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협회 본부 입구.
그리고 이래저래 한창 바쁜 협회 입구에서는 또 다른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백가연으로, 그녀는 이 루트, 저 루트 어떻게 해서든 아크데몬 비스트들에 대한 조언을 전하기 위해 용을 썼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죄다 거절당하거나 의도적으로 그녀를 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니, 왜 들어가지 못한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지금 매우 중요한 작전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는 거지? 나마저 그 친구와 같은 취급을 받을 정도란 말인가?’
유성원의 깽판이 심했던 건지 아니면 중재 좀 제대로 해 달라는 것을 무시하고 계속 유성원 편만 든 그녀가 괘씸했던 건지, 어느 쪽의 비중이 높은지는 몰라도 지금 협회와 정부, 길드 모두 그녀의 이야기를 듣지 말라고 지령이라도 내려놓은 듯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내 발언을 들었다고 한다면 승리 이후 압박을 넣기 힘들어서일지도 모르겠군.’
이렇게까지 막을 이유가 없는데, 좀 더 생각해 보니 협회와 정부의 또 다른 의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승률 높은 싸움이기도 하니, 자신의 조언을 괜히 들어서 이익이 되었다고 하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주기 싫은 것이었다.
이번 싸움에 이어서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까지 보여 주는 행동이기에 더 이상 무얼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였다.
‘…그러면 하다못해 그들이 잘해 나가길 빌어야겠군.’
위이이이이잉!
이제 남은 건 그들이 건투하길 비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하늘로 높게 날아가는 청룡 길드의 전용기를 바라본 다음 협회에서 물러났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이언 포트리스로 가서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뿐이었다.
***
평양 언더시티, 금수산 태양 궁전.
두 번째 공군과 미사일 폭격으로 한층 더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금수산 태양 궁전.
김씨 일가를 위해 인민의 고혈을 빨아 만든 궁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곳곳에 있던 동상과 석상은 흔적만 남은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나 스캐빈저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모두 살아남아 한곳에 모여 여유 있게 떠드는 중이었다.
애초에 미사일 정도로 죽을 놈이었으면 이 평양에서 사는 게 아니라 노예가 되어 있어야 정상이었으니 말이다.
박숙자 또한 당연하다는 듯 살아남아 폐허의 옥좌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옆에서 한 아줌마가 땅을 치며 울고 있었다.
“어엉어어엉, 아이고! 아이고! 우리 장군니이이이임! 아이고오오오!”
“푸하하하하! 야이 미친 아줌마야, 왜 울어? 느그 장군님들, 진즉 도살왕 님 제물 되었잖아.”
“이 망할 년이! 너… 내가 장군님 묘역이랑 여기 관리 잘하라고 그리 말했을 텐데?”
“얼씨구, 지럴헌다. 이 아지매야. 내가 이 폭격이랑 공격을 어떻게 막냐? 나도 때려 부수는 거 전문인데. 억울하면 네가 막아 보든가?”
박숙자를 노려보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은 함흥 언더시티의 지배자인 리미주. 열성적인 북한 공산당 지지자 출신으로 당 간부직을 역임한 여성이었다.
그러다 각성자 사태가 일어나고 그녀에게 절대적 존재였던 북한 정권이 붕괴되면서 정신이 미쳐 버렸는데, 성좌 도살왕의 목소리를 신으로 승천한 친애하는 수령님과 장군님의 목소리로 착각하고 함흥에 그분들을 모시는 신전을 세운 자였다.
“가만두지 않겠어! 수령님과 장군님의 성지(聖地)를! 감히 이렇게 만들다니! 도저히 용서치 않는다!”
“아, 글쎄, 그것들 이미 뒈졌다니까…….”
“수령님과! 장군님은! 영원불멸! 절대무적의 존재이시다! 지금도 두 분은 나에게 조국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그 순수한 광기의 믿음으로만 치면 이 목사에게도 밀리지 않는 리미주였지만, 그녀의 목적은 오로지 수령님과 장군님을 모시는 것이었기 때문에 보통은 신전에 처박혀 있거나 도살왕의 계시가 있을 때만 움직이곤 한다.
“와, 이거 평소 만나기 힘든 분들이 다 계시니까 놀랍네요. 그나저나 엄청 쏴 대네요. 진짜 작정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오~ 우리 귀염둥이 원호 왔냐?”
“와야죠. 누구 명령인데요. 게다가 비상사태이구요.”
그다음 나타난 것은 망토와 레인저 전투복을 입은 실눈의 20대 청년으로, 원산 언더시티의 지배자인 곽원호였다.
겉으로는 친한 척 인사하고 있었지만, 언제든 서로의 뒤통수를 치거나 배신을 할 수 있는 관계라서 속으로는 자기 이득을 계산하기 바빴다.
아니면 아예 이익 계산이나 배신 같은 건 생각도 못할 정도로 정신줄을 놔 버린 족속이거나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를 부르신 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우루루 몰려가서 인간에게 개 맞듯이 맞고 도망치신 사도님 말이죠.”
[푸르르륵!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인간.]
