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이렇게 나오신 이상 그냥 항복도 안 되겠지.’
항복한다면 그것은 곧 ‘투쟁’을 그만두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성좌 청룡’은 이때까지 자신들에게 내려 주었던 힘과 권능을 도로 가져갈 것이다.
모아 둔 돈이나 재산은 가져가지 않는다고 해도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곳곳에서 쌓인 원한 때문에 힘이 없으면 결국 목숨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아아~”
“형님, 아니면 우리도 그냥 사업으로 경쟁하면 안 됩니까? 강원도 앞에다가 우리도 까짓것 전선 도시 사업 진행하죠!”
“경쟁이 되겠느냐? 자금은 어떻게 융통한다고 쳐도, S급 숫자에서부터 밀리는데? 게다가 이 계획을 보니 수익성은 생각도 안 하는 막장 레벨이다. 이건 우리가 따라 한다고 해서 쉽게 되는 게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동안은 의도적으로 큰 싸움을 피해 왔다.
예전에 능력치를 쌓아 올릴 때라든가, 강적을 쓰러뜨리고 올라올 때와 달리 지금은 잃을 것이 너무 많았으니 말이다.
3대 길드 최강이자 최고의 길드에 올라왔을 때 어땠는가?
정부와 대기업들도 눈치 볼 정도인 무소불위의 권력과 힘. 얼마나 달콤했는가?
잃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도전자들을 없애기 위해서 아카데미아를 장악하고 유망주를 길드로 영입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던가?
‘…다 소용없는 일이었군.’
결국엔 이렇게 상식을 초월하는 규모의 적을 상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나, 그래도 아예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경쟁 상대로 인식했을 때부터 이미 고천수도 유성원 측 데이터를 열심히 모아 왔고, 어떤 방법으로 싸울지 예상도 해 두었다.
“결국 이제 위험한 길을 걸어야겠지만, 그래도 아주 수가 없는 건 아니다. 놈들의 특성에 맞는 방안이 있다.”
“형님?”
“다만 이번만큼은 목숨을 걸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고천수는 한숨을 크게 쉬며 다시 목숨을 건 도박을 하기로 마음먹고는 유성원 측에 보낼 서류를 하나 준비하기 시작했다.
추잡하게 발악하는 것보다 낫고, 또 자신의 목숨만 걸 수 있어서 좋으며, 놈들이라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방법이 딱 하나 있었다.
***
며칠 뒤, 아이언 포트리스.
전선 도시 계획이 발표되고, 곳곳에서 인터뷰 요청 및 사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기업과 길드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들을 선별하느라 매일매일이 바빴던 유성원 일행은 그 선별의 기준이 기존의 기업들을 아주 물먹이는 조건들이라서 영업하러 온 자들을 열심히 물먹이는 중이었다.
“예상대로~ 멀쩡한 곳이 없네요. 이력들이 아주 장난이 아니야. 대기업이고 뭐고, 스캐빈저들이랑 일하는 건 기본 사양이네.”
“그야 그게 기본인 사회였으니까.”
“그렇다고 죄다 탈락시킬 순 없는데 말이죠. 아니면 진짜로 ‘진석’ 경의 말대로… 우리가 직접 만들까요?”
진석은 아예 애들을 교육시킨 김에 중장비를 직접 사서 기지 공사를 하자고 건의했다.
거기에 ‘아칼론’까지 거들고 있었고, 무엇보다 제대로 된 회사가 없어서 이러다가는 진짜로 자신들이 직접 공사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유성원은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희망의 빛은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걸세.”
“저도 어르신처럼 무한히 긍정적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니면 정말로 A급 던전을 주파해서 보상을 얻어 볼까요?”
“보상을 얻으면 뭔가 있나?”
“그 보급대장 ‘중한’인가 하는 기사가 기똥찬 보급관 겸 건설 대장이라고 해서 소환하려고요. ‘아칼론’이 전기 설비랑 시스템 구축을 맡으면 완성될 것 같은데요? 설계도랑 기술 지식은 여기 다 있으니까요.”
엄연히 인류 멸망을 대비한 시설이기에 아이언 포트리스엔 웬만한 지식과 기술에 대한 정보가 가득했다.
그렇기에 마음만 먹으면 정말로 장비랑 자재만 모두 구매해서 자기들 인력으로 직접 만드는 방법도 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기존에 세웠던 방침과 너무 먼 일이었기에 백가연은 반대했다.
