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으음… 아영아, 이거 좀 길어질 것 같으니까 먼저 누님에게 가 있어라.”
“예!”
이야기를 듣기 전 먼저 아영이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는 유성원이었다.
같이 들어도 딱히 상관없었지만, 옆에 함께 온 손님들을 봐서는 뭔가 중요한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위대한 황금의 황제이시여, 잠깐만 들어 주시옵소서. 저희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 땅의 미래를 위해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옵니다.”
‘이거 백 프로 추가 퀘스트겠지?’
전투로 멸망시키지 않고 화해했을 때부터 느낌이 싸했지만, 유성원은 그들이 뭔가 부탁하려는 것을 쉽게 예측하며 분명 귀찮은 퀘스트를 시킬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물론 어떻게 보면 이 던전을 닫게 만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고작 반나절 쉰 걸로는 부족했기에 뭐든 간에 듣고 나서 미룰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마정석 거래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폐하.”
“…마정석… 거래? 즉 트레이드?”
“예, 폐하.”
멀블린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유성원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 던전 내부에 있는 고난도 마물이나 던전 등급보다 더 높은 등급의 마신, 아니면 갑자기 포탈을 열어서 다른 세상의 괴물을 잡아 달라고 요구하는 게 정석 스토리인데, 갑자기 거래를 해 달라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마정석이… 왜 필요한데?”
“저희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자원이옵니다, 폐하. 마정석이 없으면 저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간결하게 말하면, 고블린 제국의 삶의 모든 요소는 마정석을 자원으로 해서 굴러가기에 항상 마정석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각종 에너지원의 근본으로서 물, 대지만큼이나 소중한 것인데… 이미 이 던전, 아니 이 별에는 ‘마정석’이 고갈되어 간다는 것이었다.
“고갈될… 수가 있나?”
“이 별의 생명체들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긴 했습니다. 과거엔 거대한 마수나 마물, 동물들이 많아서 문제없었지만 저희 제국이 있기 전에 이 별을 지배하던 세력들이 마정석을 이용한 문명을 급격히 키우고 서로 싸우는 바람에…….”
결국 몬스터나 괴물들에게 있던 마정석으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지만 모조리 멸망하거나 자원 부족으로 피폐해지기 시작한 틈을 타 고블린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되었고, 고블린 제국을 세웠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나 근본적으로 고블린 제국 또한 마정석의 문명을 이어받은 나라이고, 그들의 유산을 이어받아서 그 문명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원 부족을 해결할 의지는 있는지라 마법사들을 동원하여 연구를 시작했고, 그 결과로 차원문을 열어 이곳에 도달했다는 스토리였다.
“으음… 그냥 성좌들이 연결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었네. 뭐, 너희들 이야기를 전부 믿고 자시고 간에 이거저거 체크할 건 많지만, 난 별로 관심 없어. 귀찮은 일만 안 시키면 오케이. 거래로 끝난다면 훨씬 좋지.”
꼭 마정석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가? 다른 기술 같은 건 없는가? 화석 연료 같은 대체 자원을 생각한 적 없는가? 꼭 그 망할 마정석 관련 기술만 있어야 살아남는 거냐? 등등 의문점도 많았지만…….
“으으으음… 일단 거래는 할 생각이 있어.”
“가,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우리가 마정석을 준다면 너희는 뭘 줄 생각이지? 당연하지만 우리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만 해. 물론 귀금속 정도는 받을 수 있지. 하지만 그것들의 매장량이 무한은 아닐 거고, 생산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할 텐데……. 결과적으로 너희들, 마정석을 모아서 다시 던전 밖에 나올 생각인 거지?”
“…….”
유성원의 논리 전개에 표정이 싹 굳는 멀블린과 고블린 엠퍼러, 아니 이젠 로드나 킹으로 지위를 낮춰 불러야 할 자였다.
마치 정곡을 찔린 듯한 모습에 유성원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색하게 말을 이어 나간다.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면 그 방안밖에 없잖아. 아마 나 죽을 때까지 존버할 생각이었을 거고……. 에이, 이런 건 나 같은 빡대가리도 눈치챌 수 있는 사실이야.”
“죄, 죄송하옵니다, 폐하.”
“아니, 죄송할 건 없지. 너희는 너희대로 살아남으려고 그러는 거니까. 아무튼… 으음~ 이거 고민을 좀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일단 너희, 석탄이랑 석유라는 거 혹시 알아? 연료로 사용하는 건데…….”
유성원이 석유, 석탄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을 하자, 멀블린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무언가 떠올린 듯 고개를 들고 유성원에게 대답한다.