곽원호가 자신들을 부른 도살왕의 사도 아크데몬 비스트가 없음을 빈정대던 그때, 하늘 위에서 짐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에 천사와 같은 날개가 달린 새하얀 백마의 수인. 기존의 인상과 다른 새하얀 법의를 걸치고 빛의 아우라를 몸에 두른 프르제발스키였다.
이것이야말로 프르제발스키가 가진 비장의 카드, 신마승천(神馬昇天)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요 입이 방정이라.”
[푸르륵! 지금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그 쓸모없는 말을 하는 주둥아리를 찢어 버렸겠지만 참도록 하지. 불명예한 일을 한 건 사실이니까. 아무튼 박숙자, 놈들의 움직임은?]
“예. 푸하하하, 지금 두 번째 포격이 온 거 보면 이제 평양으로 막 달려오려고 할 겁니다. 우리 계획대로죠. 휘유~”
박숙자는 입에 담배를 물면서 신마승천을 한 프르제발스키를 바라보았다.
아크데몬 비스트들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승천의 힘.
본래라면 성좌 도살왕의 코어 던전을 지키기 위한 힘이었지만, 저번 싸움으로 굴욕을 겪고 이 목사가 아크데몬 비스트로 승천한 것 때문에 지금 그 모든 것을 개방하고 전장에 나서게 된 것이다.
[푸르르륵! 이번에야말로… 꼭 굴욕을 되갚고… 더 많은 포식을! 더 많은 피와 고기를! 그분께 바치리라! 우리 모두는 준비되었다, 박숙자.]
“예. 그러면~ 신호 올라가면 예정대로 해 주시면 됩니다, 프르제발스키 님.”
[좋아. 그런데… 푸르륵! 우리의 새로운 형제, 이 목사는 어디로 갔지?]
“그 할배요? 지금 옛 핵미사일 연구 시설에서 뭔가를 계속 연구하고 있을 겁니다.”
[푸르륵, 연구? 뭘 연구하는데?]
“그건 저도 모르죠. 푸하하! 그 양반 정신세계를 어떻게 이해합니까?”
프르제발스키도 고개를 슬쩍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한다.
인간 목장 같은 걸 만드는 초월적 광인이니 새로이 꾸미는 일도 분명 상상을 넘어선 일일 것이다.
아무튼 계획한 대로 적들을 평양까지 끌어당기는 데 성공했으니 남은 건 하나.
모조리 사냥해서 잡아먹고 도살왕에게 바쳐 강해지는 일뿐이었다.
“지금 숨어 있는 애들이랑 여기까지 와 준 애들 등등… 전파할 수 있는 데는 다 전파해라.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고~ 비장의 수까지 쓰신 우리 위대한 사도! 아크데몬 비스트 님들까지 나서 주시니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 들어온 놈들을 절대 도망치게 두지 말고! 모조리! 사냥해라!”
[푸르륵! 우리 또한 사냥을 위해 전장으로 향할 것이다! 나와라. 내 ‘무리’들이여!]
“우오오오오오!”
박숙자의 외침과 함께 스캐빈저들은 각자 흩어져서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프르제발스키가 손가락을 튕기자 포탈이 열리면서 그 안에서 말의 머리를 한 수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승천의 힘을 쓴 것을 비롯해서 자신의 부하들까지 동원한 총력전이었다.
“아, 그리고 도망치지 못하게 이베리코 님과 덕덕 님이 이제… 개성에 나타나 조치를 취하실 겁니다. 흐흐흐. 그러니 다들 사냥 즐겁게 하시길! 아, 나도 가야지. 푸하하핫!”
그리고 이야기를 마친 박숙자도 언더시티 지배자라는 자리에서 내려와 한 사람의 스캐빈저로서 ‘고기’ 사냥을 하기 위해 달려 나간다.
그런 그녀의 뒤를 리미주, 곽원호가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언더시티 지배자끼리 한 그룹이 만들어진다.
언제나 협력이라는 걸 모르는 스캐빈저들이지만, 일단 ‘자신’이 사냥을 하기 쉬우려면 같이 움직이는 게 좋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에 서로 슬쩍 노려보기만 하고 평양으로 다가오는 군대를 향해 달려간다.
***
원산 언더시티.
거리가 있어서 도달이 좀 느린 원산 쪽은 올림푸스 길드가 담당해서 던전 클리어 및 S급 몬스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강원도 쪽에서 북상한 디오메디아와 트리토니아스는 크로노스 비행정에서 대기하면서 던전을 도는 길드와 언더시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러나 군사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던전 처리도 순조로웠기에 그들이 나설 차례는 오지 않았고, 한참을 지도와 상황을 보며 토의하는 게 다였다.
“음… 역시 이거 함정 냄새가 엄청 나는걸? 안 그래?”
“보기엔 원산, 함흥으로 해서 바다로 도망치려는 것 같은데…….”
“에이~ 그냥 미사일로 공격해서 물고기 먹이로 만들면 그만이지만, 돌아서 내륙으로 상륙해서 깽판 치려나? 으음~ 각개격파하면 결국 독 안에 든 쥐 꼴 나는데 말이지.”
“모르지. 일본이랑 연락이 되어서 각성자로 받아 줄 가능성도 있잖아.”
