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왜 너희를 모았냐고 하면, 알다시피 우리가 조져야 할 그 청룡 길드에서 결투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오오… 드디어 폐하에게도 이런 때가…….”
[그르르… 감동적이다.]
“오늘은 한잔해야겠군요.”
대충 이런 반응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막상 맞닥뜨리니 어처구니가 없는 유성원이었다.
결투장. 목숨을 걸고 싸우자고 신청하는 문서.
즉, 싸우는 둘 중 하나는 죽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기사들은 마치 금의환향을 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 같은 시선으로 다들 좋아하고 있었다.
“…이럴 것 같더라. 결투장이라니까……. 못 알아먹은 놈 있냐?”
“예, 결투장이죠. 이거 하나 못 받은 기사가 무슨 기사입니까?”
“근데 아쉽군. 그래도 첫 결투는 원래 미인을 걸고 싸우는 게 국룰인데…….”
“흠하핫, 계약자는 이미 성숙한 나이이니 그럴 때는 지났지.”
“게다가 이미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모든 논리 회로가 오로지 ‘기사도’로 통하기에 예상한 대로였다.
하나, 역시 결투라는 건 100퍼센트 승산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나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이놈들이…….”
“그럼 그게 폐하의 한계인 거죠.”
“뭐, 애석하지만 거기까지인 거죠.”
“그래도 저는 폐하께서 이길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짊어진 걸 생각하십시오. 그럼 질 수 없을 겁니다.]
태연히 말하면서 부담까지 얹어 주는 기사들의 모습에 유성원은 급불편해졌다.
아무튼 결투로 청룡 길드 건이 해결된다면 그보다 좋은 상황은 없을 터였다.
혹시나 최후의 발악으로 전면전을 벌이거나 무언가 큰 사태를 벌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말이었다.
‘아니, 그래도 뭔가 엄청 불안한데… 아예 믿는 구석이 없으면 이런 걸 걸지 않았을 텐데…….’
청룡 길드의 고천수가 직접 보낸 것이니, 필시 그쪽에는 결투를 위한 비장의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싸웠던 것을 보고서도 제정신으로 먼저 결투를 신청할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일단 승낙 의사를 보내 놓고, 회의한 다음에 날짜랑 장소를 잡자.”
그러고는 곧바로 고천수와 청룡 길드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유성원은 이 아이언 포트리스 안에서 그와 가장 많이 만나 본 백가연과 신소미까지 호출했다.
“결투라고요? 그 사람답지 않은 방법이네요.”
“나도 동감일세. 정면 승부 같은 정정당당한 걸 좋아하는 친구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뭐, 이미 3대 길드 톱인 시점에서 그건 맞는 말이지만요.”
유성원 또한 아카데미아에서 굴러먹던 몸이라 알음알음 들은 사실이 있었다.
하지만 개인의 강함에 대해선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의문점이 매우 많았다.
또 그동안 전장에서 보던 바로는 주로 위험부담이 있는 곳을 피해 도망친 경우가 많아서 개인의 강함은 더더욱 불분명했다.
“일단 아들내미처럼 주먹 쓰는 권사 타입인 건 알겠는데… 맞다. SS급 승급도 했었다고 했죠?”
“그렇다네. 일단 공식적으론 S급 몬스터 고트맨을 잡고 얻은 보상으로 청룡에게 보수를 얻었다고 했지. 하지만 심사 과정도, 심사 결과도 미지수일세. 자네가 질 거라곤 생각지 않지만…….”
“으으음…….”
주변에선 이렇게 말하지만, 유성원은 여전히 불안에 휩싸인 채로 고천수가 무엇을 믿고 이 결투를 걸었을지 계속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혹시나 성좌 청룡의 성향이나 권능의 힘을 빌리려는 건가 싶었지만, 성좌 청룡이 좋아하는 것이 ‘투쟁’이라는 것만 알 뿐이라 뚜렷한 해답은 여전히 나오지 않은 채 고민만 지속되었다.
***
같은 시각, 청룡 길드 길드장 사무실.
“길드장님, 유성원 측에서 ‘결투’를 받아들이겠다고 전달해 왔습니다. 다만 날짜와 장소는 추후에 알리겠다고 하더군요.”
“역시 거부는 못하나 보군.”
“길드장님 예상대로 그는 ‘기사도’라는 것에 얽매여 있는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 기묘한 대사도 그렇고, 그런 상황을 지겹게 봤으니 모를 수가 없지.”
성좌의 영향을 받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타날 때마다 싸구려 히어로물에 나올 법한 대사를 하면서 싸우는 모습이라든가, 부하 기사들이 명예, 정의 같은 걸 떠들어 대는 모습으로 봤을 때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결투를 거절할 수 없는 건 100퍼센트 확실했다.
“하나 길드장님, 문제는 어떻게 그를 이기느냐, 입니다. 알다시피 놈은…….”
“잘 알고 있네. 무지막지하게 강한 괴물이라는 걸 말이지. 하지만 내가 아무 생각 안 하고 싸움을 걸었을 것 같나?”
