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다음 날, 아이언 포트리스.
이미 태양은 중천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유성원은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실컷 자다 깨어났지만 침대에 퍼질러 누운 채로 TV를 틀어 지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세상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은 채 평온함에 전신을 맡기는 중이었다.
『닥쳐라! 너 같은 말라깽이들은 내가 이 뱃살을 찌우는 데 얼마가 들었는지 모르겠지! 지방의 ‘무게’가 다르단 말이다.』
“푸하하핫, 지방의 무게래! 푸하하하!”
“일어났으면 먼저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떨까요? 물론 힘들게 싸우고 난 이후라 힘들겠지만 말이죠.”
“…알아서 챙겨 먹을게요, 엄마. 히익! 잘못했습니다.”
기껏 자신을 데리러 방에 와 준 신소미에게 헛소리를 했다가 싸늘한 눈초리에 곧바로 굽실거린다.
딸을 둔 어머니이긴 하지만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같은 30대인 유성원에게 들을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뭐, 엄마라고 한 건 물론 제 잘못이 맞지만요. 저 진짜로 아직 싸움에 대한 피로라든가, 체력 소모가 많아서 쉬어야 하는 건 맞다니까요. 보세요. 한 달 내내 고블린 제국 던전에서 싸우고 나와서 제대로 못 쉬고, 광주에서는 스캐빈저, 부산에서는 A급 보스 머맨 워로드들을 상대하고 곧바로 서울 올라와서 아크데몬 비스트 떼거리와의 전투 같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한 달은 쉬어야…….”
“메디컬 체크도 했는데… 신체 상태는 정상을 넘어서 피로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을뿐더러 새로운 스킬도 있는 걸 확인했거든요. 그러니까…….”
“크흠! 스킬은! 스킬은 비장의 카드! 비장의 카드 같은 거니까 치지 말고 상식만 생각하죠.”
“…알겠어요. 푹 쉬세요.”
그렇게 유성원은 끝끝내 침대에서 결사항전을 했고, 신소미는 이 이상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그의 방에서 나온다.
그리고 아이언 포트리스의 중앙 통제실로 가니 매우 바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백가연 어르신은 끙끙대면서 산처럼 쌓인 서류를 보고 있었고, 유청은 멀블린과 무언가를 계속 쑥덕거리는 중이었다.
“오? 자네 왔는가? 그래서 그 친구는?”
“쉰다고 하네요.”
“뭐?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무슨!”
“저 사람의 근본은 소시민이니까요. 황금 갑옷을 걸치고 있든, SS급 헌터의 무용을 가지고 있든, S급 기사들의 대장이든, 고블린 제국의 지배자이든 말이죠.”
인간의 본질은 쉽게 변하기 힘들고, 특히 성인이 된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미 삶의 방식이나 생각이 많이 굳어져서 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 삶의 방식으로 실패한 적이 없다면 더더욱 변하기 힘들고, 강압적으로 설득을 하려고 하면 반발을 크게 사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러니 더더욱 이상하구먼. 저 성격에다 성좌의 가호나 지배를 받는 것도 아닌데… 대체 어떻게 저렇게 강해진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음? 전에는 뭔가 감 잡은 것 같으시던데요.”
“그렇다고 보기엔 저 친구… 너무 이 세상에 대해 무관심해. ‘부름’을 받았다면 절대 저런 태도가 나올 수 없는데 말이야. 하아~”
백가연은 유성원에 대해 투덜거리면서도 계속해서 서류 처리에 힘쓴다.
이번 일만 해도 정부에서 1조라는 지출을 OK했기에 전장에 나선 것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 대한민국은 멸망해서 ‘아포칼립스’ 시대로 넘어갔거나 아니면 대한민국 영토가 지방 정부 레벨로 역량이 떨어질 뻔했던 엄청난 사태였다.
“후우~ 많다, 많어. 전리품 처분은 뭐 그렇다 쳐도 회담이나 사람 만날 일이 이렇게 많은데 말이야. 저 친구 어떻게, 갱생할 방법이 없겠나?”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에요, 어르신. 오히려 저런 성격인데도 싸워야 할 때는 전장에 나가서 끝까지 싸우는 게 기특하지 않나요?”
“돈 받아서 나간 게?”
“그래도 자기가 한 말은 지키잖아요. 세상에는 불리하다고, 어렵다고 하면서 앞에서 한 말 다 뒤집는 책임감 없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아~”
무언가 뒷사정이 더 있음이 느껴지는 신소미의 한숨이었다.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본 신아영은 와이어와 총기를 손보던 중 벌떡 일어나서 어머니와 백가연의 사이에 끼어든다.
