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히페리온 타워, 1층 편의점.
“하아~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법이지. 아~ 맛있겠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히페리온 타워 1층 한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편의점.
그곳에서 유성원은 귀찮은 양복을 벗어 던지고 후드 티에 청바지로 갈아입은 채로 참치마요 삼각김밥과 컵라면, 구운 계란, 소시지를 사서 데우는 중이었다.
SS급 헌터인 그라면 마련된 대기실에서 전담 셰프를 불러 무엇이든 조리시킬 수 있었지만, S급 헌터들 이상이 모인 회의장에서 그 난장을 까 버리고 왔으니 낯 두껍게 시킬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디론가 멀리 갈 줄 알았는데… 기껏 온 게 편의점인가?”
“실컷 내질렀더니 배가 고프더라고요. 아무튼 저도 사람인데… 먹고는 살아야죠. 먹고 나면 갈 겁니다. 오, 다 됐다.”
내려온 백가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유성원은 전자레인지에서 다 데워진 김밥을 꺼낸 다음 다 익은 컵라면 뚜껑을 열고 후루룩 먹기 시작한다.
근래 아칼론을 비롯해서 주변에서 식사를 제대로 챙겨 주다 보니 오랜만에 먹는 인스턴트식품의 맛이 자극적이라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것을 먹으면서 유성원은 백가연에게 들으라는 듯 혼자 떠들기 시작한다.
“후루룩… 뭐, 제가 늘 말했잖아요. 저는… 후루룩… 결국 각성자라는 요소랑 이 망할 갑주 하나 빼면 모자란 놈 하나뿐이에요. 아, 아무튼 쓸데없이 깽판 놓고 나와서 죄송하네요. 그렇게 한다고 말을 들어 처먹을 놈들이 아닌데. 푸하하핫.”
“후우~ 그래, 다들 알면서 실수하는 법이겠지.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어떻게 하긴요. 던전이나 가려고요. 아직 국내에 남은 A, B급들 던전들도 꽤 있으니까요. SS급 경쟁자도 생겼으니 앞으로 부지런해져야겠죠. 저 인간들 하는 꼴을 봤으니 나도 할 수 있는 한 더 레벨 업을 해야 절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이거 다 먹고 즉시 갈 거예요.”
깽판으로 마무리된 총 소집이었지만 유성원의 의욕 가득한 눈빛을 보면 큰 성과이리라.
던전 내에서 쉰다고 뒹굴거릴 때의 그 나태함은 일절 없고, 의욕으로 가득 차서 불타오르는 상태였다.
뭐, 다른 사고 칠 생각 안 하고 던전을 도는 행위라면 딱히 문제 될 게 없기에 백가연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군. 자네 행동에 대해서는 이 이상 뭐라 하지 않겠네. 다만 성좌 도살왕의 사도들과 제대로 싸워 본 ‘헌터 유성원’에게 의견을 몇 개 묻고 싶군.”
“…뭐, 그런 건 괜찮죠. 마음대로 하세요.”
“아까 작전 내용에 대해서는 들었을 걸세. 지금이 공격하기 딱 좋은 호기라는 걸 말이야. 성좌 도살왕 영역 내부 다툼이 있는 상황. 그리고 성좌 용봉왕과 러시아 헌터군과 협력해서 각각 3면 공격을 하면 남은 7마리의 사도 아크데몬 비스트들이라곤 해도 상대하기 힘들 걸세. 이거 어떻게 생각하나?”
“두말할 거 없이 좋은 전략이죠. 7마리가 남았는데 배분을 하든 한쪽 전선에 몰려가든 어떻게 해도 상대하기 좋죠. 상대 보고 빼면 그만이니까요. 저 같은 무식쟁이도 알 수 있을 만큼 좋은 전략인데, 다만…….”
“다만?”
“다만 우리 기사들도 알려 주고, 저 정부랑 협회도 알고, 심지어 저 같은 놈도 이해하기 쉬운 전략이라면 상대도 모를 리가 없다는 문제점이 하나 있고… 다른 하나는 아크데몬 비스트들이 가진 비장의 카드를 아마… 우리 쪽이 모른다는 거죠. 혹시 어르신, 놈들이 사용하는 ‘승천’ 보신 적 있나요?”
