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그 뒤로 부끄러운 이야기가 오가서인지 신소미는 잠시 다른 볼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떠났고, 유성원 또한 생전 처음 고백 비슷한 것을 한 것에 대해 항마력이 도저히 못 버티겠는지 번데기 만드는 애벌레인 양 몸을 비틀면서 꿈틀대고 있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만족감에 마음 한구석에 안도감도 들긴 했다.
“실망했어요, 아저씨. 이번에야말로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유성원에게 이번엔 아영이가 다가와서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마 자리를 피하긴 했어도 들을 건 다 들은 것 같았다.
유성원은 굼벵이 자세를 풀고서 벌떡 일어나 답한다.
“다 사정이 있어서 그래.”
“우리 엄마에게 뭐 문제 있어요?”
“아니, 문제는 나한테 있어. 아! 그리고 신체적 결함 사유는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보호 시설에 들어간 이후부터 서른둘까지 혼자 살아온 놈이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이제 막 생각하기 시작해서 오는 혼란이니까 말이야!”
“그냥 마음 맞으면 살면 되는 거지. 뭘 그런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시선으로 유성원을 바라보는 신아영이었지만 그는 전혀 동감하지 못한다.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졌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게 당연했던 그에게 가족이라는 개념은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다.
그의 고민을 이해 못하니 신아영은 편하게 이야기하는 반면, 유성원은 고뇌로 가득한데 저렇게 배려 없이 찔러 대니 순간 울컥해서 슬쩍 선 넘은 말을 꺼내 버린다.
“그러다가 네 원래 아빠처럼 될지도 모르는데,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니? 한 번 했던 분이니까 더 신중한 거야. 그러니 나 좀 내버려 둬 주라.”
“윽,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요.”
“아, 미안. 내가 말이 심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너 전투 포지션이 완전 바뀌었더라?”
이미 신소미와 했던 이야기이지만 유성원은 아영이와 다시금 이야기하며 그녀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모자란 부분을 채워 준 덕분에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던 것은 사실이며 그녀들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것까지 말한 것이다.
“…결론은 그 바뀐 포지션이 모자란 부분을 완벽히 채워 주니 그 부분을 강화시켜 주겠다는 의미야. 즉, 필요한 거 혹시 있니?”
“아저씨가 입은 갑옷이요!”
“그거 귀속품이라 주고 싶어도 못 줘. 아니, 진짜로 주고 싶은데…….”
그 망할 갑옷은 내다 버려도 알아서 돌아오는 독한 놈이라서 아무리 노력해도 줄 수 없었다.
다만 말의 뉘앙스를 보면 아무튼 방어구가 필요하다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방어구가 필요한 거야?”
“성좌에게 잘리고 난 뒤에 내력, 기(氣) 관련 스킬들이 사라지니까 봉황무의 불길이 제어가 안 되는 건지 옷이 다 타 버려요. 내열 소재도 써 보고 룬도 걸어 보고 다 했는데 소용없더라구요. 그래서 좋은 방어구가 필요해요.”
“으음~ 아무튼 상담이나 받아 보자. 보자… 아, 여기 있다.”
“상담이요?”
신아영의 물음에 대답은 없이 유성원은 곧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도살왕의 가호를 받은 반지를 착용하고 도살왕 휘하의 상인인 폭시를 불러내었다.
여우 수인은 오랜만에 자신을 소환한 유성원을 알아보고는 반가운 눈빛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걸 본 신아영은 몬스터가 나타나서 깜짝 놀란 듯 유성원 쪽으로 대피한다.
[컁컁! 오랜만입니다, 유성원 님. 소식 들었습니다. 레그혼 님에 이어서 렘렘 님까지 쓰러뜨리신 거 정말 축하드립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용사의 얼굴이 되셨네요? 반해 버릴 것 같아~ 컁!]
“립서비스는 적당히 해 두고, 렘렘의 소재 팔 거니까 매입이나 해 줘. 아, 혹시 걔가 입던 장비도 받나?”
