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안 돼. 싫어. 돌아가.”
“예? 저 엄연히 S급 헌터인뎁쇼? 구하러 와 주셨던 건 뭔가 은혜나 빚을 지운 다음 저를 이용할 생각으로 그런 거 아니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꼴 보니까 이득보다는 귀찮을 일이 더 많을 것 같아서 말이지. 게다가 목적이 훤히 보이기도 하고…….”
최충선의 목적은 더 안 봐도 뻔했다.
유성원의 부하가 되어서 그의 위세든, 명성이든 아니면 힘이든 빌려서 불안한 전라도 지방의 안전을 강화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남이 싸 놓은 똥을 치우는 것에 취미가 없으며, 치워 봤자 또 똥 싸 놓을 지방 정부, 협회의 인간들을 생각하면 그냥 안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유성원이기에 가만 놔두자 하는 것이었다.
“아뇨. 저도 딱히 뭘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대장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뭐?”
그런데 전혀 예상외의 반응에 유성원의 눈이 커졌다.
보통 이런 패턴이면 기브 앤 테이크를 요구하기 마련인데, 그냥 자신과 함께하겠다니 의외였던 것이다.
“그… 대장님의 말씀을 듣고 눈이 뜨였습니다. 서울 놈들은 맨날 자기들 편할 때만 불러 대면서 저희 안전은 생각도 안 하고! 지방 정부나 협회라는 놈들은 늘 부정부패 사건이 나오는데도 고칠 생각은 안 하고 자리 유지하는 데만 급급하고! 그렇다고 해서 힘 좀 쓰려고 하면 폭력이다 뭐다 하면서 난리!”
10년 넘게 S급 헌터로 있으면서 정말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닌지 최충선은 설움을 쏟아 내기 시작한다.
그동안 S급 헌터라서 가진 사명감과 고향 생각에 가려져 있던 본심과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감 등이 유성원의 말과 태도 덕에 드러난 것이었다.
“…그렇게 오만 책임과 사명을 얹어 놓고 우릴 희생시킬 때, 자기들은 안전한 곳에서 우리에 대한 대우도 개선 안 하고는 하고 싶은 일 제멋대로 하고 난리였죠. 우린 싸우다 남은 게 하나도 없는데!”
울분이 터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점. 그렇게 열심히 희생하고 싸웠는데 남은 게 없다는 설움이 그를 폭파시킨 거였다.
동료들은 모두 죽고, 가정은 파괴되고, 그렇다고 시스템이 개선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닙니다. 나름 안에서 유망주들 뽑아서 기껏 드루이드 스킬 트리 알려 주고 노하우 다 가르쳐서 키워 놓으면 죄다 위약금 내고 서울 쪽 3대 길드로 떠나 버리거나 망할 올림푸스에 뺏겨 버리고, 길드 외에도 군대나 행정, 기업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거 바로잡으려고 하면 간섭이니 뭐니 지X해 대고, 자기들이 더 스캐빈저랑 손잡고 막장 짓 저지르면서 나보고 뭐라고 하고…….”
“그래서?”
“예. 저도 그냥 대장님 따라서 한번 다 엿 먹어 보라고 하고 편히 살고자 합니다! 망할 세상, 망하든 말든! 나도 더러워서 똥 안 치우렵니다.”
결국 그동안 자신이 호구처럼 살아온 것에 대해 화난 그는 유성원을 따르자고 생각한 것이었다.
방금까지 길드나 도시를 걱정하는 태도에서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어서 언뜻 보면 뜬금없을 수 있었지만, 오랫동안 굳어진 생각이 큰 충격에 파괴되면 상상 이상으로 유연해지는 것이 사람의 사고였다.
“아… 으음… 그렇다면 뭐…….”
자신의 생각을 옳다고 생각해서 따르겠다는 것이니 유성원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전라도 쪽의 유일한 S급 헌터가 자신에게 합류하면 도시고 나라고 비상이 걸리겠지만, 알게 뭔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그동안 지지리 대우도 해 주지 않은 게 확실했고, 성장에도 제동이 걸렸던 것이니 더 할 말이 없으리라.