아크데몬 비스트 레그혼을 상대했을 때 보았던 봉황승천.
놈들이 가진 이른바 비장의 수단이자 필살 기술로, 그냥도 강한 S급 몬스터였던 놈들이 월등히 강해지는 비기였다.
“청룡 길드에서 다른 아크데몬 비스트, 고트맨을 잡은 것도 보니까… 걔도 승천 스킬을 안 썼더군요. 뭐, 레그혼 그 닭대가리가 말하는 걸로 봐선 함부로 사용하는 건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인 것 같지만요. 그놈에게 일대일로 죽을 뻔했었죠.”
“자네가 일대일로 죽을 뻔했다고?”
“예. 뭐, 지금보다 좀 약할 때이긴 한데… 아무튼 걔네도 비장의 수단이 있으니까 조심해야 할 거예요. 렘렘의 카운터 렘실드 같은 수단도 있을 겁니다.”
“알았네. 그러면 자네는 자네대로 가 보게나. 나는… 올라가 보겠네. SS급 헌터의 조언이니 무시하진 않겠지.”
올라가겠다는 백가연의 말에 유성원은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놀란다.
자신만큼이나 세상에 실망했을 사람이 저 백가연 어르신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총 소집 회의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저는 절대 못 따라 할 거예요.”
“그렇지. 하하하, 나는 평생 이렇게 살아서 말이지. 이제 와서 태세 전환하려니 두드러기가 나서 그래. 허허허.”
백가연은 그대로 편의점을 떠나 엘리베이터로 갔고, 유성원은 먹고 난 쓰레기를 치운 다음 휴대폰으로 신소미에게 연락하며 ‘히페리온 타워’를 나선다.
유성원은 대략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아마 자신이 빠져도 협회와 정부는 기존의 성좌 도살왕 세력에 대한 공격 작전을 진행할 거라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리고 타워를 올려다보면서 정말로 내키지는 않지만 그들이 선전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처발리면… 나한테 귀찮게 칭얼댈 게 분명하니까. 기왕이면 덜 귀찮게 이겨라, 이겨.’
***
평양, 언더시티.
‘평양 언더시티’. 옛 북한 정권의 수도인 만큼 도로 및 인프라,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건물 등등이 있어서 언더시티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곳이었다.
곳곳엔 스캐빈저들과 기존 북한 주민들이었던 노예들이 돌아다니면서 각자 일을 하고 있었고, 지성이 있는 성좌 도살왕의 고위 몬스터들이 심심치 않게 돌아다니면서 같은 성좌를 섬기는 인간들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
[어이… 인간 고기… 가격… 크르륵… 너무 올랐다. 마정석… 너무 든다… 크르륵…….]
“그야 정기적으로 공급해 주던 인간 목장이 망해서 어쩔 수 없이 올랐습니다요.”
[이 목사는… 크르륵… 대체 뭐 하는 거냐? 아크데몬 비스트가 되는 은혜를 입었으면서!]
“그걸 저희가 어찌 알겠습니까? 아무튼 마정석이나 주십시오.”
투덜대면서 거래하는 스캐빈저와 악마 몬스터였다.
그리고 평양의 중심이자 지배자가 있던 주석궁, 정식 명칭은 ‘금수산 태양 궁전’인 이곳은 이제 김씨 정권을 신격화하는 곳이 아니라 이 평양 언더시티의 지배자인 스캐빈저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오오, 이거 진짜 이 목사야? 승천했다더니 진짜 아크데몬 비스트가 되었네? 개부럽네. 푸하하하하하핫!”
본래 김씨 부자들이 앉아 있던 집무실 책상은 옥좌로 바뀌어서 지배자를 앉히고 있었다.
