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아, 왔구먼.”
“긴급할 때 말고는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부른 이유가 뭡니까?”
“긴급한 때이니 불렀지. 중요한 소식을 전하러 왔네. 자네가 진행 중인 의뢰, 이 목사에 대한 걸세. 다른 사건도 많지만 이게 가장 우선이니 말이야.”
“대체 그 인간은 또 무슨 짓을… 박살 나서 깨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난리를… 어엉? 죽었어?”
‘이 목사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서류의 제목을 본 순간 깜짝 놀라는 유성원이었다.
격퇴하긴 했지만 놈은 무사히 돌아간 걸로 아는데, 대체 무슨 요인으로 죽은 것인지 궁금했던 그는 곧바로 서류를 체크한다.
“아, 추종자 간의 분쟁? 게다가 인간 목장의 철거면 거의 그렇게 보이네요.”
“이 목사의 행동으로 무려 3마리나 되는 아크데몬 비스트가 사라졌네. 그만한 실수를 했으니 성좌 도살왕도 화가 날 수밖에 없겠지. 그 전에 다른 추종자나 사도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아무튼 죽었다면 다행이긴 하네요. 그 인간, 진짜 위험해 보였거든요.”
직접 만나 보니 정말 소름 돋게 무서웠던 이 목사였다.
겉으로 보이는 인상은 온화하고 지적인 성직자 할아버지였지만 이미 수만이 넘는 인간을 요리해서 바친 진성 살인마로, 그 눈빛과 광기는 공포물의 악마보다도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냥 위험한 게 아니라, 실제로 이 아시아권 전체에서 손꼽히는 악당이었지. 후우~ 이번 사태만 보더라도 알겠지만 자기 계통도 아닌 다른 스캐빈저나 마인(魔人), 던전의 괴물들을 일제히 봉기시킬 수 있는 놈은 그리 흔치 않네.”
“그놈에겐 그 정도의 위상이 있었다는 거군요. 근데 이러면 내 임무랑 보수는 어떻게 되나요?”
“으음… 꽤 골치 아픈 문제이긴 한데, 일단 협회는 그래도 이 목사의 죽음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 판단을 보류한다더군. 사실 이거 공헌도 분배가 보통 복잡한 문제가 아니거든.”
“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돈 주기 싫은 건 확실히 알겠어요. 음? 이건?”
유성원은 계속해서 보고서를 읽던 중 기묘한 것을 발견한다.
바로 협회와 정부 측에서 낸 일종의 정황 설명인데, 현재 유성원의 계좌가 다시 묶인 것은 사법부 때문이라는 거였다. 이는 신강남의 유력자들과의 커넥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좌가 묶인 것으로 행정부 수반과 국방부, 헌터 협회는 무고하다는 주장이었다.
“내 계좌 묶은 판사랑 또 사법부 안의 인간들 인적 사항이네요? 이걸 나한테 준다는 건 나보고 직접 처리하라는 건가요?”
“…뭐, 그쪽에 가깝겠지. 신강남의 유력자와 의원들의 커넥션 때문에 정부에서 건들 수 없거든. 아마 해결하는 데만 정치적 싸움과 물밑 싸움으로 수개월은 들어갈 테니…….”
“어차피 똥 싼 김에 나보고 처리하라는 거네요.”
“어떻게 할 텐가?”
“자정 작용도 못할 연못이면 썩어서 마르게 놔두는 게 낫죠. 게다가 전 높으신 분들 뜻대로 하기 싫고 말이죠.”
그러면서 잊어버리겠다는 듯 서류를 넘겨 계속해서 보고서를 읽어 나간다.
그다음은 이 목사가 일으킨 사태로 인해 전국적으로 헌터 길드 및 스캐빈저 간에 혼란이 생겨서 다시 질서를 바로잡고 하위 헌터 길드들의 의향을 확인하기 위해 총 소집을 건다는 내용이었다.
“총 소집? 그러니까 다 불러서 뭐 한대요?”
“출석 체크일세.”