“으음~ 그래도 무법자는 아니… 어? 뭐야?”
쿠구구구궁!
그렇게 토의를 하던 중 갑자기 하늘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비행정에 있는 기계들이 각종 경고음을 쏟아 내었고, 곧 창밖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푸르게 빛나는 빛으로 된 벽이 대한민국의 대지를 가르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저거? 방어막? 세상에, 미쳤나? 누가 저, 저만한 스케일의 대마법을? 야! 빨리 마법사들 깨워서 체크하라고 해 봐!”
“이미 하고 있대! 다들 조짐이 있을 때 진작 깨어나서 찾고 있는데… 글쎄, 일단 마법 장벽인 건 확실하다고 하고, 길이가 약 250킬로미터, 높이 1만 미터. 대한민국의 허리를 끊고 바다까지 뻗어 나가는 크기! 시작점은 개성 아래!”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아무튼 마법 장벽이면 결국 마력량에 따라 강도와 지속 시간이 정해지니까… 이 정도 규모로 시전한 거라면 얼마 버티지 못하거나 아니면 강도가 엄청 약할 거야. 그러니까…….”
“이 장벽, 마력량 측정 불가야. 만약 손대거나 부수려 하면 오히려 저 장벽에 있는 마력량 때문에 역으로 리바운드가 돼서 폭발이 일어날 거야. 절대 손대지 마! 통과하려고도 하지 말고! 마력량에 짓눌려서 찌부러질 거야!”
갑자기 생긴 엄청난 마력의 마법 장벽.
통과나 파괴는 꿈도 못 꿀 스케일의 마법 장벽을 만든 것은 바로 아크데몬 비스트 중 유일한 마법사 타입인 돼지 수인 이베리코였다.
그가 가진 비장의 카드는 바로 식욕승천. 식욕을 마력으로 전환한 것으로, 당연하지만 무한한 식욕을 가지고 있다면 무한한 마력을 지니게 된다.
개념적 ‘무한 마력’. 이베리코의 마력은 이 마력 장벽을 시전한 그가 스스로 멈추지 않는 한 우주의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꿀꿀, 놈들을 가뒀다. 꿀꿀. 아무튼 사냥이나 해라. 덕덕! 고기… 나도 더 많은 고기를 원한다! 꿀꿀!]
하나 아쉬운 것은 이런 ‘무한 마력’의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도 이베리코의 마법사로서의 지혜나 능력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수식이 복잡한 마법은 쓰지 못하고 오로지 초급 마법만 사용할 수 있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한 마력이 된들 이런 식으로 단순한 마법의 스케일을 키우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무시무시했지만, 만약 그가 고위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면 아마 이 지구는 예전에 멸망하고도 남았으리라.
[꽉꽉, 보채지 마라. 꽈악! 인간들 온다. 꽉!]
그리고 푸른 마력을 방출하며 마법을 시전하는 이베리코의 옆에 있는 또 하나의 아크데몬 비스트. 바로 오리 머리를 한 수인인 덕덕으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자였다.
그는 장벽의 시전에 놀라서 자신들 방향으로 조사하러 오는 인간 군대와 헌터들을 바라보곤 이베리코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힘을 개방, 승천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꽈아아아아아아악!]
덕덕이 포효를 하며 힘을 개방하자, 그의 몸은 빠른 속도로 커져 갔다.
그의 승천은 바로 비대승천(肥大昇天).
쉽게 말하면 거대화로, 본모습 그대로 크기가 계속해서 커지기 시작해 키 1,000미터짜리 거대 오리가 탄생한다.
말 그대로 거대 괴수의 강림이었던 것이다.
“뭐, 뭐야, 저거? 대체? 거대 괴수라고? 무슨 울트라맨이냐?”
“당황하지 마라! 크기만 커졌을 뿐 저렇게 크면 결국 느릴 테니 화력으로 다리를…….”
“느, 느리지 않습니다! 산이! 산이 달려옵니다아아아아! 헌터! 헌터를 불러어어어!”
쿵쿵쿵쿵쿵!
그리고 그 거대해진 오리 수인 덕덕은 물리 법칙을 무시한 채 미친 속도로 당황해하는 군인들을 향해 입을 벌리고 달려오고 있었다.
충격과 공포에 질린 군인들은 헌터를 불렀지만, 충격을 먹은 건 바로 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상식을 초월한 괴물의 연이은 등장에 경악한 것이다.
“저게 시발… 뭐다냐?”
“야, 야! 빨리 청룡 길드 불러! 청룡 길드!”
먼 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했기에 사태 파악은 쉬웠지만, 사태를 파악했다고 해서 해결법이 꼭 나오리라는 법은 없었다.
이베리코가 마법으로 퇴로를 막은 사이, 덕덕은 압도적인 크기와 질량으로 군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둘만이 아니라 둘을 따르는 돼지 수인 몬스터와 오리 머리의 몬스터들이 수백 단위로 나타나서는 자신들의 영토에 들어온 인간들을 도륙해 나갔다.
이제부터 일방적인 성좌 도살왕과 스캐빈저의 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