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며칠 뒤, 대한민국 헌터 협회.
화창한 3월의 봄날. 여전히 평화로운 상황 속에서도 협회의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다.
초대형 성좌급 세력인 성좌 도살왕은 물러났지만 성좌 산거정의 세력은 여전히 서울 남부에 위치해 있었고, 또 계속해서 야생의 던전은 열렸기 때문에 헌터들의 토벌은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협회장은 오늘도 커피를 마시며 특별할 거 없는 토벌 내용이 적힌 서류를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흐음~ 별일 없군. 아주 좋아. 이대로 몇 년… 아니, 10년은 조용했으면 좋겠군.”
일단 그 정도로 전망은 좋았다.
청룡 길드와 올림푸스 길드, 유성원 세력의 분쟁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점은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청룡 길드가 무너지면 사실상 유성원 독재 시대가 열리는 거나 다름없기에 그들은 살아 있는 채로 계속 유성원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 줬으면 하는 게 협회장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뭐, 도살왕 세력이 유례없는 피해를 입은 만큼 외부의 요인은 없겠지. 흐으으음~”
그 점 때문에 역으로 안전해진 대한민국의 상황은 주변국들 사이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다.
작년, 연이은 전쟁과 도발에 시달렸지만 결국 이겨 내었고, 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S급 몬스터 아크데몬 비스트들을 성공적으로 처리한 덕분에 지금은 오히려 세력이 쪼그라든 상태였다.
“문제라면 역시 UN과 일본, 중국인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본래 동아시아 삼국 모두 고질병처럼 강력한 악(惡) 성향 성좌에게 눌려서 살고 있다가 한국 혼자 위험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보자 배가 아파진 중국과 일본이 슬슬 찝쩍대기 시작한 것이다.
‘SS급 헌터의 힘과 위용, 저희도 한번 보고 싶습니다. 별짓 안 하고 이야기만 해 볼 테니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시면……!’
‘절대 안 될 일이지!’
유성원은 협회나 국가에 충성하는 게 아니라 그저 금전 계약으로 얽혀 있는 용병 같은 존재였기에 일본이나 중국이 그 사실을 알면 분명 더 큰 보수를 주니 마니 하면서 분쟁이 일어날 게 분명했고, 그러면 머리는 물론 위장까지 뜯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막는다고 해도 이미 구멍이 있는 정보라서 알려졌을 텐데…….’
그렇다. 아무리 극비로 다루기 위해 애쓴다 한들 막을 수 없는 게 있다.
게다가 청룡 길드도 아는 내용이었기에 그들이 발설하면 자연히 유성원이 지금 ‘돈’으로 고용되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질 터였다.
하나 더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유성원은 외국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갑자기 애국심이 생겨나진 않았을 테니… 아니면 나중에 뭔가 교섭에 쓸 카드로 아껴 두는 건가? 하아아~’
그러나 현재 유성원의 진짜 성격과 생각에 대해선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이유를 알아낼 수 없어 갑갑할 뿐이었다.
근래엔 만날 일이 많아서 본인이 얼굴을 비치긴 하지만 말을 많이 안 할뿐더러 본격적인 이야기는 아예 백가연 어르신에게 맡기는 경우도 많아서 도무지 성격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제발 다른 사고나 문제가 없길 바라야… 음? 이건? 아니! 이 양반들이 진짜! 유성원 관련 서류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직통으로 가져오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응? ‘제안서:북한 지역 영토화 작전’… 이라?”
내용은 현재 주요 아크데몬 비스트들을 격퇴해서 성좌 도살왕의 세력이 한풀 꺾인 안전한 상황에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서울 북쪽에 하나의 장벽이 될 도시를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북쪽에 새로운 전선 도시를 구축함으로써 장벽 하나와 전선 하나가 뚫리면 바로 도심이 위험한 서울의 안정성을 한층 더 강화하고, 도살왕 세력과 스캐빈저의 세력을 한층 더 꺾고, 중하위 헌터들에겐 안정된 추가 사냥터를 제공해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경기 활성화까지……. 으으으음… 아주 좋은 생각이군.”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반대할 이유를 찾으라고 해도 찾지 못할 정도로 이상적인 방안이었다.
시기도 적절하고, 서울도 안전해지고, 하위 헌터들에게 성장 찬스도 줄뿐더러, 대규모 공사로 인한 경제 활성화까지 이루어지는 건 거의 완벽한 계획이라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공사 비용 및 시설 구축을 모두 자기네들이 직접 주도하겠다고 하고, 교통수단은 서울-전선 도시 간 초고속 장갑 열차를 운용해서 물류 및 인원 이동 지원도 손쉽게, 거기에 신강남에서 사용하던 아다만티움, 오리하르콘을 대량으로 사용해서 만든 장벽이라. 으음… 엄청난 돈이 들어가겠군. 이러면 30조… 로도 부족할 지경이지.”