“…우리의 목적은 알다시피 청룡 길드의 배알이 꼴리게 하는 걸세. 그걸 위해서는 일단 일부라도 이쪽에 와서 잘 사는 모습을 보여야지 않겠나?”
“데려올 만한 사람이 안 보이니 그렇죠.”
그래서 기업의 규모나 실력 상관없이 인간미가 있는 회사를 찾으려 한 유성원과 백가연이었지만, 썩은 과일 상자를 너무 오래 방치한 탓인지 먹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헌터들이 스캐빈저와 엮여야 사는 것처럼, 여기도 부정 없는 방식으로는 일하기 힘든 시대였다.
“이렇게 되면 회사는 직접 만들고 거기에 적절한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모아서 구축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번거롭지만~ 그 방법밖에 없어 보이는군. 걱정 말게. 그걸 모아 오는 건 그럼 내 역할이겠군.”
금방이라도 숨이 멈출 듯 썩고 병든 몸에서도 생명은 살고자 하는 것처럼, 이 미래가 안 보이는 추악하고 썩어 문드러진 사회에서도 양심이 바른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을 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일수록 부정한 수단과 방법에 저항할 수 없는 곳에선 더 살아남기 어려운 법이지만, 그런 이들이라도 사회의 톱니바퀴로 존재해야 하기에 크게 반항하지 않는 이상 능력이 있다면 이용하는 게 순리였다.
“한데, 내가 너무 신경 쓰는 게 아닌가 싶네만, ‘저건’ 좀 어떻게 안 되나?”
『폐하의 자비로움에 너희는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는가?』
『검과 창을 들어 그분의 방벽이 되는 일입니다!』
『너희가 걷는 길은 사투의 길이고! 전쟁의 길이다! 그럼에도 후회하는가?』
『후회하지 않습니다!』
한쪽 화면에서 나오고 있는 장면을 보며 슬쩍 눈치를 주는 백가연.
‘아이언 포트리스’ 외부 연병장에서 훈련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는데, 자신감과 기력을 찾아 주겠다는 본래의 의도와 다르게 어느새 진짜 이곳의 천검군을 길러 내려는 건지 군사 훈련 레벨로 넘어가고 있었다.
“저, 저는 분명히 안 해도 된다고 했어요. 강요가 아니라 진심으로 나가고 싶으면 나가도 된다고 했고, 직업 훈련소도 소개시켜 준다고 했고! 집도 구해 준다고 했어요. 근데 죄다 남겠다고 해서…….”
“…하아~ 아마 자네를 비롯해서 ‘기사’들이 제대로 된 동경의 대상이 된 탓이겠지. 저 친구들, 누가 봐도 멋진 친구들이 아닌가?”
미형에 우아하면서 지적인 유청, 서글서글한 아저씨 같으면서도 본래 천검군의 대장이기에 진지해지면 카리스마 넘치는 진석.
이 인간적으로도 매력이 가득하며 항상 예의 바르고, 올바른 것에 대한 교육과 살아남기 위한 기술을 직접 몸으로 가르치는 어른다운 어른을 본 아이들은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본래 있던 시설이… 동경할 어른이 아니라 자신들을 도구나 가축 같은 걸로만 보던 악마 같은 인간들로 가득한 곳이었으니, 더더욱 저들이 좋은 어른으로 보였겠지.”
“그 영향 탓인지 애들도 저한테 ‘폐하’라 부르면서 예의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유청이랑 진석의 행동을 보고 그러는 것 같아요. 나는 하지 말라고 계속 말하는데…….”
볼일이 있어서 식당이라든가 훈련장을 오갈 때마다 아이들이 갑자기 자신을 향해 ‘폐하!’라고 소리쳤을 땐 유청과 진석이 강제로 시켰는지를 의심했던 유성원이었지만, 그게 아니라 자의로 한다는 걸 알았을 땐 기절할 지경이었다.
“아이고, 저런…….”
“게다가 쟤네가 얼마나 우상화 작업을 잘해 놓은 건지, 제가 막 하늘을 반으로 가르고, 대지를 흔든다고…….”
“그건 사실 아닌가?”
원래부터가 규격 외급인 SSS급 헌터인 데다, 패황천검류라는 절정의 필살기까지 가지고 있는 몸이기에 사실은 사실이었다.
물론 진짜 사실이기에 유청과 진석이 말하는 우상화가 잘 먹히는 거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게 유성원은 상상 이상으로 불편했다.