“그럴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나는 결투에서 ‘무은(無恩)의 진’을 쓸 생각일세.”
“그것은…….”
무은(無恩)의 진.
은혜를 없애는 진으로, 성좌의 은혜, 일정 시간 동안 각성자의 능력을 모두 사라지게 만드는 스킬이었다.
물론 시전자 또한 마찬가지로 성좌의 은혜나 각성 능력이 사라져서 일반인이 되어 버린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만, 역으로 보자면 자기보다 강한 각성자나 헌터와 싸우는 데는 최적화된 스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딱 지금 상황에 대한 해답으로 적절한 스킬이더군. 귀중한 스킬 포인트 둘과 청룡 님의 은혜 하나를 날리긴 했지만, 더 큰 비상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또한 최상위급 스킬인 만큼 아무나 배울 수 없으며 성좌 청룡이 내려 준 은혜까지 소모해야 배울 수 있는, 큰 대가를 치르는 스킬이었다.
그러면서도 성좌의 영향을 받는 몬스터에겐 통하지 않으며 이미 S급을 넘어선 헌터가 쓰기엔 오히려 불합리했기에 아무도 배울 기회도,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면 길드장님도… 맨몸으로 싸우는 거나 다름없는데…….”
“각성자인 상태로 그 친구와 겨루는 것보다는 나으니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그의 말대로 막강한 전설급 갑주를 입고, SS급의 압도적인 무용을 지닌 유성원과 싸울 바엔 차라리 둘 다 각성자 요소를 떼어 버리고 싸움판에 올라가는 게 훨씬 이득이리라.
지금 상황에선 인간 대 인간으로 싸우는 게 차라리 승률이 더 높았다.
게다가 결투, 단 두 사람만 싸우게 되는 판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 친구의 이력을 보니 각성자 이력은 고작 1년, 그 외에는 보호 시설과 아카데미아 스태프로 근무한 것이 전부였네. 반면 나는 어떤가?”
“길드장님이야, 각성자가 되기 전에도 당시 헌터를 일부 대신하던 마정석 장비를 쓰는 특수부대 전투원이셨죠.”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청룡 길드장 고천수의 각성자가 되기 전 이력.
그는 그랜드마스터가 떠난 혼란기 때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마정석 장비를 사용하는 특수부대원 출신으로, 때때로 몬스터와 육박전까지 벌일 정도로 거친 부대에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 방법이 가장 승률이 높다고 생각한 걸세. 성좌 청룡 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특수부대에서 일할 때의 기술과 능력들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고작 아카데미아 스태프나 하던 친구에게 질 요소는 없지.”
“하지만 그래도…….”
“아, 물론 그래도 불안해하는 건 이해하네. 하지만 거기에 또 나는 비장의 수를 하나 더 쓸 걸세. 이걸 보게.”
“이건…….”
고천수가 서랍에서 꺼낸 것은 반투명한 약물 앰플이 꽂혀 있는 총 모양의 주사기였다.
안에 든 것은 불길해 보이는 약물 같은 것이었는데, 비서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이 물건들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헌터들의 숫자가 부족해서 탄생한 부대원들은 결국 어떻게 해도 신체 능력이라든가 여러 가지 갭을 따라잡을 수 없더군. 그래서 정부에서는 지혜를 짜내어 이런 물건을 탄생시킨 거지.”
“약물입니까?”
“그러네. 이름은… 그러니까 ‘부스터’라고 불리는 걸세. 인지 능력과 반사 신경을 비롯한 신체 능력을 일정 시간 동안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주는 물건이지. 부작용으로는 체력과 기력 소모가 너무 심해서 사용하고 난 다음 날은 무조건 수액을 맞으면서 침대 신세를 져야 하고, 신체 노화가 빠르게 진행된다는 점?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썼었네. 몬스터를 잡으려고 말이야.”
태연하게 말하는 고천수였지만, 어두운 진실을 본 비서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마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겠지만, 결국 인간을 소모품으로 희생시킨 잔혹한 역사를 알게 되자 입맛이 썼기 때문이리라.
“엄청 위험한 물건이군요.”
“뭐, 효과는 확실했네. 다만 그것도 각성자가 너무 적던 옛날에나 썼지, 성좌의 시대가 되고 각성자들이 늘어나면서부터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네. 애초에 각성자의 연금술 능력으로 더 효과가 좋고 부작용도 없는 포션을 만들 수 있게 되었거든.”
“그럼 그걸 쓰면……?”
“하지만 장점이 있지. 이 부스터는 순수 인간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거라서 무은(無恩)의 진에서도 효과를 본다는 점이네.”
“오오……!”
서로 각성자의 능력을 없애 버려 인간으로 돌아온 다음 자신은 강화 약물, 부스터로 신체 스펙을 올리고 뛰어난 전투 기술로 제압한다는 작전이었다.
급하게 생각해 내긴 했지만 아주 완벽한 작전이기도 했다.
일단 이력과 경험에서부터 차이가 큰 만큼 고천수는 자신감이 넘쳤다.