평범한 도시가 아니라, 몬스터나 스캐빈저를 상대할 장벽이 될 전선 도시를 구성하는 일이니 30조로는 턱도 없을 만큼 엄청난 금액이 들어가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구상을 제안한 유성원이 전례 없는 SS급 헌터라는 점에서 자금 융통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으음, 하지만 좀 걸리는 문장이 많이 보이는군.”
좋은 이야기들을 했으니 이제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올 차례였다.
유성원 측의 요구 사항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전선 도시 내의 치안을 포함한 사법권, 행정권을 요구, 던전 토벌을 제외한 모든 분야의 세금 면제 혹은 대폭 감면 등등… 이 정도면 거의 대한민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 도시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하나, 그래도 주 수입이 될 던전 토벌 부문에서는 세금을 내겠다고 하니 미묘하게 메리트도 주고 있어서 머리가 아팠다.
“…사실상 전선 도시 계획이라고 써 놓았지만 실제로는 유성원 세력의 새로운 길드 주둔지가 되겠군.”
옛날이었으면 당치도 않을 일이었겠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딱히 낯선 일도 아니었다.
대형 길드나 성좌 세력들이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지배하는 영역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이미 한국만 해도 서울 길드의 신강남, 청룡 길드로 치면 인공섬, 올림푸스 길드의 하늘을 떠다니는 천공섬, 그리고 더 심한 경우에는 아예 길드나 각성자 세력이 국가 단위를 접수해서 통치까지 할 정도였다.
“거절할 수는… 없겠지. 다만 여기에 뭔가 다른 속셈이 없나 체크 정도는 해 봐야겠군.”
명분도 좋고, 요구 사항도 막 무리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대형 건수를 혼자서 그냥 OK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부의 수반들을 대거 모아 놓고 진행해야 할 큰 사업이기에 협회장은 곧장 청와대에 전화를 넣어 대통령과 청와대 수반, 주요 국회의원, 협회 간부, 대기업 회장들까지 모아서 이곳 협회에서 회의를 가졌다.
“…이상이 유성원 측에게서 받은 제안서의 내용입니다. 뭐, 과도한 권한도 있긴 하지만 알다시피 대형 길드의 기지나 성좌의 고유 영역에는 이미 이런 권한이 부여된 바가 있어서 딱히 무리한 요구가 아니긴 합니다. 다만 뭔가 다른 생각이나 속셈이 있을 걸로 추정되는데,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오히려 좋은 징조가 아닐는지? 전선 도시가 서울 위에 세워지면 방패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격입니다. 이건 무조건 통과시켜야죠. 게다가 신강남처럼 정부 예산 지원받는 것도 없이 자기 돈으로 하겠다는데!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죠.”
“맞습니다. 또 해당 지역 사법권 같은 건 어차피 거물 길드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고, 전선 도시라는 특성에 맞추면 무리도 아닙니다. 군법 같은 거라고 보면 되니까요.”
“게다가 이 정도 규모의 공사면 경제 활성화도 클 거고, 거액의 투자금도 회수되니까 무조건 승인을…….”
들어오는 이익과 국가 전략적 메리트 모두를 만족시키고 있는 사안이라 다들 더 깊은 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이래서야 상대가 숨겨 놓은 꿍꿍이를 찾기는커녕, 오히려 좋은 건수를 반대한다고 욕을 먹을 상황이었다.
“예전엔 어찌 되나 했는데, 이젠 그 친구가 이렇게 잘해 주니 안심이 됩니다. 이건 정말로 기특한 생각이에요. 서울 장벽 위에 스스로가 방패가 되어 줄 생각을 하다니!”
“뭐, 그거야 길드 간의 분쟁도 분쟁이었고, 신강남 사건의 경우 역시 내부가 부패했던 문제 때문이었겠죠. 또 기존에 있던 3대 길드와 세력 다툼을 한 거라고 생각하면…….”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자, 빨리 승인과 관련 허가를 내 주도록 합시다. 좋은 일은 빨리 할수록 좋으니까 말이죠.”
“하하하, 그럽시다. 그럼 먼저 국회에서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압도적 메리트에 한눈이 팔린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이후 잘못된 일이 생겨도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국가 운영의 주체이자 시민들의 대표자라 불리는 양반들이 책임을 지지 않고 낙관론만 읊어대고 있으니 협회장은 답답할 따름이었다.
‘하긴…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각성자 시대 이전의 출산율부터 해결되었겠지.’
그래, 당장 자신들이 권력자로서 누릴 것을 누리게 해 주는 시민의 숫자조차도 신경 안 쓰는데, 이런 문제를 깊게 고려하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리라.
그렇게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유성원의 전선 도시 제안은 순조롭게 통과되었다.
***
며칠 뒤.
아이언 포트리스, 유성원의 방.