“환영… 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장님! 평생 따르겠습니다!”
“저기, 그럼 가족은?”
“그게… 있었는데, 지금은 없습니다. 가정을 너무 안 챙긴다고 마누라가 이혼하고 자식들이랑 미국으로 갔습니다. 아, 참고로 양육비도 계속 보내고 있습니다만… 하아~”
이야기를 듣고 나니 눈물이 앞을 가릴 것 같았다.
가정도, 일터도, 미래도 나아질 거라는 희망도 없는 이 사내에겐 인생의 낙이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
그저 S급 헌터로서의 책무를 다했을 뿐인데 인생은 계속 불행해지는 걸 보니 남 일 같지 않은 안타까움이 가슴에 피어오르는 유성원이었다.
“그… 아저씨, 환영할게요.”
“고맙습니다! 대장님!”
그렇게 S급 헌터, 드루이드 오브 비틀인 최충선은 유성원의 일행에 합류하게 된다.
물론 이 사실을 바로 알리면 협회와 정부 모두 난리가 날 것이기에 일단 지금은 감추고 나중에 아이언 포트리스에 합류하기로 한다.
“일단 부산까진 같이 가죠.”
“넵! 한시름 돌리기도 했고, 어차피 이미 설득이니 뭐니 한답시고 입을 털어 놓고 왔으니 이상하게 생각 안 할 겁니다.”
“게다가 우리가 그 한중호부터 해서 간부급들을 많이 죽였으니 다시 주도권 싸움을 해야 해서 당분간 안심해도 될 거예요.”
아마 지금쯤 네오 신안 언더시티에서 살아남은 스캐빈저들은 유성원의 예상대로 다시 한창 싸우고 있으리라.
그렇게 최충선의 합류가 확정이 나자 곧바로 안건은 부산 쪽 화제로 바뀌게 된다.
머맨 워로드가 이끄는 만 단위의 공세는 멈추지 않은 상황에서 디-시티 호텔을 거점으로 한 전선은 아직도 전투 중이었다.
그리고 그 전투 속에서 빛나는 한 명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이 부산을 포함해서 경상도 쪽을 지키는 핵심 인물이었다.
『썬더 자이언트! 모조리 없애 버려!』
콰르르릉! 파지지직!
수없이 몰려드는 머맨의 군세 앞에 푸른빛 뇌전을 두른 거인이 나타나 주먹을 휘두르며 괴수 소라게를 부숴 버리는 건 물론 근처에 있는 수백 마리의 머맨들까지 한 번에 감전사시키면서 쓸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인의 뒤에는 로브를 입고 뇌전을 머금은 청발의 아름다운 소녀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마찬가지로 뇌전 계열 마법을 사용하여 다른 머맨들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오… 다 튀겨 버리네. 쟤가… 그러니까 전지아였던가?”
“예. 클래스는 정령술사에 계약한 정령은 모두 천둥과 번개의 정령들로 그 덕분인지 몰려오는 저 머맨들에겐 확실히 치명적이죠.”
“일단 쟤가 큰 해산물들을 잘라 주니까 디-시티 호텔에 자리 잡은 군인들도 싸우기 편한 것 같고… 우리가 안 가도 되겠는데?”
『파지지지직!』
그녀의 활약에 머맨들은 바닷가의 백사장을 넘지 못한 채로 시신만 계속 쌓이고 있었다.
게다가 거대한 소라게 괴수나 다른 괴물들도 썬더 자이언트의 손에 계속 쓰러지니, 이 전선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아뇨. 저 애가 늘 말하기로는 저 머맨 워로드는 절대 바보가 아니라고 합니다. A급 몬스터인데 간교하기로는 S급 뺨친다고 합니다. 저 머맨 궁전 던전이 생긴 지 약 10년 가까이 되었는데 토벌이 안 된 게 그 증거죠.”