“그… ‘타는 물’ 말입니까?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마정석의 은혜를 못 받는 하층민들이나 연금술에 사용하기는 하는데…….”
“그럼 해결됐네. 마정석이라는 것 때문에 지하자원이 아예 없는 줄 알았네.”
“예?”
“거래는 해 줄게. 대신 대체 자원에 대한 연구를 오늘부터 시작해. 기간은 50년 정도가 좋을까? 그 안에 자원 체계를 못 갖추면 여길 멸망시킨다. 자~ 그럼 밥 먹으러 가자.”
냉혹한 선고.
멀블린과 고블린 킹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서로를 보면서 고블린 언어로 부산하게 대화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자신들이 바라던 결과는 이게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지만, 유성원은 알 바 아니라는 듯 던전 내로 들어온 자신들의 트레일러로 향한다.
“유청, 저녁밥 뭔지 알아? 아니면 이제부터 가서 다 같이 만들어야 하나?”
“아칼론 경의 말로는 캠핑엔 역시 바비큐라면서 고기를 준비한다고 합니다. 폐하의 회복을 위해서이기도 하고요.”
“음, 역시 고기지.”
“한데 폐하, 황송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방금 멀블린들과 이야기한 ‘거래’에 대해 말씀 하나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진짜로 ‘말’만이라면 들어 볼게.”
“이 던전의 고블린들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만, 문명의 체제란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아마 일정 기간 동안은 마정석이 필요할 겁니다. 자연히 거래를 해야겠지요. 한데 이 내부의 산물을 받게 되면 결국 생산 여력을 쓰게 되어서 개발이 늦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질 겁니다.”
유청의 말대로 문명을 유지하는 기반 체제를 변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시간도 꽤 소모된다.
또한 변형하는 동안은 여전히 기존 체제를 사용해서 생활을 유지해야 했기에 외부에서의 원조는 필수 사항이었다.
“그래서? 요점이 뭐야?”
“거래하시는 것을 산물이 아니라 이 제국의 병력으로 받는 게 어떠신지요? 즉, 그들에게서 용병을 받는 겁니다. 그들을 천검군의 일부로 받는 것이지요. 그러면 자연히 이 제국의 전투력은 깎이게 되고 다른 생각을 못하게 됩니다.”
“그거 엄청 좋아 보이는데, 우리가 걔네를 고용해서 어디다 쓰냐?”
“어디에 쓰긴요. 전쟁이지요. 보아하니 폐하의 세계는 지금 무한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고, 던전을 공략하는 데 있어 외부에서도 몬스터들이 돌아다니곤 합니다. 그들이 바깥을 경비할 수 있기만 해도 던전 내부에서의 전투 안정성이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으음, 도움이… 되려나?”
“도움이 되게 만들면 되지요. 신(臣) 유청에게 맡겨 주시면 저 고블린들이라 할지라도 천검군의 깃발을 쥐고 싸울 수 있게 만들겠나이다.”
너무나 명안이라서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한 유성원은 곧바로 유청에게 일을 맡기기로 한다.
물론 50년 만에 변화가 가능할지는 의문이었지만, 안 되면 결국 유성원의 손에 의해 멸망할 것이니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그렇게 트레일러로 온 유성원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아칼론, 섬멸, 가울프, 크록베인, 최충선을 발견했고, 반갑게 인사한 다음 다가가서 그들을 돕기 시작했다.
***
서울, 협회 본부.
이 목사의 대규모 반란을 막은 이후, 협회는 전쟁의 뒤처리와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느라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좋은 소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을 뒤엎을 정도로 안 좋은 소식도 가득이라서 골치 아픈 상태로 오늘도 일을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쥐어 짜내는 중이었다.
“그럼 오후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장벽 쪽 재건 공사는 모두 끝났습니다. 이전에 드러난 제네레이터 위치를 변경 및 더미 코어를 만들어서 보완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군인들에 대한 배상금 지급도 순조롭습니다.”
“다음 보고입니다. 이 목사 쪽 언더시티들의 근황입니다. 일단 현재는 조용한 상태이지만 주기적으로 언더시티끼리 분쟁이 일어나는 걸 보면 이번 전쟁 실패에 대한 일을 두고 다투고 있는 걸로 사료됩니다. 그래서 아마 당분간은 이전과 같은 대규모 공세는 펼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목사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목사가 죽었단 말인가?”