“그럼 어차피 오늘 일은 조진 거죠?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저씨 데리고 놀러 가요. 저대로 처박혀서 쉬는 거보단 낫지 않을까요?”
“으음~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흐흐흐. 놀러 간다고 하면 그 친구도 거부할 도리가 없겠지.”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습니다. 지금 이 아이언 포트리스 밖에 기자들이 얼마나 많이 캠핑하고 있는지 모르세요? 우리가 트레일러 몰고 어디든 가면 아마 끝까지 따라붙을 거예요.”
신소미의 말대로 기존에도 언론의 엄청난 관심을 받던 SS급 헌터 유성원이었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3개의 전선을 단 하루 만에 정리해 버려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해 낸 ‘조커 카드’가 된 것이다.
그 활약도 활약이었지만, 단 한 명도 구하기 힘든 S급 전력이 무려 본인 포함 5명이나 한 집단에 모여 있다는 점도 화제성이 높아서 기자들은 무엇 하나라도 더 알아내기 위해 지금 아이언 포트리스에서 캠핑은 기본이고 심심하면 잠입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막 큰 전쟁이 끝났는데… 놀러 다니는 모습이 찍히면 무슨 날조 기사가 나갈지 모르니까요. 여론만 안 좋아지겠죠. 대충 제목은 ‘전쟁이 끝난 이 시국에 연회?’, ‘1조 받더니 기고만장?’ 등등으로 말이죠.”
“흐음… 그 말도 맞는군. 그 렉카 같은 양아치 놈들 생각하면 이가 갈리지.”
“그럼… 역시 엄마가 한 꺼풀 벗고서 돌입하는 방법밖에…….”
“던전에 가면 됩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적어도 차원을 넘은 그곳 내부라면 방해받을 염려는 없겠지요.”
그때, 고블린 마법사 멀블린과 한참 이야기를 하던 유청이 그들 사이에 슥 하고 끼어든다.
천검군의 참모이자 유성원의 소환 기사 중 하나인 그는 순정 만화에나 나올 법한 우아한 외모를 가진 미남으로 오자마자 여성진들이 모두 깜짝 놀랐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그는 다가와서 ‘던전’으로 놀러 가자는 제안을 했고,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백가연이었다.
“오? 그거 나쁘지 않구먼. 던전이라……. 거기라면 감히 따라오지 못하겠지.”
“하지만 높은 등급으로 가면 사고 위험이 높고, 낮은 등급으로 가면 던전 공략이라는 신빙성을 주지 못하고 또 이상한 기사가 쏟아질 텐데…….”
“그것은 바로 저희 고블린 제국에 맡겨 주시길 바랍니다!”
우려가 되는 말에 당당히 대답한 것은 바로 멀블린. 어느새 이곳의 언어를 다 익혔는지 이젠 능숙하게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괜히 마법사가 아닌 듯 그는 언어 습득을 완벽히 한 것이 자랑스러운지 가슴을 펴고서 의외의 제안을 한다.
“이곳의 기준으로 B급 던전이기도 하면서 저희가 항복함으로써 거대하고 강력한 황금의 황제이신 폐하의 땅이기도 하지요. 그곳에 간다면 던전에 가는 것이기도 하면서 폐하의 수족들로만 가득한 곳이니 안전함이 분명!”
“이걸 믿어도 되나? 유청 경?”
“예? 배신이어도 별로 상관없습니다만? 그러면 단체로 B급 던전 공략에 들어가면 되는 거지요. 저로서는 그쪽이 더 좋은데, 과연 이 마법사 ‘멀블린’이 어떤 지혜로 저희를 위기에 빠뜨릴지가 기대되는군요. 참고로 두 번 항복은 안 받습니다.”
유청은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당당히 답했고, 멀블린은 기괴한 고블린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면서 반발했다.
하지만 남은 이들이 보기엔 유청 역시 만만치 않게 이상한 인간이었다.
흐뭇하게 웃으면서 멀블린을 바라보는 게, 해볼 테면 해보라는 압박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멀블린은 기겁해서 고개를 도리질하며 절대 그럴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그럼 뭐, 문제없겠군. 고블린 제국 던전은 분명 클리어했지만 아직 입구가 열려 있는 상태라서 그 문제를 해결하러 가는 거라고 이야기를 짜면 누구도 뭐라 할 수 없겠지. 가끔 공식 등급과 다른 던전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야.”
