일에 맞는 돈을 준다니 거부할 명분이 없기에 유성원은 어쩔 수 없이 퍼레이드 차량에 탄 채로 손을 흔들며 충실히 리액션을 해 주었다.
돈을 밝히는 게 단점이었지만, 돈만 지불하면 뭐든 해 주는 게 그의 장점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바탕 퍼레이드를 마치고 난 뒤, 일본 정부에서 마련해 준 호텔에 짐을 푼 유성원 일행은 헌터 특무부대 사람들과 마저 미팅을 했다.
“시코쿠엔 곧바로 현지 작업팀과 방위대가 들어갈 겁니다. 비용은 S급 몬스터 암군대장군을 처리했으니 5천억 엔에 섬에 있는 4개의 현을 회복한 대가로 400억 엔. 합쳐서 5,400억 엔입니다. 전 금액을 현금으로 준비하지 못해서 마정석은 타고 오신 수송기에 실어 놓겠습니다.”
“휘유~ 감사. 덕분에 돈 많이 벌어 갑니다.”
“하하핫, 저희야말로 덕분에 해결됐는데요. 그나저나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곧바로 다음 전선으로?”
“아뇨. 일단 한국에 한 번 갔다 올 생각입니다. 여기서 얻은 물건들 정리도 좀 하고, 필요한 물건 보강해서 돌아와야죠. 알다시피 시코쿠는 그저 전초전이었을 뿐, 이제 나고야 서부부터는 진짜 성좌 66천마의 세력 아니겠습니까?”
그 말대로 암군은 바다를 건너지 못해 혼자 고립된 군대였을 뿐, 이제 유기적으로 연대하여 싸우는 성좌 66천마의 군대를 상대해야 한다는 게 유성원 측의 핑계였다.
하나, 일본 정부가 보기에도 틀린 말은 아니라서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다.
“그런 것보다도 역시… 그냥 아예 이대로 일본에 자리 잡는 건 어떠신지요? 듣기론 북한 위쪽에 전선 도시를 직접 만드신다고 하던데… 기왕 하시는 거, 일본에서 하시는 건 어떠신지?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진 저희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미 벌여 놓은 거라 철수하면 돈 날리는 거라서요. 아무튼 한 2주 정도 쉬고 돌아오겠습니다.”
“예, 예! 꼭 다시 와 주십시오.”
“하하하, 걱정 마세요. 꼭 올 겁니다.”
그렇게 웃으면서 일본 정부 직원과 헤어진 유성원은 자신들의 수송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음, 이만하면 성공이지.”
이번 원정에서는 돈도 돈이지만, 본래 목적인 대한민국 정부의 심기를 뒤틀리게 만드는 데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야스쿠니 신사’에서 축도했다는 소식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는 현재 엄청나게 분노한 상태였다.
TV 뉴스와 인터넷도 만만치 않았지만, 서울에서는 집회까지 열릴 정도였다.
『이거 진짜 매국노 아닙니까? 우리가 이런 상황을 두고 순국선열들에게 고개나 들겠습니까? 아니, 야스쿠니가 어떤 곳인데! 거기서 축도를 받습니까!』
‘내가 언제 해 달라고 했나? 지들끼리 하겠다는데 뭐 어쩌라고?’
『게다가 저 ‘전선 도시’ 사업도 지금 의도적으로 국내 기업들을 배제하고 이상한 사람들만 뽑아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야 원래 그게 목적이었으니까…….’
『또! 이제 3대 길드를 누르고 대한민국 최강 길드가 되었음에도 전혀 질서를 잡지 않고 오직 돈만 밝히는 수전노 같은 놈입니다. 이게! 이딴 게 대한민국 최강 헌터라니 말이 됩니까? 여러분?』
‘그럼 딴 나라 갈까? 참 내~ 백날을 떠들어 봐라. 뭐가 바뀌는가~’
유성원은 그렇게 콧방귀를 뀌며 채널을 돌려 다른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그들이 아무리 입으로 떠들어 봐야 유성원에게는 그저 시끄러운 날벌레 소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게으르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아주 쓰레기 같은 날벌레들 말이다.
지금 저렇게 떠들어서 뭐가 변한단 말인가? 역으로 대한민국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자신과의 사이를 벌리려는 이간책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에 유성원은 그런 소리일랑 개무시한 채 신나는 프로그램을 보며 즐겁게 아이언 포트리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