“그럼 난 안 가도 되겠네요. 아니면 어르신이 대리 출석 좀 해 주세요.”
“일단 가서 헌터들 분위기 정도는 파악하는 게 어떤가?”
“됐어요. 제가 가 봐야 또 불씨만 키울걸요? 그냥 던전 가서 레벨 업이나 하는 게 가장 속 편해요. 그럼 안건은 대충 끝났으니, 전 이만 갑니다.”
그렇게 유성원은 남은 서류를 체크하고 백가연에게 돌려준 다음 엘드라엔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이제는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유성원의 성격을 종잡기 힘든 백가연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그가 소환한 ‘기사’들 덕분에 저렇게 글러먹은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사실은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힘을 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던전을 떠난다.
“크록베인? 너 뭐 하냐?”
[일광욕… 한다, 주인.]
그리고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다 보니 호숫가에서 알몸으로 엎드려 있는 크록베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체였지만 용인(龍人)이기에 마치 공룡 같기도 해서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뭐, 문제없겠지. 그렇다 쳐도 아칼론 너는?”
[데이터 조각 모음 중입니다, 마스터.]
“그건… 오버 테크놀로지가 되어도 해야 하나 보구나. 가울프랑 섬멸은?”
[둘 다 성소 안에서 대기 중입니다.]
“…으음, 그래. 읏챠, 이번엔 너희 둘이랑 놀아야겠다.”
말과 함께 데이터 조각 모음 중인 아칼론과 일광욕 중인 크록베인 사이에 드러눕는 유성원이었다.
‘논다.’라는 개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크록베인은 엎드린 채로 고개를 슬쩍 돌려서 유성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주인… 그래서… 다음 싸움은… 언제냐? 나는 저번의… 그놈들과… 더 싸우고 싶다.]
“으음, 당분간 그놈들이랑은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자기들끼리 내분한다고 난리여서 안 내려올 것 같아.”
[그럼… 우리가… 쳐들어가면… 되지 않나?]
“뭐 때문에 우리가 사서 고생을 해야 하는데?”
[적의 침략을… 꺾었고… 간부급을… 잡았다. 상황은 유리… 그러니… 재정비하기 전에… 몰아치면… 좋다… 그러니 가자.]
‘무슨 산책 가자고 조르는 강아지 같네.’
유성원의 옷자락을 꾸욱꾸욱 물고 잡아당기면서 조르는 크록베인이었지만, 그가 가자는 것은 산책이 아니라 전쟁이었기에 당연히 거절하는 유성원이었다.
“아니, 난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말이지.”
[그런가… 아쉽다.]
꼬리가 축 늘어지면서 크록베인은 다시 엎드린 자세를 유지했다.
그 모습이 어딘지 안타까웠지만 싸움을 스스로 만들고 싶지 않은 유성원의 성향 때문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누워 있는데, 어느새 성소에서 나온 가울프와 섬멸이 유성원의 근처에 슬그머니 앉았다.
“너네는 왜 나왔냐?”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려서 말이지. 아무튼 기세를 꺾었을 때 공격하자는 크록베인 경의 의견은 잘못된 게 아니라고 보이네만?]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해? 귀찮게. 북한 수복해 봤자 뭐 좋은 게 있다고~”
[그곳에 승리와 명예가 있지 않은가?]
가울프의 한마디에 섬멸, 크록베인, 아칼론 셋 다 고개를 동시에 끄덕인다.
반면 유성원은 기사들이 진심으로 저런 말을 꺼내고 공감하는 게 소름이 돋을 지경으로, 부하들이지만 미쳤나 싶었다.
“…진심?”
“저도 이번만큼은 가울프 경의 말에 동감입니다, 단장님. 누가 봐도 명백한 악(惡)이 저 위에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맞지만…….”
성좌 도살왕부터 해서 그 부하들까지 누가 봐도 훌륭한 악당들이다.
인간을 먹는 몬스터들, 심지어 인간 목장을 만들어서 가축으로 지배하겠다는 야욕까지 완벽.