경박하게 웃으며 한우 형태의 아크데몬 비스트로 변한 이 목사를 맞이하는 여성.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인이었지만 아쉽게도 얼굴 절반가량은 털로 뒤덮이고, 오른쪽 송곳니가 길게 내려와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육체 또한 옷에 가려져 있었지만 오른팔과 왼쪽 다리가 털과 발톱으로 뒤덮인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그녀가 바로 이 평양 언더시티의 지배자였다.
[음므으으, 육체는 변했지만 내 영혼은 신을 섬기는 그대로라네. 절반의 축복을 받은 자여. ‘하프데몬 비스트’, ‘스스로의 절반을 바친 자’ 박숙자.]
“내 본명 말하지 말라고 했지? 앙? 이 목사, 댁 이름도 말해 줄까? 아앙?”
박숙자.
그녀는 북한 출신 주민의 노예의 후손으로서 본래는 언더시티 스캐빈저들의 노예였다.
당연하지만 스캐빈저들은 어린 여성 노예인 그녀에게 온갖 노역, 학대, 성매매 등등을 시켰고, 나중에 쓸모없어지면 결국 고기로서 몬스터들에게 팔릴 운명이었다.
하나 그녀는 증오하는 스캐빈저들을 이기기 위해 진심으로 성좌 도살왕에게 기도하였고, 그녀의 간곡한 기도를 받아들여 성좌 도살왕은 그녀에게 스스로가 품은 진실한 신앙만큼 자신의 고기를 바치라고 명령했다.
‘여… 여기… 제… 고기를…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아주 독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눈을 뽑아 바치는 것으로 그 신앙을 증명했고, 감복한 도살왕은 그녀에게 새로운 팔과 다리, 눈을 선물해 주었다.
그렇게 얻은 힘으로 그녀는 노예에서 스캐빈저가 되어 이 평양 언더시티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 목사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도 나름 도살왕 계열 스캐빈저들 중에서 엄청 정신 나간 인간 중 하나였다.
“정말이지 대단하다니까~ 그렇게 실패만 하고, 사도님도 셋이나 날려 처먹었는데… 결국엔 승천하다니 말이야. 푸하하하하학! 진짜 어이가 없어. 와, 근데 역시 몸이 커서 그런지 시X, 꼬추 X나 크네. 안 그러냐?”
[여전히 천박하기 그지없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이지. 꼬우면 니가 내 에미가 되시든지. 이딴 식으로 아가리 놀리는 스캐빈저들이랑 뒹굴면서 컸는데! 아가리가 멀쩡하면 그게 더 정신 나간 거겠다. 아무튼 그래서 여긴 뭣 하러 왔어?”
[제1인민 병원과 제3인민 병원 물자, 평양 과학기술대학교, 김일성 대학이 필요해서 왔다.]
“아니, 잘나가는 인간 목장 사업이나 계속하지, 또 뭔 짓거리를 하려고? 그거나 계속해. 인육 공급량 막히니까 안 그래도 싸우던 애들이 더 지랄 났잖아. 애초에 겁나 잘나가던 사업이던데…….”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은 봉사 방법이었다. 하나 그분께서 나를 위해 힘을 쓰셔서 새로운 육체를 주셨으니 나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 아무튼 원하는 것을 내놓아라. 그에 따른 대가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 내가 처분한 ‘인간 목장’의 고기와 노예들을 모두 넘겨주지.]
“진짜냐?”
그가 내놓은 제안에 박숙자는 깜짝 놀라서 옥좌에서 벌떡 일어난다.
이 목사는 성좌 도살왕 휘하 모든 스캐빈저들 중 가장 부유하다고 할 수 있는 자였다.
개성에는 인간 목장을 가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리 많지 않았지만, 기존에 가진 인간 목장만 해도 엄청난 수였기에 인간을 키우고 번식시키면서 고기와 노예들을 엄청 많이 모아 두었을 것이다.
[다 합치면 족히 5천 마리어치는 될 거다.]
“오, 오천 명! 지, 진짜지? 무르기… 무르기 없기다!”
[므우우우, 물론이지. 위대하신 도살왕 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도록 하지.]