“여차할 경우를 대비해서 무장과 물자는 충분히 챙기는 것도 나갈 땐 무장한 채로 가면 되니…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일상복이라든가 먹을 건 마정석과 전리품 넣을 공간에 넣으면 되니 문제없겠네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호흡이 척척 맞았고,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다들 준비에 나서기 시작한다.
인력은 지금 각자 단련하거나 기사단의 성소에 쉬고 있는 기사들도 있고, 유성원이 소환해 둔 천검군 정예병도 있었기에 넉넉해서 준비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하나 그 모든 문제보다도 가장 힘든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방 안에 처박힌 채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뒹굴고 있는 유성원을 데리고 나오는 일이었다.
『오호호호홋! 영애 카트리나! 당신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없어요! 진정한 사교계의 숙녀라면 근육과 강인한 힘이 필수인데! 당신의 그 물근육으론 3 대 500은커녕 3 대 200도 아슬아슬할걸요? 오호호호호홋! 보세요! 카트리나! 이 근육을! 진짜 아름다움이랍니다!』
『오오! 조세핀 아가씨의 사이드 체스트! 보거라! 저 아름다운 근육을! 카트리나! 저것이야말로 진짜 귀족 가문의 영애가 갖춰야 할 아름다움이다. 끝없는 노력과 자기 인내를 통해서 완성되는 저 아름다운 근육을! 저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똑똑히 눈에! 그리고 가슴에! 새기거라!』
“푸하하하하! 겁나 웃겨. 푸하하하하하! 아이템 획득 소리가… 응?”
휴대폰으로 자동 사냥 게임을 돌려 놓고 침대에서 열심히 예능 프로그램을 보던 유성원은 자신의 방에 아영이가 들어온 것을 보고 표정이 굳어진다.
두 번째 보스가 온 것을 짐작한 그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사악한 일의 요정은 물러나라! 응애! 아기 유성원은 아무것도 못해요. 응애! 응애!”
“…서른 넘게 먹고 그게 뭐예요? 아무튼 일 시키는 거 아니니까 나갈 준비나 하세요. 놀러 갈 거예요.”
“놀러 간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어차피 대장이 쉬니까… 그냥 다 같이 쉬려고요. 친목도 다지고~ 기사 분들 중에 갑자기 늘어난 분도 그렇고, 그 고블린 마법사도 그렇고 등등… 서로 어색하니까요!”
유성원이 소환한 기사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어 온 친우나 동료처럼 그를 대하고 따랐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겐 거리감은 물론 야생동물이나 맹수처럼 위협하는 경우도 있어서 친밀해질 필요성이 있었다.
그나마 유청, 진석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한 이들은 거리감이 적었지만, 모든 행동의 원리가 유성원에게 몰려 있어서 그것도 문제였다.
“그럼 나 빼고 해. 나는 지금 조세핀과 엘리제가 프론트 더블 바이셉스로 아름다움 대결을 하는 걸 보는 게 더 중요하니… 야, 뭐 해?”
“육체 언어로 대화다!”
“무, 무슨 대화! 나, 나가! 야! 이불 안에 뛰어들지 마! 얘가 대체 왜 이러냐?”
그렇게 레슬링인 양 폴짝 뛰어서 침대 안으로 들어온 신아영이었다.
유성원은 달라붙은 그녀를 떼어 내려 하지만 무슨 스킬이라도 쓰는 건지 찰거머리같이 붙고, 막 벌레처럼 여기저기 기어 다녀서 잡기가 힘들었다.
“좋았어! 잡았…….”
“꺄아아앙~ 거긴~”
“거기가 뭔데!”
물론 스테이터스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서 금방 잡혔지만, 그때마다 신아영은 여성의 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난다.
침대 한구석에 고양이처럼 엎드려 있는 아영이에게 비겁하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윙크하면서 맞받아친다.
“이것이 여자의 무기! 나약한 노총각 따위가 손댈 수 없지!”
“헛소리할래? 미성년자 존중이거든?”
“그럼 미성년자가 아닌 엄마였다면 손댈 수 있다는 말?”
“…어?”
“엄마아아아아! 엄마아아아아! 아저씨가 엄마를 침대에서 막 손대고 싶다고 하는데~”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알았어! 나갈게! 나갈게! 나갈게에에에!”
기묘한 논리 전개에 의해 갑자기 이미지가 이상해진 유성원은 결국 신아영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유성원은 방에 콕 박혀서 조세핀과 엘리제의 가슴이 웅장해지는 근육 영애 간의 대결을 보지 못하고, 평상복을 갈아입고 방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