물론 지금 이 목사는 생사 불명이라 어떤지 모르지만, 그 휘하의 스캐빈저들과 언더시티는 여전히 노예제로 이루어져서 운영되는 건 사실이었다.
“이 ‘별들의 전장’에 기사로서 태어나! 타도해야 할 악(惡)이 있다? 이것만 해도 축복인데! 어리석지 않은 단장을 섬기게 된 것 또한 행운 중의 행운! 단장님! 휴식을 취하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 나가면 부디 사악한 성좌 도살왕의 세력을 토벌하는 걸 생각해 주십시오.”
[크르르! 섬멸 경의 말… 지당하다!]
“으음~ 부정할 방안이 없군. 상황을 보고 한번 생각해 볼게.”
섬멸의 무시무시한 기세와 더불어 다른 기사들이 동조하는 분위기가 보통이 아닌지라 유성원은 차마 단칼에 거절할 수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나가면 총 소집도 있고, 다른 던전을 가서 레벨링도 해야 하는 만큼 하고 싶다고 해서 다른 과정을 무시할 수 없기에 그러다가 잊거나 아니면 다른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넘기는 유성원이었다.
‘무슨 얼어 죽을 도살왕 토벌이야. 성좌의 코어 던전은 S급 난이도란 말이야. 제정신이 아니야, 진짜!’
성좌의 코어 던전.
다른 말로 성좌의 S급 던전, 혹은 성좌의 본거지, 신전 등등 여러 호칭으로 불리는 곳으로 악(惡) 성향 성좌의 핵심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친 게 아닌 이상 거길 왜 가? 어휴! 잊자, 잊어.’
일반 S급 던전의 수준을 넘는 성좌의 핵심이자 존재 의의, 신전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당연히 난이도는 상상 초월이라고 알려진 곳을 가자니 상상만 해도 안색이 파래지면서 고개를 흔들어 필사적으로 잊고자 하는 유성원이었다.
***
그렇게 다시 2주가 지나고 고블린 제국 던전에 들어온 지 총 17일째 되는 날.
유성원은 이때까지 아주 잘 놀러 다니고 있었다.
전자 기기가 없어도 상태창 확장을 통해서 TV, 인터넷 시청이 가능했고, 또 고블린 제국 던전 내를 안전하게 관광 다니기도 했다.
거기에 가끔 실전 감각이 녹슬지 않게 ‘기사’들과 훈련도 한 번씩 하고, 천검군에 들어올 고블린 병사들의 훈련을 돕기도 하니 지루할 새가 없었다.
‘에휴~ 저걸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어르신.”
“왜 그러나?”
“내일 나갈 거니까 아이언 포트리스에 전해 주세요.”
실컷 놀고 있다가 갑자기 충격적인 발언을 한 것에 깜짝 놀란 백가연은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그를 바라보며 다시 묻는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나갈 거니까 전해 달라고요.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일해야죠.”
“아, 아니… 그동안은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더니…….”
“그야 덜 쉬었으니 그렇죠. 이제 슬슬 레벨 업 생각도 나고, 소미 누님이랑 아영이 레벨도 올리고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또, 이 목사는 없어졌어도 도살왕네 세력은 여전히 건재해서 불안하고…….”
유성원이 겪는 불안은 소시민들이 흔히 겪는 불안이었다.
처음 쉴 때는 좋지만, 편히 쉬면 쉴수록 가슴속에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조금씩 새록새록 솟아나다가 결국 다시 일을 하게 되는 것.
원래부터 풍족이라는 것과 거리가 먼 체질이라 이런 불안을 견디기 힘들기도 했고, 각성자로서의 강함은 또 아직 한계점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결국 스스로 나가고자 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일단 나가면 총 소집인지 뭔지부터 해야 하니까 그렇게 알고, 나갈 준비들 해.”
‘허허, 기우였구먼.’
이대로 평온 속에서 망가지거나 모든 걸 내팽개치면 어쩌나 불안했던 백가연은 그의 결심이 진짜라는 것을 알고 안심하고는 던전 밖으로 나가 아이언 포트리스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