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황금 갑옷을 입은 유성원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당당히 수송선을 내려갔다.
그 뒤를 이어 포탈을 타고 동시에 나온 기사들이 멋지게 대열을 이루었다.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듯한 행차였지만, 유성원은 그들과 전혀 입을 맞춘 적이 없었다.
“お… あれが噂の…….”
“かっこいい……!”
“黄金の鎧か!”
‘얘들아, 그런 거 할 거면 나한테 미리 말 좀 해 주면 안 되겠니? 에휴~ 그보다 뭐라고 떠드는 건지 모르겠네.’
“하하하, 어서 오십시오, 유성원 헌터님. 헌터 특무부대 소속 모리바야시 대위라고 합니다. 아, 이거 본명이 아니라 부대에서 붙인 인식용 가명이기에 이름은 없습니다.”
사방에서 일본어로 웅성거리는 것에 혼란스러워하던 도중, 30대 초반의 남성이 한국말을 하며 유성원에게 다가왔다.
진한 갈색으로 탄 피부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성은 헌터 특무부대의 군청빛 군복을 입고 있었다.
아무튼 못 알아먹는 일본어 속에서 한국말을 하는 이가 나타나자 다행이라고 생각한 유성원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행히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분이 있었네요.”
“예. 유성원 헌터님이 일본어를 못하실 거라고 생각해서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못하는 건 맞지만 할 줄 아는 사람을 데려오긴 했는데… 한국말을 할 줄 아시니 다행이네요.”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절 따라오시지요. 곧장 브리핑 룸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리고 저기 코스프레한 것 같은 사람들은 길드 쪽 사람들인데, 아마 대표로 따로 한 분이 올 겁니다만… 행동이 이상해도 놀라지 마십시오.”
‘길드 측 헌터들과 사이가 안 좋나 보군.’
코스프레니 뭐니 대놓고 비아냥대는 걸 보면 별로 좋은 감정은 없는 것 같았다.
일단 겉모습만 봐도 자유분방해 보이는 길드 측과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인 데다, 서로를 보는 눈빛이 원수까지는 아니어도 경계심이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도 길드 간에 분쟁이 있는 만큼 여기도 각성자들끼리 사이가 안 좋은 게 납득이 가는 그였다.
“브리핑 룸입니다. 유성원 헌터님의 요청에 따라 허례허식은 하나도 준비하지 않고 곧바로 출발하실 수 있게 해 놨습니다. 유성원 헌터님이 편하게 이동하실 수 있도록 전국의 도로와 도시에 연락도 다 해 놓았고 말이죠.”
“그렇군.”
사전에 협의한 대로 쓸데없는 사족 없이 알아서 척척 준비를 해 둔 것에 만족해하며 유성원은 브리핑 룸 안으로 들어갔다.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어두운 방 안에 들어가자, 친절하게도 유성원을 위한 상석이 가운데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앉을 의자만 ‘옥좌’로 보일 정도로 심하게 화려하다는 거였다.
“…….”
“갑옷의 중량을 생각해서 의자를 별도로 마련했습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철컥……!
엄연히 서로 거래한 사이였지만,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라 그냥 자리에 앉아 버리는 유성원이었다.
이어서 쇳소리와 함께 그의 주변으로 기사들이 알아서 척척 섰다.
다만 크록베인만은 워낙 덩치가 큰지라 무례하지만 앉아서 회의에 참여하기로 했다.
물론 자리에 앉으면서 등에 메고 있던 부검이 땅을 뚫어 버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바로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사와무라 중사입니다. S급 몬스터 킬 수를 다수 보유하신 유성원 헌터님 앞에서 발표하는 걸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곧바로 성좌 66천마 세력에 대한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
“아시다시피 성좌 66천마는 일본 중부에 있는 나고야를 기준으로 일본 서쪽 전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상징은 ‘전쟁’. 휘하 몬스터 대부분은 언데드로 분류되는 고스트, 사령 타입으로 코어 던전 위치는 오사카 성입니다.”
화면에는 지도와 함께 상공에서 촬영한 사진들이 나오고 있었다.
성좌 66천마의 군세들은 모두 과거 전국시대에서나 볼 법한 일본식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각 군대마다 색상이나 양식이 달랐으며 깃발의 한자까지 나와 있었다.
“다음은 조직도입니다. 성좌 66천마의 군대는 총 11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사카 성에서 코어 던전을 지키는 부대 혼돈(混沌)군, 그 외에 상급 부대 천, 지, 인(天地人) 3군, 그 아래로 화, 수, 목, 금, 토, 명, 암(火水木金土明暗) 7군입니다.”
“군단 체계……. 진짜 그냥 전쟁 조직이네.”
같은 대규모급 악(惡)의 성좌, 도살왕과 비교해 보자면 그들은 사냥꾼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반면 이쪽은 진짜 ‘전쟁’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 같았다.