[물론 받죠. 엄연히 도살왕 님의 사도인지라 그분이 직접 만드신 보호구인데! 바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컁!]
구면답게 유성원이 내민 렘렘의 소재와 장비류들을 빠르게 수거하고 바로 포인트로 정산해 주는 폭시였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것과 합쳐서 도합 74,300포인트.
약 5만의 포인트보다 적게 성과를 거둔 레그혼보다 총 포인트가 더 비싼 렘렘이었다.
“뭐, 비싸면 나야 좋지만…….”
[이번에도 거래 매우 감사합니다. 컁컁! 그럼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아니, 포인트를 벌었으면 바로 사야지. 이번 드롭 템 중에 렘렘 스킬 북이 안 떨어졌는데, 혹시 가진 거 있어? 그 카운터 렘실드라는 거 나 배우고 싶은데.”
‘적의 공격을 반사한다’는 스킬은 정말 매력적이었기에 유성원은 물어보았지만, 폭시는 고개를 저으면서 아쉽다는 표정으로 답변한다.
[키이잉~ 그건 도살왕 님이 직접 부여해 주신 권능이라서 스킬 북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요.]
“…하긴 그런 사기 스킬을 막 팔 리가 없지. 그러면 일단은 장비부터 봐야겠다. 혹시 봉황무의 불꽃을 제어할 수 있는 스킬이나 장비 같은 게 있을까? 얘가 배웠는데 불꽃 때문에 쓰기가 좀 그래서 말이야.”
[캬앙? ‘봉황무’라면 애초에 배울 때 기(氣)체술이나 화염 친화 적성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럼 어떻게 배우셨어요?]
“배울 땐 있는 클래스였는데… 최근 변화를 하는 바람에…….”
[캬앙! 뭐, ‘성좌’의 인도를 받거나 갑자기 클래스 체인지가 된 분들의 경우 그런 일이 생길 수 있긴 하죠.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봉황무’는 버리기 아까운 스킬이니 바로 찾아 드릴게요.]
그렇게 폭시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고, 인벤토리 차원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물건을 내려놓는다.
스킬 북들은 기본이고, 화염이 맴도는 투명한 구슬은 물론 갖가지 이상한 도마뱀 고기 토막이랑 비늘까지 우수수 튀어나와서 혼란을 주고 있었다.
방어구도 모습을 보였지만 너무 화려한 디자인 때문에 오히려 반감이 일어날 정도였다.
“뭔가 많은데… 아무튼 네 몸에 대해선 나보단 네가 더 잘 알 테니 여기 중에서 알아봐. 나는 나대로 상담하면서 쇼핑할 테니까.”
“네? 네! 이거 몇 개까지 사도 돼요? 엄마 것도 사고 싶은데…….”
“한 3만 포인트어치 맞춰. 누님 건 내가 도움 될 만한 것 같이 상담해서 맞출 테니 걱정 말고.”
“오예! 고마워요! 아빠!”
“…아직 아니잖아!”
그렇게 폭시가 내온 물건을 즐겁게 살펴보는 아영이를 옆에 두고 유성원은 이제 본인 및 신소미를 위한 쇼핑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일단 부족한 점이었던 전투 지속력에 대한 스태미나와 피로 문제는 늘 그렇듯 골라잡을 수 있는 스킬들로 이미 배운 지 오래였기에 지금 보충할 것은 바로 다른 종류의 무기였다.
“까놓고 말해 원거리 무기가 필요해. 하늘을 날 수 있는 드래곤 탈것이 있는데! 무기가 이거 하나라서 말이지.”
이전부터 계속 생각했던 문제다.
비싸게 포인트 주고 스킬까지 익혀서 엘드라엔을 소환해 타고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무기의 리치도 리치였고, 원거리 공격 수단이 제한되었기에 사실 타고 다니면서 멋지게 싸우는 것보다는 그녀의 마법이나 위용을 이용해서 후방을 굳히는 데 사용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사실 활이나 총기류를 써 보려고 했는데… 내 특성 때문에 쓸 수가 없어서 말이지. 그런데도 원거리 능력은 필요하기도 하고…….”