“그는 이번 전쟁을 포함해서 성좌 도살왕의 사도 아크데몬 비스트만 셋을 잃게 한 자입니다. 충분히 그럴 만합니다. 그리고 이에 관해서 한 가지 더 강한 근거가 있는데, 바로 개성 언더시티에 있던 ‘인간 목장’이 철거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 목사가 애지중지하는 그 ‘인간 목장’이 말인가?”
‘이 목사’가 자랑하는 극강의 혐오 시설.
인간을 가축처럼 키워서 제물로 삼는다는 기괴한 발상은 여러 곳에 충격을 주었고, 그 피해자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 러시아, 중국인들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최악의 명성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하나, 인간을 키우는 일이 엄청 고되며 비용에 비해 생산성도 꽝인데 정성은 많이 들어가는지라 ‘이 목사’ 같은 광신도이자 모든 스테이터스와 스킬 역량을 거기에 특화시킨 게 아니라면 사실상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니 그것이 파괴된다는 것은 즉, 이 목사가 죽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같은 도살왕 계열 스캐빈저들이나 다른 언더시티 지도자들 그 누구도 그의 미친 짓을 따라 하거나 이어받을 인간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이 목사’가 아니면 운영이 불가능한 시설입니다. 그토록 미치광이인 데다 연금술, 약학, 요리, 의료, 재배술, 과학 등등의 전문 지식과 스킬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그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러면 ‘이 목사’는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보면 되어서 안심이 되는데… 또 새로운 문제가 생기는군.”
“…황금 용기사에게 한 의뢰군요. 아아, 말하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요.”
황금 용기사 유성원.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SS급 헌터라 부를 수 있는 존재로서 한때 마인 판정을 받았지만 ‘업무 협약’을 통해 헌터로 인정받은 사례였다.
그리고 그 본인을 제외해도 휘하에 기존 4인 기사 외에 최충선, 백가연까지 포함해서 총 S급 6인을 보유하고 있는 대한민국 최대 헌터 세력이라 볼 수 있는 존재인데, 이전 ‘이 목사’가 일으킨 전쟁 때 급히 선금 5천억을 주고 1조짜리 의뢰를 그에게 맡긴 일이 있었다.
“머리 아파도 해야 할 일이지. 가장 문제가 많은 친구라 뒤로 미루려 했는데… 그 친구랑 연락은 되나? 일단 축하 메시지랑 훈장도 보내 줬는데 말이야.”
“…그게, 지금 고블린 제국 던전에 일어난 이변을 해결한다고 아이언 포트리스를 비운 상태입니다. 뭐, B급 던전 처리이니만큼 뭐라 할 수 없어서 보류 상태입니다.”
“명분은 그럴싸한데… 왠지 우리를 피하는 것 같군. 아무튼 그럼 이 의뢰에 관한 해석이 달라질 텐데 이거 어쩌지?”
이 목사의 죽음이 확인된 이상 그것을 목표로 의뢰했던 내용이 더 이상 쓸모없어진 것이다.
이러면 ‘협약’하에 한 ‘의뢰’ 대상이 자기들끼리 내분으로 죽었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계산이 꼬이기 시작한다.
“일단… 일단 기여분부터 생각해 봅시다. 황금 용기사가 한 게… 보자, 기존의 레그혼 단독 토벌, 렘렘 협동 토벌, 그리고 위험했던 서울 장벽 방어, 휘하 사람들로 인한 후방 안정, 이 정도인데……. 이 목사가 죽임을 당한 이유로 유력한 건 역시 레그혼 단독 토벌과 렘렘 협동 토벌일 겁니다.”
“음? 잠시… 렘렘은 왜 협동입니까?”
“그야 올림푸스의 디오메디아 님이 몸으로 희생해서 카운터 렘실드 반사 스킬을 알아냈잖습니까? 그걸 알아내지 못했다면 저 중장갑에 방패로 무장한 튼튼한 타입인 렘렘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위력 강한 스킬을 사용했을 게 뻔하니, 이건 올림푸스 길드도 기여분이 있는 협동 토벌입니다.”
“으음, 일리가 있는 말이니……. 좋습니다. 한데 거기에 고트맨은 청룡 길드가 잡아서 이거 또 복잡해지는데요.”
내분으로 죽은 이 목사의 사망 원인을 따져 보면 이번 대규모 전쟁 실패+성좌 도살왕의 사도 셋을 잃은 것인데, 그 원인들에 대한 기여가 나뉘어 있어서 복잡한 상태였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이 목사가 죽어서 토벌이 완료되었을 경우, ‘협약’에 따라 유성원에게 추가로 5천억을 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인 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는 협회와 정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