“10년이라……. 어지간히 저 머맨 궁전 치우기가 싫었나 보군.”
“B급 이상 던전은 정말 위험하지 않은 이상 위험성이 높아서 그냥 방치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이젠 거의 상식처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B급 던전-고블린 제국도 SS급인 유성원과 S급인 기사들로 가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그렇게 시달리다가 왔는데, A급 던전-머맨 궁전은 과연 얼마나 짜증이 날지 감이 안 오는 유성원이었다.
“아무튼 저 머맨 워로드도 뭔가 꾸미는 게 있을 겁니다.”
“하긴 나보다는 저 아가씨가 이쪽 사정에 대해 잘 알 테니까……. 아칼론, 속도 좀 올려 줘.”
[명령 접수 완료.]
최충선의 의견을 들은 유성원은 적극 반영해서 차의 속도를 올리라고 지시, 아칼론은 그 명령을 듣고 속도를 바로 올린다.
트레일러는 그렇게 텅 빈 고속도로를 주파하며 부산을 향해 질주한다.
***
부산 해운대, 바닷가 전선.
파지직!
정령술사 전지아는 계속해서 번개와 뇌전의 정령들을 다루면서 몰려오는 머맨들의 공세를 막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생선 머리를 한 인간형 몬스터들은 마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몇 시간째 끝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전지아는 그걸 잘 막아 내면서도 저 멀리 아직도 가만히 있는 머맨 워로드가 신경 쓰여서 죽을 지경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저 머맨 워로드가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할 리가 없는데…….’
머맨 워로드는 약 10년간 싸워 온 부산 사람들이 치를 떨 정도로 악랄한 놈이었다.
단순히 머맨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양식장 파괴, 인간 납치, 식수 정화 시설 파괴 등등 인간이 할 법한 각종 방안들로 자신들을 괴롭혔었다.
그런 놈이 아무 의미 없이 지금 이렇게 병력들을 처박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미 SS급 마인 이 목사와 거래를 하고서 들어왔다는 점에서 무언가 계획이 있을 텐데…….’
하지만 전장은 지금 한 치의 여유도 둘 수 없는 치열한 상황.
장기간 계속된 전투로 인해서 체력, 정신력, 마력 모두 소모가 극심한 상태였지만 자신들이 무너지면 곧바로 부산이 무너지기에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써 가며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끄르르륵… 끄릭! 끄하!]
[끄하! 끄하!]
[끄히악!]
그리고 안색이 안 좋아진 그녀의 모습을 멀리서 발견한 머맨 워로드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부하들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곧 궁전에서 이때까지와는 다른 머맨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뭐야? 저게?”
“…미쳤나?”
전선의 군인들은 물론 한참 힘겹게 천둥과 번개의 정령을 다루던 전지아도 새로 나타난 머맨들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단 관찰 관련 마법을 가진 이들을 통해 나타난 몬스터들이 머맨 솔저, 머맨 아너가드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머맨 워로드의 지시를 받고 나타난 그들은 일반 머맨보다 훨씬 크고 육중했는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무장이었다.
“저거 플라스틱이랑 고무 쓰레기 아니야?”
“저걸로 갑옷을… 아니! 전신을 가렸다고? 풉! 뭐야?”
“푸하하핫! 저것들, 왜 쓰레기를 입고 있어?”
머맨 솔저와 머맨 아너가드는 플라스틱 쓰레기와 고무를 이리저리 엮어서 전신을 가린 갑옷을 입고 있었다.
얼마나 철저한지 투명한 플라스틱을 안경처럼 만들어서 눈 부분을 감싸는 것도 잊지 않을 정도였다.
알록달록한 고무로 메워진 곳 사이사이 익숙한 상표와 제품 이름이 붙은 쓰레기들을 본 병사들은 물론 싸우던 헌터들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르겠네. 삼표 식용유. 키키킥! 저래서야 맨몸이랑 다를 게 없잖아.”
“아, 혹시 전기 공격 막으려고 입은 건가? 멍청하긴! 아무리 저런 걸로 전기를 차단하려고 해도…….”