평화로운 세상 속 일개 아카데미아 스태프가 헌터가 부족해서 강제로 약물까지 맞아 가며 몬스터와 싸워야 했던 대(對)몬스터 특수부대원을 이길 리가 없었다.
“훗, 각성자 이력이 짧은 만큼 그 강함의 모든 요소는 오직 ‘각성’에 의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게 다행이었지. 만약 5년에서 10년쯤 있다가 두각을 드러냈으면 그사이 이력을 몰라서 어쩔 수 없었을 게야.”
“정말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그리고 결국 무은의 진으로 승리하게 되면 투쟁에서 이긴 거나 다름없으니, 성좌 청룡 님의 보수도 받을 수 있게 되겠지.”
고천수는 늘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강점을 가지고 지혜를 짜내서 역경을 돌파해 왔다.
이만하면 최적의 플랜이었다.
이제 남은 건 미리 무은의 진을 펼친 상태에서 싸움법을 단련하고 연마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전략상 완벽한 승리 공식을 짰더라도 결국 적의 숨통을 끊어야 하는 건 자신의 손이었기 때문에 그 준비를 소홀히 할 순 없었다.
***
일주일 뒤, 아이언 포트리스 지하.
결투 장소는 유성원 측에서 정하기로 했기에 아이언 포트리스 내부에 있는 대련장에서 비밀리에 실시하기로 했다.
심판 겸 증인은 양측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성좌를 가지고 있어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맹세를 지닌 올림푸스 길드의 디오메디아 양이 맡기로 하였다.
룰은 양측이 최종 합의하에 작성된 상태로 진행하게 되었고, 오늘 그 사인을 하고 내려가서 바로 싸울 계획이었다.
“자, 그럼 작성된 것에 대한 마지막 점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결투장의 각 벽과 땅의 재질에 대한 설명까지 화면에 띄워져 있는 상태로, 디오메디아가 가운데서 양측의 합의하에 작성된 결투 동의서를 보며 마지막 체크를 시작했다.
“우선 결투에 참여하는 것은 고천수 청룡 길드장 본인과 유성원 본인이 맞으십니까?”
“그러네.”
“예, 맞습니다.”
“결투의 승패는 한쪽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싸워서 결정된다, 인데… 양측 동의하십니까?”
“그러네.”
“동의합니다.”
“양측 결투 참관자는 각각 한 명씩이며 이 둘은 지켜보기만 할 뿐 그 어떤 행동이나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 또한 알고 계십니까?”
…….
…….
그렇게 줄줄 체크를 해 나가면서 긴장감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이제 이 싸움이 끝나면 살아남는 건 단 한 명뿐이다.
둘 다 거물인 만큼 그 여파는 보통이 아닐 것이며, 살아남은 한 명이 사실상 대한민국 헌터계의 정점에 오르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패자 측은 승자 측에 굴복해야 하며 길드의 모든 자산을 넘김과 동시에 다시는 대항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및 성좌에 대한 맹세를 해야 합니다. 만약 패배 후 추하게 이를 거부할 시 증인으로 나선 우리 올림푸스 길드가 승자의 집행을 지원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냥 패자가 굴복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길드의 모든 재산을 걸고 하는 싸움이었다.
처음엔 패배자는 배상금을 내고 두 번 다시 도전 혹은 도발을 하지 않겠다는 성좌의 맹세를 하거나 서약서를 내고 굴복하는 촬영을 하는 게 전부였지만, 갑자기 유성원이 판돈을 올려 버렸다.
‘어차피 뒤지면 끝나니까 좀 더 화끈하게 가죠. 다 걸게요. 기사도에 맹세코 내가 지면 아이언 포트리스 소유권, 내 기사들 소유권, 이 조직, 내 무구, 돈, 장비 다 가져가세요. 대신 그쪽도 올인 박으시고요. 쫄리면 뒤지시든가?’
이렇게까지 판돈을 올린 것은 바로 유성원 측으로, 협상 막바지에 과도할 정도로 올인을 한 것이었다.
아마 자신이 절대 질 리 없다는 자신감의 발로라고 생각한 고천수는 속으로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면서 침착하게 그것에 응했다. 자신도 청룡 길드 전부와 인공섬을 비롯한 모든 유산을 걸어 버린 것이다.
‘…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못한다는 게 이런 걸 뜻하는 거였군.’
그리고 결투에 앞서서 현재 무장을 한 채 유성원을 바라보고 있는 고천수는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아마 상대는 각성자 능력으로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질렀을 테지만, 자신에겐 압도적인 승리 공식이 있었다.
‘딱 첫수만 조심하면 된다.’
조심해야 할 건 오직 무은(無恩)의 진을 펼치는 순간! 만약 그것을 펼치기 전에 자신의 머리통이 날아가면 그보다 더 허망한 일은 없을 터였다.
하나, 천만다행으로 상대도 자신이 먼저 결투를 건 게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초반부터 죽자고 달려들지는 않을 테니 무은의 진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