계속해서 사와무라 중사는 발표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몬스터들 구성은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령병(邪靈兵) E급에서 C급까지 병종, 또 등급에 따라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그 위로 B급에 사령승병(邪靈僧兵)과 사령무사(邪靈武士)가 각기 분포되어 있는데, 사령무사의 경우 무력이 뛰어나며, 사령승병은 각종 마법과 술법을 사용하면서도 신성력에 강해서 특히 문제입니다.”
‘일단 모양새는 전국시대네.’
“그리고 A급은 사령장군(邪靈將軍)과 사령대승(邪靈大僧)으로, B급의 상위 버전입니다. 마지막 S급은 보시다시피 각 군의 군단장인데, 모두 뒤에 대장군(大將軍)이라는 칭호가 붙습니다. 가령 화군(火軍)의 군단장인 S급 몬스터의 경우 화군대장군(火軍大將軍)이라는 식입니다. 영상입니다.”
『전쟁… 전쟁이다아아아아아아! 모두 불태워라아아아!』
화군(火軍)이라는 수식어를 단순히 인식표로 달고 다니는 건 아닌 듯 휘하의 사령병과 무사들 모두 불길에 휩싸인 사령(邪靈)의 모습이었다.
화 속성 정령 몬스터와도 유사한 특징으로, 각종 화염류 공격을 마음껏 퍼부어 모든 걸 불태우면서 전진하고 있었다.
거기에 사령무사, 사령승병 모두 헌터와의 싸움도 유효하게 잘 해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병력 숫자도 병력 숫자였지만 폭발형 화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화군(火軍). 예, 말 그대로 화염을 두른 사령들입니다. 그래서 순수 폭발의 물리력이나 은탄, 성수, 주술, 마법 정도나 들어가지, 불길이나 화염 속성으론 잘 잡히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초고열까지 견디는지 핵폭탄 투하까지 하여 실험해 보았지만, 폭압에 의한 물리력에 찢겨 나가는 것일 뿐 방사선 및 열기는 사령무사와 승병들이 견디기까지 했습니다.”
“흠… 상성을 잘 봐야겠네.”
“다른 군들도 아마 해당 속성에 맞는 능력이나 유사한 내성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 대장군들은 성(城) 소환이 가능한데… 언제, 어느 곳에서든 사령의 힘으로 뒤덮인 일본 전통식 성을 단숨에 소환합니다. 일종의 간이 던전인데, 이 안엔 또 A급, B급으로 구성된 장군 가신단이라는 엘리트 몬스터가 존재합니다.”
‘완벽한 전쟁 스케일이네.’
성좌 도살왕이 자신들을 사냥하러 오는 맹수를 막는 것이 싸움의 방식이었다면 성좌 66천마는 군과 군의 싸움에 가까웠다.
‘전쟁’의 행위 자체를 사랑하는 성좌. 망자들을 이끌고 모든 것을 사멸시켜 사령(邪靈)으로 복속시키려는 성좌 66천마는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일본을 괴롭혔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해 왔다.
‘근데 이상하네. 이 정도로 전쟁광이면 굳이 일본 내에서만 활동할 게 아니라 한국이나 중국으로 건너와도 될 텐데…….’
후쿠오카만 해도 조금만 바다를 건너면 바로 부산에 닿고, 아니면 제주도도 충분히 건너올 만한 거리였다.
제주도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미 그곳에 살던 사람들 모두 대한민국 내륙으로 건너온 지 오래라서 현재는 원시 상태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각종 야생 던전과 몬스터가 즐비한 곳이었지만, 한국 정부는 그래도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을 세워 둔 채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왜지?’
“결정적인 약점으로는 놈들은 ‘바다’를 건너지 못합니다. 물을 싫어하는 게 아닌가 실험해 보았지만, 다리를 놓아서 태연히 건너는 한편 바다로 둘러싸인 시코쿠는 세토 대교와 혼슈 시코쿠 연락교 및 다리를 모두 폭파시키자 그 안에 있는 암군대장군(暗軍大將軍)을 비롯한 암군의 군대가 전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고립되었습니다.”
“…뭐? 바다를 못 건너?”
“예. 그렇습니다. 참고로 이거 기밀입니다.”
뭔가 그동안의 빌드업으로 전쟁에 특화된 흉악한 군단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바다를 못 건넌다는 단점을 듣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심지어 시코쿠의 그 11개의 군단 중 하나가 바다를 못 건너서 고립되었다는 소리는 갑자기 긴장감이 팍 식어 버릴 정도였다.
실컷 강하다고 어필해 놓고는 바다를 못 건넌다니, 정말 허탈했다.
“그래서 그… 성좌 66천마는 지속적으로 바다를 건널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도 나름 외부 공격으로 배와 잠수함을 비롯해서 조선소, 비행기 모두 자폭시켜서 발을 묶고 있습니다.”
“‘전쟁’만 고집하는 융통성 없는 성좌라서 오히려 다행인 거네.”