[마법 같은 건 못 익히시나요?]
“익힐 순 있지만 필요한 게 한둘이 아니라서…….”
무재(武才) 스킬처럼 한 번에 해결되면 좋으련만 마법은 이야기가 달랐다.
일단 스탯은 충분했지만 마력 감응부터 시작해서 필요한 스킬도 너무 많았다.
가뜩이나 천검군 활성화를 비롯해서 전투 스킬을 더 찍기도 부족한 게 현실이라서 자연히 보류해야만 했다.
또 사실 스킬은 배울 수 있어도 무수한 ‘연산’과 마력을 엮을 수식을 외울 머리가 뒷받침되지 않기에 그저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웬만한 마법은 다 엘드라엔이 갖추고 있으니까 더 필요 없지.’
[캬르릉~ 그러면 창은 어떠신지요?]
“창? 하지만 드래곤 위에서 쓰려면 엄청 길어야 할 텐데?”
[아, 다릅니다. ‘투창’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거라면 아마 원거리 무기 금지 제약을 슬쩍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 ‘기사’분들도 쓰던 무장이라서요.]
‘목표 지점에 정확히 잡아서 던지는’ 능력이 가장 뛰어난 동물인 인간에게 있어 ‘투창’은 고대 선사 시대부터 강력한 맹수들을 상대로 싸우게 해 준 힘 중 하나였다.
비록 이후에 활이 등장하긴 했지만 재료를 구하기 힘든 점, 화살을 별도로 만들어야 하는 점, 숙달이 힘든 점 등등의 요인 때문에 근접 무기로도 쓸 수 있고 제작이 쉬운 ‘투창’은 활이 만들어지고도 특정 문명권에선 조건에 따라 오래 사용되기도 했다.
더불어 기사들 또한 말을 탄 채로 적 진영에 다가가 던지는 경우도 있는 만큼 폭시의 제안은 유성원의 귀에 솔깃하게 들렸다.
“투창인가? 으음, 뭔가 원시인 같은 느낌이지만. 과연… 보통 투창은 사거리가 짧으니까 확실히 죽이려면 꽤 다가가야겠지만… 저기, 창 한 자루 아무거나 줄 수 있어? 폐기하는 거라든가?”
[컁! 예. 여기 있사옵니다.]
“어디 그럼… 흐음!”
쐐애애액!
퍼어어어엉! 쏴아아아아아!
폭시에게 나무로 조잡하게 만들어진 창을 받은 유성원은 그대로 전력투구를 해서 호수 쪽으로 던졌다.
그러자 공기를 찢는 소리가 퍼지면서 호수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비가 오듯이 물이 뿌려진다.
“오? 진짜다. 이건 뭐라고 안 하네? 활이나 총 쏘면 귀신같이 그건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아아아아! 하면서 난리 치는데…….”
[캉캉! ‘검’은 싸움, 승리와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창’은 병사의 무기, 문명의 수호자를 상징합죠. 전설적인 영웅들의 싸움에서도 활은 비겁하게 여겨질지언정 ‘투창’은 비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뭐야, 그거 대체 무슨 논리야?”
아무튼 성가신 특성도 뭐라고 안 하니 더 이상 원거리 무기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유성원이었다.
투창을 미사일 쟁여 놓듯이 잔뜩 쟁여서 들고 다니면서 하나씩 꺼내서 던지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던 차, 문득 자신의 무기가 떠올랐다.
“…잠깐! 혹시 이거 더 있어?”
[‘티탄의 말뚝’……? 컁! …컁컁! 있긴 합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전리품으로 들어오긴 했거든요. 신의 강철로 이루어져 무겁고 단단하기만 하고, 성좌들 중에서도 관련된 분이 아니면 재가공도 못하는데, 그렇다고 어디 버리기도 애매해서 보관하고 있던 건데…….]
