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같은 시각, 평양.
아크데몬 비스트 프르제발스키는 현재 압도적인 전황임에도 심히 불쾌해하고 있었다.
코어 던전을 지키는 사도 중 하나로서 그 자존심의 상징인 신마승천(神馬昇天)까지 해 가며 얻은 승리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 혼자가 아니라 수많은 ‘형제’들까지 함께한 만큼 오히려 불쾌할 정도의 상황이었는데, 그를 더더욱 불쾌하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을 이렇게 화나게 만든 놈이 지금 어느 전장에서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푸르르르륵! 어이, 박숙자, 어째서 놈이 없지?]
“아~ 한창 즐겁게 사냥하는 중인데… 네? 예? 놈요? 누구요?”
[그 황금색 인간 놈 말이다! 황금 용 타고 다니는 그놈! 왜 그놈이 안 보이냐고!]
“그걸 제게 물으셔도… 그러게요. 왜 없지? 어디 감춰 놨나? 아니면 북쪽에 갔나?”
봉황승천을 사용한 형제 레그혼을 죽인 놈이자, 자신들에게 굴욕을 준 황금의 기사 유성원의 존재.
자신을 포함한 형제 모두의 승천을 개방한 것은 이번에야말로 그놈을 없애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함이었는데, 막상 전장에 나오니 그 망할 황금 갑옷을 입은 놈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기껏 박숙자를 불러서 물어봐도 그녀 또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 연락을 넣어서 알아보겠습니다, 프르제발스키 님.”
딱 봐도 분노하는 게 보이는 만큼 박숙자는 눈치껏 전화기와 무전기를 꺼내 들고는 다른 스캐빈저와 부하들에게 다급히 연락을 해 보았다.
그리고 딱히 엄중한 비밀 같은 건 아니었다는 듯 유성원이 왜 전쟁에 나오지 않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프르제발스키 님, 그놈은 이미 이 전쟁을 계획할 때, 그곳 회의장에서 개판을 쳐 놔서 참여 안 하게 되어 있었답니다.”
[푸르륵, 뭐라고?]
“그러니까 애초부터 이번 공격에 참여하지 않는 거였습니다. 아마 다른 던전을 갔을 거라고 추정되는데… 그거까지는 잘 모르겠다네요.”
[푸르르르르르륵!]
그러자 더더욱 투레질을 하면서 분을 삭이는 프르제발스키였다.
자신은 저따위 인간들을 상대하려고 승천을 사용한 게 아닌데!
정작 승천해서 잡을 목표였던 놈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어이가 없고 분노가 더 치솟을 지경이었다.
[푸르르륵! 좋다.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저 망할 인간들을 전부 다 없애고 남쪽으로 쳐들어가! 이 작은 반도를 모조리 도살왕 님의 영토로 만들어 주지! 박숙자, 가라! 모두 쓸어버려라!]
“푸하하하핫! 말하면 입만 아프죠! 물론입니다! 위대한 도살왕 님의 사도이시여!”
그렇게 박숙자는 다시 땅으로 내려가 군인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여느 전쟁터나 참혹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인간’의 고기를 노리는 도살왕의 세력들이 참여한 전쟁은 더더욱 참혹했다.
“으아아아! 으아아아악!”
“김 병장니이이이임!”
[쩝쩝… 간만에 포식이다. 무우우!]
도살왕 계열 몬스터들의 경우 전투와 식사를 동시에 하면서 진행할 때가 많아서 전장에서 산 채로 먹히는 걸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즐비했다.
아무리 마정석 탄환과 전차 등등으로 분전해도 도살왕의 직속 사도급 몬스터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아서 결국 헌터들이 처리해야만 했지만, 몬스터를 상대하는 걸 쉽게 놔둘 스캐빈저들이 아니었다.
“야, 뭐 해? 빨리 보호막을!”
“아아악!”
“젠장! 또 스캐빈저인가? 보이지가 않으니! 제기랄!”
“누가 좀 도와줘! 진형 무너진다아아!”
던전 공략과 레이드에 빠삭한 헌터들이라곤 해도 주변 숲이나 폐허가 된 도심, 그리고 물밀듯이 몰려오는 도살왕 계열 몬스터들 사이를 누비면서 석궁으로 저격을 해 대는 스캐빈저들을 막기란 어려웠다.
그냥 몬스터를 상대로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스캐빈저들이 사격과 암살로 괴롭혀 대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에 헌터들도 어떻게든 자신들의 스킬이나 성좌의 가호, 그리고 각종 능력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상대하기 만만치가 않았다.