“예. 하나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다른 거물급 악(惡) 성향 성좌와 손을 잡는다거나, 아니면 다른 성좌를 섬기는 길드에서 배신자가 나올 수 있으니 말이죠.”
그렇게 말하고는 브리핑에 참여하고 있는 길드 측 헌터를 슬쩍 바라보는 사와무라 중사였다.
길드 측 헌터는 지지 않겠다는 듯 그를 마주 노려보며 긴장감을 형성했지만, 유성원의 머릿속에는 그저 당장 사냥 갈 생각밖에 없었다.
“현황 브리핑은 이상입니다. 작전은 어떻게 하실 건지…….”
“음, 그러네. 그러면~ 시코쿠로 가야겠다.”
“예? 아니, 왜 하필 거기를?”
“고립된 병력이고, 거길 먹어 두면 큐수, 츄고쿠, 킨키 모두 쳐들어갈 수 있잖아. 쟤네는 바다를 못 건너고 우리는 건널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럼 우리는 바로 갈게.”
그렇게 말하고 유성원은 곧바로 브리핑룸을 나섰다.
그러자 사와무라 중사와 모리바야시 대위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따라오면서 이리저리 떠들어 댔다.
“호, 혼자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저희 특무부대원들과 함께 작전을 하시는 게…….”
“맞습니다. 아무리 고립되어 있다고 한들 녀석은 시코쿠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인구를 흡수해서 사령 부대로 만들었습니다. 혼자 가시는 건 위험한…….”
“원래 헌터 일이 다 위험하지. 내가 알아서 할게. 수고~”
대놓고 거절한 유성원은 기사들고 함께 자신들의 수송기로 돌아갔다.
남은 두 사람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자기들끼리 일본어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유성원의 옆으로 다가온 가울프가 늘 보이던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흠하하핫, 제대로 한 방 먹였군. 계약자여~ 저 벙찐 얼굴들을 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군.]
“어, 참 웃기지. 딱 봐도 잡을 만한 곳이 있는데 안 가다니, 병신들이지.”
일본의 S급 헌터는 자그마치 16명. 그들이 모두 협력하면 시코쿠 섬에 갇힌 암군 정도는 진작 토벌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거기에 수송기도 있고, 배도 있어서 무조건 돌아 들어가서 정벌하면 서쪽에 있는 성좌 66천마의 군세를 압박할 수 있는데도 그걸 안 하니 참 웃긴 일이었다.
“그런 쉬운 수를 두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일본도 일본대로 내부에 문제가 있다는 거겠지.”
[여기 놈들, 길드와 특무부대로 나눠져 있다고 했었지?]
“그렇지. 성좌를 따르는 길드와 국가를 따르는 특무부대가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를 못마땅해하면서 으르렁대고 있지. 아마 그래서 그렇겠지.”
[게다가 균형도 슬쩍 어긋나 있으니 말이야.]
일단 공식적인 기록으로 특무부대 S급은 7명, 길드 S급은 9명.
이 비대칭 구조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게끔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아슬아슬한 균형이었기에 특무부대도 그렇고, 길드도 서로 무리한 공세로 S급이 손실되길 바라지 않는 마음이 먼저였던 것이다.
“동수만 되어도 정부가 밀어주고 세금도 걷는 특무부대가 압도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 길드도 딱 지금 이대로 우세한 상황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한국은 애초에 국방부의 병X 짓 때문에 특무부대 같은 게 생기지 못해서 길드 중심 체제가 되었고, 그 이후 길드끼리 싸우곤 했지만…….”
일본은 길드제와 헌터 특무부대가 어중간하게 공존하는 탓에 자신들 쪽 S급 헌터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게 하기 위해 견제하면서 시코쿠 탈환이라는 쉬운 수조차 두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이제 저 특무부대는 우리를 이용해서 같이 레벨 업이라든가 이것저것 주워 먹을 생각이었겠지만, 내가 거절했지.”
[그것도 그것이지만 계약자여, 그 정도로는 이 상황이 모두 설명되기 부족하다. 딱 봐도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있는데 안 움직이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법이지. 내 생각인데, 아무래도 일본 길드 쪽에 배신자가 있는 것 같다.]
“…배신자라고?”
[추정이지만 말이다. 시코쿠에 지원도 안 오고 홀로 묶인 S급 몬스터 한 마리. 적어도 3~4개의 길드가 합세해서 그 암군대장군(暗軍大將軍)을 노린다면 충분할 텐데… 길드에서조차 잡으러 가지 않는 걸 보면 느낌이 오지 않나?]
“모르지. 일본 놈들이니까 자기들끼리 뒤통수칠 수도 있잖아. 아니, 그러고도 남지. 아무튼 경계를 늦춰선 안 되겠군.”
가울프의 조언을 머릿속에 넣어 두고, 유성원은 그대로 시코쿠로 향하였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든 없든, 일단 자신들은 할 일만 해서 승리하면 그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배신자든 뭐든 자연스럽게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