『봐라, 제시… 내 몸은… 내 근육은 단 한 방울의 약물에도 오염되지 않았다. 으윽!』
『선생님!』
『근손실로 인한 절망에 빠졌을 때… 너의 아름다운 근육에 질투를 느꼈을 때도 있었지만, 나는… 나는 그래도 끝까지… 끝까지 나의 힘과 육체를 믿고서… 숙녀의 길을 걸었단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아아!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선생님께서 알려 주셨는데!』
『아아… 제시… 부디… 부디! 사악한 속삭임에 지지 말고… 아름답고 우아하고 고고한 세계 최고의 숙녀가… 되어…….』
『선생니이이이이이이이이이임! 아아아아아아!』
휴일엔 역시 TV 앞에서 보내길 좋아하는 유성원은 우아하고 화려한 드레스에 안 어울리는 마초스러운 근육질의 여성 둘이 석양을 바라보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중이었다.
본래의 플롯은 근육질 가득한 우아한 숙녀들의 사교계 배틀이었는데, 어느새 소년 만화 같은 스토리로 진행되어서 현재는 선생과 제자의 치열한 사투 끝에 피날레를 맞이하고 있었다.
‘…뭐, 오래된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 흔히 겪는 일이지. 신선함을 주려고 다른 장르랑 결합하거나 트렌드를 삽입하는 그런 건가?’
장수 프로그램의 숙명 같은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보는데, 등 뒤와 좌우에서 웃음과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흑… 너무 감동적이군요. 정말 훌륭했습니다. 레이디 제시, 그리고 마담 마죠리타. 두 분 모두 훌륭한 기사도였습니다.”
‘…….’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본 유성원에게 보인 것은 빨개진 눈을 비비면서 울먹거리는 유청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새 기사단의 성소 문이 열려 있었는데, 안쪽을 들여다보자 몰래 시청하는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 충격적인 건 그 기사들 전부가 눈물을 흘리며 감동에 빠져 있다는 점이었다.
[멋… 지다.]
[전편 결제 및 다운로드 완료.]
“이건 정말 신이 내린 작품입니다. 흐흐흑…….”
크록베인, 아칼론, 섬멸은 짧게 감동을 표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이쪽은 그래도 나름 조용한 반응을 보이는 반면 그 옆에 있는 진석부터가 아주 장관이었다.
“아아… 아주 훌륭한 작품이다. 마지막 선생과의 사투에서 마무리를 장식한 눈물로 범벅이 된 제시의 ‘프론트 더블 바이셉스’는 감동적인 장면이기도 하지만 결국 기본 숙련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 주는, 감동과 교훈을 모두 잡은 훌륭한 기사도가 담긴 작품이다.”
‘기사도가 어디 있는데?’
[흠하핫, 나는 역시 영원한 근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선생의 마음이 공감이 되더군. 3대 500… 600을 넘어 700… 800… 경지 위의 새로운 경지, 별에 닿으려는 인간의 마음… 그리고 찬란한 빛을 향해 높게 올라갈수록 짙어지는 그림자의 연출이 진국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거 예능이거든?’
“맞아. 그것도 좋은 장면이었지. 그리고… 그래! 엘리자베스가 제시를 위해 ‘최후의 싸움까지… 근손실이 나면 안 되잖아.’라고 하며, 자신의 닭가슴살과 단백질 보충제를 양보할 땐… 숭고함이란! 바로 저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뭘 깨달은 건데!’
마음속으로 태클을 걸어 대며 유성원은 성소에 있는 녀석들에게 나오라고 재촉했다.
그러고는 가장 앞에 있던 유청에게 물었다.
“볼 거면 그냥 당당히 나와서 보지, 왜 안에서 몰래 보고 있냐?”
“아, 본래는 나오려고 했는데… 워낙 작품이 좋아서 잠깐 시선이 꽂힌 순간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역시 폐하께서는 항상 저것을 보시면서 기사도에 대한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아니거든.”
“하긴 그러니 ‘서약’을 진지하게 고민하시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폐하께서 이리도 멋진 작품을 보며 사색을 하고 계셨다는 걸 알고 나니 더더욱 감동했습니다.”
“아니라고…….”
아무리 부정해도 이 마이페이스인 기사들이 도통 알아먹지 못하자 유성원은 결국 포기해 버렸다.
애초에 평범한 자신에겐 그저 재미있는 가상의 영상물일 뿐이었지만, 이 기사들은 모두 진짜 하나의 전설. 하나의 신화 같은 이야기를 써 내려갔기에 몰입도부터가 달랐고, 그로 인해 아예 생각의 기본 바탕의 차이가 컸기에 그냥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나고 다음 화부터는 다시 근육 숙녀들의 개그물이었기에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영상 세팅을 바꾸고 얼른 다른 채널로 돌렸다.
“뉴스나 보… 어? 이게 뭐야?”
TV에서는 마침 갑작스러운 기습 발표가 나오고 있었는데, 그것은 유성원에게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