“다 줘. 포인트 되는 한 다 살게.”
[감사합니다! 고객님!]
애물단지를 땡처리할 기회가 온 것에 폭시는 꼬리를 흔들 정도로 좋아하면서 유성원의 앞에 티탄의 말뚝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모두 다 장비 상점에서 봤던 대로 전용 케이스에 넣어진 채로 쏟아지는데, 그 수가 무려 15개나 되었다.
“이렇게나 많아?”
[키응~ 아뇨. 이것도 극히 일부예요. 티탄 하나를 묶으려면 이런 게 수백 개씩은 들어가니 말이죠. 은근 구하기 쉬운 물건이에요.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더 내올 수도 있지만 얼마나 필요하신지 몰라서 이만큼만 꺼낸 건데…….]
“3만 포인트어치만 살게. 나머지는 또 다음에…….”
[전설급을 능가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된지라 많이 깎아서 개당 3천 포인트 해서! 총 10자루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그렇게 티탄의 말뚝을 10자루 더 구매하게 된 유성원이었다.
이후 남은 포인트는 아영이의 아이템 3만 포인트 분량에다 추가로 신소미에게 선물할 아이템까지 해서 7만 포인트 꽉꽉 다 채워서 쇼핑을 끝낸다.
“이게 필살 무기지, 별게 필살 무기야?”
“그 무게를 집어 던지면 확실히 미사일이 따로 없겠네요.”
“아무튼 엘드라엔 불러서 테스트나 해 봐야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유성원은 곧바로 엘드라엔을 불렀고, 그녀에게 마법으로 장벽을 쳐 달라고 한 다음 새로운 티탄의 말뚝을 꺼내서 잡고 겨눈다.
‘말뚝’답게 손잡이도 있고, 끝부분도 창처럼 날카로웠기에 투창으로 쓰기 딱 적절했다.
“후우~ 심호흡하고~”
[방어 마법을 7중으로 설치 완료했느니라. 지면에도 쳐 놔서 혹시라도 땅에 파고들 일 없게 해 놓았고 말이다.]
“오케이. 그러면 테스트 1 간다아아아!”
투콰가가가!
그렇게 마법이 설치된 것을 본 다음 전력으로 티탄의 말뚝을 던지는 유성원.
티탄의 말뚝은 그대로 방어 마법들을 찢어 버리고 슝~ 하고 미사일처럼 날아가 버린다.
당황한 유성원이 슬쩍 엘드라엔을 보자, 그녀 역시 입을 쩍 벌린 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티탄의 말뚝은 저 멀리 빛의 반사만 남기고 이미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간 뒤였다.
“와… 무슨 미사일이네, 미사일이야.”
“…방어 마법 쳤다면서요?”
[저렇게 위력이 무식할 줄은 몰랐지. 아무튼… 타거라.]
엘드라엔의 말에 공감하며 유성원은 그녀의 등에 타고 자신의 말뚝이 있는 곳으로 날아간다.
날아가면서 미사일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땅에 생긴 투창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위력은 마음에 들지만 회수 수단을 따로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렇게 바위산에 아슬아슬하게 박혀 있는 티탄의 말뚝을 회수한 뒤 돌아와서 다시 쉴까 하고 눕는데, 별로 반갑지 않은 손님이 와 있었다.
“…유청? 진석? 너희 왜 왔어?”
“주변이 소란스럽기에 폐하의 용체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주변을 수색하고 있었습니다.”
“별일 없어. 아니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저녁 먹어야겠네. 그 X 같은 연회나 파티는 절대 안 갈 거니까 알려 두… 근데 얘들은 왜 있냐?”
유청과 진석의 옆엔 익숙한 짜리몽땅 둘이 있었는데, 바로 이곳의 원래 주인인 고블린 엠퍼러와 마법사 고블린인 멀블린이었다.
둘은 유성과 진석처럼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로 유성원을 배알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지만, 한숨을 쉬고는 어쩔 수 없이 묻기로 하는 유성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