“아뇨. 저건! 저것만 있는 게 아니에…….”
척! 두두두두!
인간들이 비웃는 사이, 플라스틱과 고무 쓰레기로 무장한 머맨 솔저와 머맨 아너가드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대로 플라스틱이 전기를 차단한다고 해서 완전히 무적은 아니었고, 또한 일반 방어구로서 기능하지 못하기에 마정석 탄환이나 폭약에 당연히 쓸릴 것이다.
하나, 그 비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뭐야? 탄환에 맞았는데? 저 플라스틱 쓰레기에 튕겼다고? 애들 공작물만도 못한 것에?”
“아니, 왜 불이 안 붙는 건데? 게다가 녹질 않아!”
“미친 생선 새끼들… 설마… 설마 쓰레기 방어구에 인챈트라고?”
상식적으로 플라스틱과 고무 쓰레기에다 귀중한 마정석을 이용해 인챈트 스킬로 마법 부여를 하는 건 미친 생각이다.
하나 저 머맨들은 이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기꺼이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에다 인챈트를 했고, 지금 그 노림수가 완벽히 먹힌 것이었다.
“게, 게다가 저 머맨들… 못해도 C, B급 헌터급 움직임이야!”
“아너가드들이 몰려옵니다! 전지아 헌터님!”
“이, 이미 손을 쓰려고 하고 있어요! 하지만!”
파지지직!
정령들을 이용해서 뇌전 공격을 해 보지만 내구성, 내화성을 완벽히 보강한 플라스틱, 고무 쓰레기 갑옷을 뚫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다른 헌터들이 나서서 각자 무기로 저지하려고 해도 피지컬과 전투 능력 면에서 뛰어난 A급 던전 보스 몬스터의 부하들인 머맨 아너가드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저런 수를 준비하고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건, 지금까지 병력을 소모한 건… 이 목사와 다른 스캐빈저가 일으킨 사태 때문에 지원이 오지 않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는 건가?”
평소 같았다면 다른 곳에서 B급, A급 헌터를 지원받거나 전라도 쪽에 있는 최충선만 불러도 플라스틱 쓰레기 갑옷은 그냥 쓰레기가 되기에 역으로 제압할 수 있다.
하나 지금은 전국적으로 스캐빈저, 악(惡) 성향 성좌들의 대연합 봉기가 일어난 상황. 다른 곳의 헌터를 부르기에도 여의치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오직 S급 헌터인 정령술사 전지아만이 유일한 최고 전력이었기에 그녀만 봉쇄하면 승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끄히히히! 끄흐하하끄르륵!]
자신의 수가 통했다는 것에 머맨 워로드는 사악하게 웃으면서 직접 검을 들고 사기를 충천시킨다.
자신들도 지혜가 있고, 수단을 강구할 머리가 있는데 그저 생선 대가리라고 모욕한 대가를 치르게 할 셈으로 그는 자신의 소라게를 타고 부산에 상륙하기 위해 달려간다.
“전지아 헌터님!”
“이, 이걸 어, 어쩌지…….”
다른 번개와 뇌전의 정령들을 동원해서 막으려 했지만 완전 무장을 한 머맨 솔저와 머맨 아너가드에겐 그 효과가 미미했다.
그나마 썬더 자이언트로 방어할 수 있었지만, 그걸로 작고 민첩한 놈들을 막으려고 하니 이젠 다시 거대 소라게 괴수들 쪽이 손이 비어서 놈들이 상륙하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제일 큰 문제는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머맨 워로드가 친히 자신의 소라게를 타고 달려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패배한다는 위기감.
절대 방어선처럼 유지하던 해안 라인이 점점 밀려나는 걸 보고 있으려니 괴로운 전지아였다.
힘을 더 짜내서 정령들의 힘을 강화시켜 보려고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단단히 무장한 머맨 솔저와 머맨 아너가드들을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그녀는 점점 절망감에 빠져들었다.