“순순히 위대하신 장군님과 수령님의 제물이 되렴! 너희 모두를 바쳐서 나는 그분들이 만드는 강성 대국의 제1당원이 될 것이란다!”
“이… 미친 할망구가!”
“여기도 있습니다만? 휴휴~ 도망 다닙시다~”
“이 개새끼들아아아!”
그리고 이 헌터들과 군대의 희망이 되어야 할 최강의 헌터인 청룡 길드의 S급 헌터들은 S급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은 고사하고, 언더시티 지배자급 스캐빈저들이 아군 진영을 휘젓고 다니는 걸 막기에도 급급했다.
리미주, 곽원호, 그리고 프르제발스키에게 보고를 마친 박숙자 이 셋은 철저히 S급이나 A급 헌터들을 피해 도망만 다니면서 다른 약소 헌터나 군대들 내부에 침입해서 혼란을 키우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이들은 겉으로는 호흡을 맞추는 것처럼 보여도 그냥 서로를 이용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끔 싸움을 진행하였다.
“개성으로 후퇴한다. 이대로는 피해만 늘어나고, 늘어난 피해는 곧 스캐빈저의 강화를 도울 뿐이다. 그리고 올림푸스 길드의 헌터들에게도 진격을 멈추고 개성으로 향하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근데 그러면 던전 안에 들어간 헌터들은…….”
“그럼 지금 이 상황에서 더 희생만 만들 생각인가? 어서 전하게.”
최악으로까지 몰린 상황에서 고천수는 군대와 헌터들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개성으로 후퇴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최대한 전력을 한 군데로 모은 다음 도주를 하든 아니면 총력전을 펼치든 해서 활로를 찾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한 그는 빠르게 후퇴를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군은 왔던 길을 돌아서 패주를 시작했지만, 뒤에는 아크데몬 비스트 와규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직선으로 도망치지 못했고, 결국 양 갈래로 갈라져서 돌아서 도망치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일사불란하게 도망쳐도 퇴각은 희생이 큰데, 제대로 된 장비나 마정석 전차, 트레일러 등이 없이 갈라져서 도망치니 희생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인간 사냥이 특기인 스캐빈저는 도주하는 인간들을 쫓으며 좀 더 사냥 같아진 이 순간에 즐거워한다.
도망치는 적들을 쫓는 건 스캐빈저들의 주특기였기에 대부분의 군인들은 제대로 도망치지 못하고 덫이나 스캐빈저들의 석궁에 잡혀서 어김없이 도살왕의 제물이 되어 버렸다.
결국 평양을 공격하기 위해 갔던 병력들은 반나절 뒤에야 개성에 도달할 수 있었고, 헌터와 병사 모두 포함해서 살아남은 이는 고작 기존 병력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 개성에 도달했음에도 아직 싸움이 멈춘 건 아니었다.
이미 후방에는 산처럼 거대한 오리 괴수인 덕덕과 마력 장벽을 치고 있는 이베리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나은 소식은 바로 올림푸스 길드들과 함께 움직인 병력은 큰 피해 없이 합류했다는 것이지만, 아직 전황은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은 심각한 상태 그대로였다.
***
B급 던전, 야만의 도시 ‘꿈바꿈바까라라’ 왕의 투기장.
쿠우우우우웅!
전신을 쇳덩어리로 무장한 거대한 거인인 ‘투기장의 왕’이 무기를 떨어뜨리며 그대로 투기장 바닥에 쓰러진다.
그리고 쓰러진 그의 몸 위로 나타난 것은 바로 이곳의 새로운 왕, 황금 갑옷을 입은 유성원이었다.
그는 피와 뼛조각이 묻은 티탄의 말뚝을 털고 당당히 서서 야만인들의 환호성을 듣고 있었다.
[여러분! 드디어 이 투기장의 새로운 왕이 탄생했습니다. 이제 그는 ‘겁쟁이 황금 깡통’이 아니라, ‘황금의 왕’으로서 이 투기장의 주인이 된 겁니다. 막강한 힘으로 모든 상대를 이기고 올라온 그의 무용을 찬양하라! 오오오! 새로운 왕이여! 어서 옥좌에 오르소서!]
[선택:보상을 얻고 새로운 투기장의 왕 되기 or 보상을 받고 던전을 나가기]
“나가자.”
던전 클리어 조건을 채웠고, 보상과 경험치는 모두 챙겼기에 유성원은 더 고민 안 하고 나가기를 선택했다.