“아, 아무튼 저도 어떻게든 말리고 싶은데! 못 말려서 미치겠어요. 애들 만날까 봐 무서워서 기지를 못 돌아다니겠다니까요. 저 요새 그래서 식당에서 밥 안 먹잖아요. 지나다닐 때마다 애들이 막…….”
‘폐하,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폐하, 좋은 아침입니다!’
‘아, 폐하다! 오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동경으로 가득한 순진한 눈을 보면… 부담스러워서 뒤질 것 같아요. 대체 얼마나 거품을 집어넣은 건지 모르겠네.”
“뭐, 애칭 같은 거라고 생각하게. 자네가 진짜 왕 노릇을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백가연의 말대로 ‘폐하’ 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진짜 왕이 된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어딘가 찜찜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겁박해서 억지로 호칭을 고쳐 봐야 좋을 리 없고, 결국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하아~ 예. 제가 포기하겠습니다. 일이나 하죠. 보자… 어? 청룡 길드에서 온 서신이네요. 반응이 빠른데?”
푸른 용의 문양이 새겨진 편지 한 통과 그 안에 쓰인 ‘청룡 길드에서.’라는 문장을 본 유성원은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자기들의 하위 기업들이 사업에서 배제됐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스캐빈저가 아니더라도 금방 접할 수 있는 소식이었으니 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한두 놈 정도는 청룡 길드에 일러바치면서 항의했을 것이다.
“자~ 뭐라고 찡찡댔으려나?”
“으음… 나도 예상이 안 되는구먼.”
“엑?”
서신을 뜯어 본 유성원의 표정이 무언가 잘못된 것을 본 것처럼 구겨졌다.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박수가 너무 커서 고려하지 않았던 수를 상대가 내민 것이다.
서신의 맨 위에 적힌 것은 단 세 글자, 바로 ‘결투장’이었다.
“…아니, 이걸?”
<…최근 유성원 경의 길드와 우리 청룡 길드 간에 크고 작은 분쟁이 있었으며, 그쪽이 의도적으로 우리 길드를 배척한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 우리는 더 이상 분쟁과 피해가 확산되길 원하지 않기에 빠르고 신속하게 당사자끼리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했고, 본인 고천수 길드장과 유성원 경의 정정당당한 일대일 결투로써 이 모든 분쟁을 마무리하는 것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만약 응하겠다고 하면 결투 시간과 장소, 입회인은 유성원 경이 직접 정하시는 걸로…….>
“이거 가불기네. 하아아아~”
결투. 쉽게 말해 대표자 간 일대일 무력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이긴 자는 결국 신이 지켜봐 주신다는 식으로 막 포장하고 난리를 부리겠지만 아무튼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자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유성원에 한해서는 완벽한 가드 불능, 거절 불가, 무조건 응해야 하는 기어스로서 유성원 세력에게 제시할 수 있는 하이패스식 제안 방법이었다.
아직 승낙이나 거절은 생각도 안 했는데 벌써 그의 상태창은 난리가 나고 있었다.
[이 정정당당한 결투장은 자신의 생명은 물론 길드의 운명을 걸고 용기를 내어 당신에게 제안해 온 것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건 매우 불명예스러우며 비겁한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정당한 시간과 결투 장소를 물색할 것이며, 정당한 입회인을 찾고, 그들에게 결투 보름 전에 통보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에휴~”
이 망할 기사도 특성의 난리는 익숙한 일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번거롭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미 청룡 길드와 자신들의 세력 간 힘의 차이는 컸고, 청룡의 협력자가 될 서울 길드는 멸망, 올림푸스는 자신들 쪽에 포섭돼서 도와줄 세력은 외국 정도밖에 없었는데, 외국 쪽 길드나 각성자 부대는 현재 자기 앞가림하는 것도 힘든 시국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치졸하게 전선에서 자기 목숨 보존하며 물러났던 양반들이 결투를 걸어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결투라. 뭐… 자네의 무용이라면 걱정할 게 없겠지만, 고천수 그 양반도 뭔가 단단히 준비를 해 왔을 걸세.”
“예. 그렇겠죠. 그런 노림수 하나 없이 이걸 보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애들 소집이나 해야겠다.”
결국 유성원에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고, 이것에 대한 답은 무조건 ‘YES.’였다.
청룡 길드가 성좌의 명령에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유성원 또한 이 망할 기사도 특성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일단 승낙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유성원은 곧바로 흩어져서 일하고 있는 자신의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