“댁이 받은 권능, 내가 모를 줄 알아? 그걸로 맹세하지 말고, 맹세의 스크롤:조건-심장 파괴에다가 맹세하는 건 어때?”
[네년의 심장이 2개인 걸 아는데 그걸 하겠나? 얌전히 거래를 하는 게 좋을 텐데?]
둘 다 도살왕을 진심으로 섬기고 괴물까지 떨어진 인간답게, 이야기 수준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노예들은 물론 휘하의 스캐빈저들까지 질린다는 얼굴을 할 정도로 제정신 아닌 급의 대화가 지속되고, 결국 양측 조건에 맞는 맹세의 스크롤을 가져와서 계약서를 작성하게 된다.
[좋아. 내 수하들을 시켜서 물건은 배달해 주도록 하지. 내 물건은 김일성 대학으로 옮겨 주게.]
“알았어. 지금 바로 부하들 시킬게. 근데…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인간 목장’만 한 게 없을 텐데 말이지.”
[므후훗, 그것은 기밀이다. 그리고… 너희도 알겠지만 내가 죽었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아랫것들에겐 서로 다투라고 명해 두었다.]
“어? 그건 왜?”
[아마 내가 실패한 그 전쟁에 이어서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공격할 때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면 아마 3면에서 몰려올 게다.]
“아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건데! 이 양반아! 몸뚱이가 소가 되니까 대가리도 소 지능이 되셨나?”
좋게 거래를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난데없는 전쟁 예고 소식에 박숙자는 버럭 하면서 그를 노려본다.
나름 자기들끼리 평화(?)롭게 살고 가끔 러시아, 한국, 일본, 중국들(!)로 넘어 다니면서 사고를 조금(?) 치는 게 전부인데, 쳐들어온다는 건 스캐빈저들에게 있어선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아~ 짜증 나아~ 그러면 그 꼴 보기 싫은 새끼들 다 모아야 하잖아. 아아아~ 개 싫다아아아. 이 또라이 같은 인간아, 네가 실패했으면 되는 거지, 왜 자꾸 사고를 치는 건데?”
[당연히 그분을 위한 일이기에 하는 것이지. 내 명성은 꽤 퍼져 있으니까… 죽지 않고 살아 있고, 승천했다는 게 알려지면 놈들은 더 움츠러들고, 방비를 단단히 하겠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방심을 하게 해서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서 처리하는 게 낫지.]
“…아니, 끌어들여서 처리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니걸랑? 마정석과 각종 합금으로 무장한 기계화 부대 상대하는 것도 만만치 않고, 미사일 폭격 처맞고 싶어서 그래? 노예들을 인질로 쓰려고 해 봤자 한계가 있고, 각성자들의 질은 말할 것도 없지. 근데 이길 수 있는 거야? 최근 실패 연속이었으면서~”
이 목사는 최근 두 번이나 연속으로 실패했으니 신뢰가 가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은 그냥 실패만 겪어도 두려움에 몸서리치고 소극적으로 변하기 마련이지만, 이 목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광신(狂信). 신에 미치고, 또 신(도살왕)의 은혜를 받은 그는 자신의 목숨까지 대가로 내놓은 실패를 겪고도 두려움에 위축되는 일 하나 없었다.
자신의 옳다는 것을 신이 증명해 주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신께서 나를 증명하셨다. 그리고 그 증명은 위대한 ‘형제’들의 마음까지 움직였다. 이 세상을 그분의 것으로 만드는 싸움에 ‘진심’을 담게 된 것이다. 이제 ‘형제’들 모두 때가 오면 가리지 않고 각자의 ‘승천’을 하여 ‘진심’과 ‘전력’을 다해 싸울 것이다!]
거룩한 예배를 하듯 선언하는 이 목사의 모습을 기묘하다는 듯 바라보는 박숙자였지만, 그래도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 목사가 말하는 ‘형제’란 곧 도살왕의 사도인 아크데몬 비스트들. 인간을 그저 먹이로만 생각하던 오만한 그들이 이제 ‘전력’을 다해 싸운다는 말에 전율이 올라온 박숙자는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그를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