아쉽다는 메시지가 길게 나왔지만 무시한 채 쓰러져 있는 전(前) 투기장 왕의 시체에서 물건들을 챙기고 신소미, 신아영과 함께 투기장 밖으로 향한다.
“역시 그래도 최종 보스는 최종 보스라 빡세네.”
“마지막에 와서야 정상적인 파티 전투를 한 게 빡센 거라고요? 다른 헌터들이 들었으면 양심 없다고 했을걸요? 그치, 엄마?”
“그래도 하나라도 제대로 싸워서 잡은 게 어디니?”
투기장을 나서면서 마지막 보스였던 투기장의 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세 사람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보스라고 꽤 강했던 덕분에 제대로 파티 플레이 호흡도 맞춰 볼 수 있었고, 거기다 유성원은 던전 클리어 보상을 얻어서 다행이었다.
[훌륭한 승리였다. 투기장에서! 그대는 상대의 비겁한 수를 이겨 내고 명예와 용맹을 드높였으며, 금전과 권력을 얻을 자리를 스스로 버리고 물러서는 겸허함까지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기사도의 귀감이로다!]
[던전 클리어 보상:보상 선택 1회]
“B급 던전에서 보상이라니……. 이건 확실히 엄청난 이득이지. 휴우~ 70레벨 될 동안 하나도 못 얻나 싶었는데, 다행이야.”
“아저씨가 과하게 세서 그렇다니까요.”
“그렇지. 그래. 아무튼 보하쿠 놈 잡기 전에 하나라도 받았으니 좋다는 거야.”
기존에 있던 여분 스킬 1개, 70레벨로 받은 보상 1회와 이 투기장 던전에서 얻은 보상 1회, 합쳐서 3개의 여유가 생겼다.
그에 유성원은 다시금 스킬을 체크해서 천검군을 더욱 강하게 만들 생각을 하며 던전 밖으로 나왔다.
현재 밖에서는 유성원 일행이 나오자마자 야생 동물의 습격이나 공격을 받지 않도록 천검군 고블린 병사들이 트레일러 근처를 수호하는 중이었다.
[폐하께서 나오셨다! 전구우우우우우운! 폐하에 대하여! 예를 갖춰라!]
[천검!]
[천검!]
“…유청 녀석, 고블린들을 얼마나 굴린 거야? 대체……. 쟤네 어학 능력이 그렇게 안 좋아 보이는데, 이젠 무슨 한국어 박사가 다 됐네.”
“필요한 언어만 익히게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폐하. 아무튼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옵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도열해 있는 고블린 천검군들을 보자마자 유청이 뒤에서 슥 하고 나타났다.
아마 사전에 포탈이 나타날 부분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리라.
참 예의 하나는 제대로 지키는 녀석이었다.
“던전 다녀왔어. 안에서 얻은 마정석이랑 각종 소재 꺼낼 테니까 정리해 줘.”
“알겠습니다, 폐하. 한데… 아이언 포트리스에서 백가연 어르신에게 긴급한 연락이 와 있습니다. 던전에서 나오는 대로 시급히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긴급? 아~ 그것참 불안하기 짝이 없는 소리네. 씁. 하지만 급하다니 무시할 수 없지. 빨리 가자.”
불안한 느낌을 잔뜩 안고, 유성원은 그대로 트레일러를 타고 성좌 산거정의 영역을 빠져나가 신강남을 가로질러 아이언 포트리스로 향했다.
그리고 아이언 포트리스에 도착하기 전 이미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또 보통 사태가 아닌 것을 감지하고는 차를 돌려야 하나 고민에 빠진다.
“또 뭔 일이래? 이 새끼들…….”
“큰일이 생길 법한 일이 달리 있을까요? 저것 같은데 말이죠.”
“…하아~ 염병.”
의문을 품던 중 신소미가 가리킨 방향에서 흐릿하지만 무언가 반투명한 푸른 벽이 솟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북쪽에 생긴 마력의 벽.
자연히 어떤 일로 인해 생겼는지 대충 예상이 간 유성원은 한숨을 깊게 쉬었다.
보나마나 북쪽에 쳐들어간 놈들이 개처발렸고, 총 소집 회의에서는 쫓아낸 주제에 이제 와서 자신에게 소방관 역할을 시키려고 몰려온 게 뻔한 상황이었다.
내막을 알고 나니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그럴 수 없기에 한숨만 쉬며 트레일러와 함께 아이언 포트리스로 들어가는 유성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